개인적 자율성과 자유라는 이데올로기의 이면이, 주관적 자유가 규율적 메커니즘에 예속된 ‘관리되는 세계’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이미지로 지젝은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든다. 어떤 장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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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득 찬 요람에서 폐쇄공포증 같은 생활을 꾸려가는 수백만 명이나 되는 인간 존재들이 매트릭스에게 필요한 에너지(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이 매트릭스가 조종하는 가상현실에 몰두해 있는 상태로부터 ‘깨어날’ 때, 이런 각성은 외부현실의 널따란 공간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첫 순간에 이런 울타리 속의 두려운 인식이 되는데, 그 속에서 우리들 각자는 실제로 양수 속에 잠겨 있는 태아 같은 유기체가 된다.(<실재계 사막>,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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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매트릭스가 조종하는 ‘가상현실’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할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마치 양수 속에 잠겨 있는 태아처럼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의 ‘나’이다. 가상현실에서는 자유롭지만(비록 환상일지라도) 실제 현실에서는 자유를 완전히 상실한 ‘수인’ 같은 형국이다. “이런 완전한 수동성은 우리의 의식적인 경험을 능동적이고 스스로 가정하는 주체들로 유지시켜주는 배제된 환상이 되는데, 그것은 최후의 도착증적인 환상이다.” 여기서 ‘배제된 환상(the foreclosed fanta-sy)’이 가리키는 것이 ‘완전한 수동성’이다. 전적으로 수동적인 상황에 처해 있지만 이러한 현실은 환상으로 치부된다. 아예 원천적으로 폐쇄되고 배제된다(정신분석에서는 주로 ‘폐제’라고 옮긴다). 그러한 배제를 통해서 우리 스스로가 능동적이고 자기-정립적이라는 환상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이렇듯 현실과 환상이 뒤집혀 있다는 의미에서 궁극적으론 ‘도착적 환상’이다.
이 환상 너머의 실재는 무엇인가? “우리의 가장 깊숙한 존재에게서 우리가 대타자의(매트릭스의) 향락의 도구가 된다는 생각은 배터리처럼 우리의 생명물질을 조금씩 써버리고 있었다.”(<실재계 사막>, 173쪽) 요점은 존재의 가장 내밀한 차원에서 우리는 ‘대타자(매트릭스)의 향락’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대타자(매트릭스)는 우리의 생명 에너지(life-substance)를 흡충처럼 빨아먹는다. 하지만 수수께끼. 어째서 매트릭스는 굳이 인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가? 순수하게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보다 간편한 다른 수단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수백만 명의 생명에너지를 추출해내기 위한 복잡한 장치의 가상현실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합리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했다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 아닐까? 좀 더 설득력 있는 대답은 매트릭스가 ‘인간의 향락(human jouissance)’을 먹고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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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대타자 그 차제가 특성이 없는 기계가 되기는커녕 향락의 끊임없는 유입을 필요로 한다는 라캉의 기본 명제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영화 <매트릭스>에 제시된 사물들의 상태를 우리가 뒤집어놓는 방식이다. 그 영화가 우리의 진정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장면으로 제시하는 것은 사실상 그와 정반대로서 우리의 존재를 유지시켜주는 기본적인 환상 바로 그것이다.(<실재계 사막>,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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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기본 명제라는 것은 대타자가 향락의 끊임없이 유입을 필요로 한다는 점. 지젝은 이를 근거로 <매트릭스>의 상황을 뒤집어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처해 있는 ‘진정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 정반대로 우리의 존재를 지탱해주는 근본 환상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클로로포름 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누워 난도질을 당하는 환자의 경우로 더 예를 드는데, 프랑스의 생리학자 피에르 플루랑스에 따르면 마취제는 우리의 기억 신경망에만 작용한다. 따라서 수술 중에 우리는 무시무시한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지만 나중에 깨어날 때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자연의 일부로서 신체는 아픔을 느끼지만 주체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젝은 이런 것이 ‘상호수동성의 완벽한 환상 시나리오’가 아닌가라고 묻는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능동적인 개입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다른 장면의 완벽한 환상 시나리오로 읽을 수 없을까? 이런 환상적인 지지 없이는, 다시 말해 그가 대타자에 의해 완전히 조종되는 장소인 이러한 다른 장면 없이는 능동적인 자유로운 행위가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례를 들 수 있을까? 지젝은 기대의 어긋나지 않는 사례를 또 챙겨놓는다. 우리의 자유로운 행위가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수동성으로 전락한 ‘다른 장면’에 의해 지탱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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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가학-피학적인 광경에서 여성 지배자에 대한 노예 노릇으로 도피하려고 날마다 수천 명의 평범한 고용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수석 경영자의 만화 같은 욕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기반을 갖고 있는 것 같다.(<실재계 사막>,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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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피학적인 광경’은 ‘사도-마조히즘 쇼(sado-masochistic spectacle)’를 가리킨다. 보통 롱부츠를 신고 가터벨트를 입은 여성이 채찍을 든 주인 행세를 하면서 남성 고객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게 쇼의 내용이다. 물론 이 쇼에서 남성은 주인 여성에게 전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실상 그 고통이 그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날마다 수천 명 직원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고위 임원이 “여성 지배자에 대한 노예 노릇으로 도피하려고” 그런 쇼를 하는 업소를 찾지는 않는다. 번역상의 오류인데, 다만 그가 그런 쇼에서 안식을 얻으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는 의미다. 즉 그런 ‘능동적’ 행위자의 ‘수동적(마조히즘적)’ 욕망이 생각보다는 뿌리 깊은 근거를 갖고 있다는 게 지젝의 지적이다. 우리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다른 장면’은 또 어떤 것이 있는지 각자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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