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에 대한 주디스 버틀러의 독해를 계속 따라가본다. 지젝은 버틀러가 헤겔뿐만 아니라 라캉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독해를 전개한다고 말한다. 즉 헤겔과 라캉이 버틀러의 두 맞수다. 헤겔은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충돌을 사회적-상징적 질서 ‘내부’에 속한 것으로, 윤리적 실체(ethical substance)의 분열을 드러내는 비극으로 보았다. 즉 크레온과 안티고네는 각각 국가와 가족, 낮과 밤, 인간의 법질서와 신적인 숨은 질서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라캉은 안티고네가 친족관계를 대표하는 것과 무관하며 차라리 상징적 질서를 설립하는 제스처의 경계적 위치(limit position)를 떠맡는다고 보았다(번역본은 ‘한정된 입장’을 떠맡게 된다고 옮겼다). 여기서 ‘경계’는 ‘한계’이자 ‘극한’이다. 상징적 질서화의 가장자리면서,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경계라는 것이다. 즉 그녀는 상징화의 경계 지점, 상징화가 불가능한 제로 차원(zero-level)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죽음 충동’을 대표한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지만 상징계에서 보면 이미 죽어 있고, 사회-상징적 좌표로부터 제외되어 있다.” 즉 사회적-상징적 좌표계에서 배제돼 표시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젝이 보기에 버틀러는 헤겔과 라캉의 이 두 극단적 입장을 거부하면서 변증법적으로 종합한다(변증법적 종합, 혹은 변증법적 지양이란 부정하면서 동시에 보존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안티고네는 기존의 상징계를 위태롭게 만드는데, 그것의 철저한 외부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것의 철저한 재분절을 목표로 삼는 유토피아적인 관점으로부터도 위태롭게 한다”(<실재계 사막>, 178쪽). 요점은 안티고네가 단지 상징계의 ‘외부’를 대표한 것이 아니라 어떤 유토피아적 관점을 대표하며, 이것은 상징계의 재분절(rearticulation), 곧 재편, 재배치, 재구성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안티고네는 공적인 공간에 자리가 할당돼 있지 않은 장소를, 거주할 수 없는 위치를 떠맡는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죽음(living dead)’이다. 하지만 그녀가 떠안는 장소/위치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며 따라서 우연적이고 특수한 상황에 따라 구조화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에 대한 버틀러의 핵심쟁점이다. 라캉의 혁신성(안티고네가 상징계의 자멸적인 외부에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생각)은 이런 질서, 즉 기존의 친족관계의 질서를 재주장하고 있는데, 최후의 양자택일이 (고정된 가부장제의) 친족관계의 상징적인 법과 그의 자멸적인 무아경의 위반 사이에서 하나가 된다고 묵묵히 생각하고 있다.(<실재계 사막>, 179쪽)

 
   

 

“라캉에 대한 버틀러의 핵심쟁점”은 “Butler's central point against Lacan”을 옮긴 것으로 “라캉에 반대하는 버틀러의 핵심쟁점”이라고 해야 옳다. 라캉과는 생각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라캉의 안티고네 해석의 핵심은 그녀가 상징적 질서 바깥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이 질서를, 확고한 친족관계의 질서를 재확인해준다. 그녀의 궁극적 선택지는 가부장적 친족관계의 상징적 법과 그에 대한 자살적 차원의 황홀한 위반이다. 법과 위반 사이. 이때 위반은 법의 확고함과 엄정함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자살적․자멸적 위반이란 스스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위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틀러가 제안하는 것은 세 번째 선택, 제3의 선택이다. “제3의 선택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이런 친족관계 그 자체를 재분절하는 것, 즉 상징적인 법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몇 가지 우발적인 사회적 배열들로 재고려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79쪽) 다시 말해서, 라캉의 안티고네는 어떤 고정된 상징적 질서와 대결하다 필연적으로 패배한다면, 버틀러의 안티고네가 맞서는 상징적 질서는 가변적이며 재배치가 가능하다. 만약 안티고네가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라면 이러한 버틀러의 <안티고네> 독해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론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지젝은 이렇게 정리한다.   

 

   
 

안티고네는 공적인 공간 속으로 받아주길 간절히 원하고 있는 전복적인 모든 ‘병리적’ 요구들을 말로 꺼내놓지만, 그녀가 이런 독해에서 의미하는 바를 호모 사케르와 동일시하는 것은 아감벤의 분석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공격을 놓치는 것이다. 아감벤한테는 완벽한 시민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차츰 허용함으로써 그들을 호모 사케르와 분리해내는 한계에 대해 ‘재타협’하는 ‘민주주의적인’ 프로젝트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관점은 오늘날의 ‘후정치학’에서 다름 아닌 민주주의적 공적인 공간이라는 것이 결국 우리 모두가 호모 사케르라는 사실을 감춰주는 가면이 된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79쪽)

 
   



요점은 버틀러의 안티고네와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좀 다르다는 것이다.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감벤의 분석이 갖는 파괴력을 둔하게 만든다. 버틀러의 안티고네가 상징적 질서의 재편과 재배치를 요구하는 유토피아적 관점을 대표한다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겐 그런 ‘재협상’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상적인 시민과 호모 사케르를 구분하는 경계가 민주주의적으로 점차 확장돼 모두가 시민으로 인정․포함되거나 하지 않는다. 아감벤이 보기엔 오히려 지금의 ‘탈정치(post-politics)’ 시대에는 민주적 광간이라는 것 자체가 가면이고 속임수에 불과하다. 무얼 가리고 무얼 속이는가? 우리 모두가 ‘호모 사케르’라는 사실을 가리고 속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도르노와 푸코처럼 우리 모두 ‘생체정치’ 대상의 지위로 환원되는 ‘관리되는 세계’의 완전한 폐쇄를 우리 사회발전의 비밀스런 목적으로 확인하는 사람들의 관점을 아감벤이 충분하고도 간단하게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는가?(<실재계 사막>, 179쪽)

 
   

 

‘기계적인’ 번역이라 읽기가 좀 불편한데, 간단히 말해서 아감벤도 아도르노나 푸코와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냐, 라는 물음이다. 아드르노와 푸코는 주장은 무엇인가? 아도르노의 ‘관리되는 세계’(번역본에선 ‘지배되는 세계’)에 대해선 이전에 언급한 바 있다. 그는 현대 사회가 이대로 계속 발전해나간다면 그 끝에서 완전히 폐쇄적인 ‘관리되는 사회’가 될 거라고 전망한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는 ‘생체정치’의 대상으로 격하되고 전락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부정적이고 음울한 전망이다. 과연 아감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이 질문에 대한 지젝의 대답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감벤의 입장은 무엇인지, 그는 아도르노와 푸코와는 어떤 점에서 전망을 달리하는지 다음 회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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