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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아감벤이 어떠한 ‘민주주의적’ 탈출구도 부정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에 관한 상세한 독해에서 그는 ‘혁명적인’ 메시아의 차원을 맹렬하게 재주장하고 있으며, 만일 이런 메시아의 차원이 적어도 뭔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삶’이 더 이상 정치의 궁극적인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실재계 사막>, 179~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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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생명’ 혹은 ‘벌거벗은 생명’은 생체정치(생명정치)의 대상이다. 하지만 메시아적 차원을 도입하고 고려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정치의 궁극적인 대상, 유일한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바로 아감벤의 경우가 그렇다는 얘기다. 이때 지젝이 염두에 두고 있는 저작은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이다(번역본 각주에는 <머물러 있는 시간>이라고 옮겨졌다). <남겨진 시간>에 대해서는 한 서평에서 다룬 바 있는데(<책을 읽을 자유>, 현암사, 2010, 450~452쪽 참조) 조금 간추려서 소개하자면, 사도 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여섯 차례의 강의록을 묶은 책이다. <호모 사케르>에서 주권의 역설적 논리를 분석하고 수용소야말로 근대성의 노모스(nomos, 규범)이면서 근대 정치의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했던 아감벤은 <남겨진 시간>에서 바울의 편지에 대한 치밀하고도 유려한 문헌학적 주석을 통해 그의 메시아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면밀히 조명한다.

아감벤이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은 고대 그리스어 성경의 로마서 1장 1절을 구성하는 10개의 단어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란 뜻으로 풀이되는 이 구절의 원문 “PAULOS DOULOS CHRISTOU IESOU KLETOS APOSTOLOS APHORISMENOS EIS EUAGGELION THEOU”를 구성하는 각 단어에 아감벤은 주석을 붙인다. 로마서야말로 바울의 사상과 복음에 대한 증언적 요약이며, “글의 첫머리 한 개 한 개의 언어가 편지의 텍스트 전체를 총괄하는 형식으로 스스로 축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감벤은 ‘CHRISTOU’가 뜻하는 ‘그리스도’가 단지 ‘기름 부어진 자’를 뜻하는 헤브라이어 ‘마시아(=메시아)’를 그대로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란 ‘구세주 예수’ 또는 ‘예수라는 구세주’를 가리킬 뿐이라는 점에 주의하도록 한다. 그리고 ‘소명 받음’을 뜻하는 ‘KLETOS’의 파생어 ‘클레시스(klesis)’는 루터에 의해 독일어 ‘베루프(Beruf)’로 번역되면서 ‘직업’이라는 근대적 의미까지 획득하게 됐다고 언급하는 식이다. 요컨대 아감벤의 이러한 작업은 ‘단순한 삶’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고려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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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시간의 종말을 기다리는’ 메시아의 태도에 매달려 있는 것은 정확히 ‘단순한 삶’의 중심 자리이다. 분명히 그와 대조되는 후-정치학의 근본적인 특징은 ‘단순한 삶’을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정확히 그런 의미에서 정치를 ‘생체정치’로 바꾸는 환원이 된다.(<실재계 사막>,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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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문장은 잘못 번역됐는데, 원문은 “what is suspended in the Messianic attitude of 'awaiting the end of time' is precisely the central place of 'mere life”이다. ‘suspended’가 ‘매달려 있는’이라고 옮겨졌는데, ‘중지되는’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조금 의역하여 다시 옮기면, “종말을 기다리는 메시아적 태도는 ‘단순한 삶’이 갖는 중심적 지위를 박탈한다.” 어째서 그런가? ‘종말을 기다리는 메시아적 태도’에서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 곧 ‘단순한 삶’은 적극적 의미를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삶’은 더 이상 삶의 중심이자 핵심으로 행세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의의가 절감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후-정치학’, 곧 ‘정치 이후’의 ‘탈정치(post-politics)’는 ‘정치’를 ‘생체정치’로 축소(환원)시킨다. 고작 ‘단순한 삶’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일이 정치의 모든 것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감벤을 단순히 ‘생체정치’의 철학자로만 주목하는 것은 그를 오인하는 태도다. 지젝은 “아감벤에 대한 이런 (잘못된) 도용은 미국의 급진적인 학계의 경향을 예시해주는 일련의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꼬집는다. 여기서 ‘급진적인’이란 말은 일종의 아이러니를 담은 말이다(지젝은 아감벤보다 더한 사례가 푸코라는 지적을 덧붙인다). 그래서 이어지는 것은 소위 ‘급진적 정치(radical politics)’에 대한 지젝의 비판이다. 비판의 과녁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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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민주주의적 해방 프로젝트의 폐쇄에 대한 그의 강조와 함께 도용된 유럽의 지식계는 민주주의적 공간의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확대라는 정반대의 장소에 기입되어 있다. 표면상 이런 정치적 급진화의 이면은 다음과 같다. 급진적인 정치실행 그 자체는 권력구조를 동요시키고 교체할 수 있는 끝없는 과정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을 실제로 위태롭게 만들 수 없다. 그러니까 급진적인 정치의 목표는 사회적 배제의 경계를 점차 바꿔주는 것인데, 배제된 행위자들(성적인 소수와 인종적인 소수)한테 그들이 자신들의 동일성에 대해 표명하고 질문할 수 있는 변방의 공간을 만들어줌으로써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실재계 사막>, 180~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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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뜻인지 번역문만으로는 알아차리기 어려운데, 일단 ‘도용된 유럽의 지식계(the appropriated European intellectual topos)’란 말은 푸코나 아감벤 같은 유럽 철학자에 대한 전유, 곧 편의적인 이해를 가리킨다. 아감벤을 생체정치의 철학자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태도다. 그러한 ‘도용’과 함께 정작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민주적 해방 기획’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대신에 초점은 ‘민주적 공간의 점진적․부분적 확대’ 쪽으로 맞춰진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정치적 급진화’로 보이지만, 그 이면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어떤 이면인가? “급진적인 정치실행 그 자체는 권력구조를 동요시키고 교체할 수 있는 끝없는 과정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을 실제로 위태롭게 만들 수 없다”라는 점. 요점은 급진적 정치실행 자체가 궁극적으론 권력 구조를 무너뜨리지도 못하면서 그냥 그것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바꾸기도 하는 항구적인 과정 정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급진적 정치란 그래서 배제된 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더 늘려나가는 정도에 머문다. 이것이 말하자면 급진적 정치의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