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병증적 매듭’ 같은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 지젝은 이 매듭에서 둘의 역할이 뭔가 전도돼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이 뒤바뀐 것일까?  

 

   
 

이스라엘ㅡ공식적으로 서양의 자유주의 모더니티를 보여주는ㅡ은 그 자체를 인종-종교적 동일성에 의하여 합법화하고 있는 반면에, 팔레스타인ㅡ전근대적인 ‘근본주의자들’로 깎아내려진ㅡ은 현세의 시민권에 의하여 그들의 요구를 합법화하고 있다.(<실재계 사막>, 221~222쪽)

 
   

 

다시 말하면, 공식적으론 서양의 자유주의적 현대성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민족적-종교적 정체성(유대인/유대교)을 통해서이고, 전근대적인 근본주의자로 치부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세속적 시민권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명령 거부자들’이 보여준 진실은 무엇인가?  

 

   
 

그 요점은 단지 이스라엘 방위군 예비병들의 거부가 이슬람 광신자들과 싸우는 문명화된 자유주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단순한 적대감을 완전히 흔들어놓는 상황의 한 측면을 내보여주었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정확히 국가 전체를 호모 사케르의 위치로 환원시킨 측면이고, 정치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그들의 자율성을 빼앗아 가버린 성문규정과 불문규정의 네트워크에 그들이 따르게 하는 측면이다.(<실재계 사막>, 222쪽)

 
   

 

“이슬람 광신자들과 싸우는 문명화된 자유주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단순한 적대감”은 “the simple opposition of civilized liberal Israelis fighting Islamic fanatics”를 옮긴 것인데,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이라는 대립 구도가 “이슬람 광신자들과 싸우는 문명화된 이스라엘의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며, ‘명령 거부자들’은 이러한 허위적 대립 구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는 지적이다. 또한 그들이 폭로한 것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 전체를 호모 사케르의 상태로 전락시켰다는 점이다. 곧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법적으로 명시화돼 있거나 명시화돼 있지 않은 규제들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그들이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갖는 자율성을 이스라엘은 박탈해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이러한 갈등은 알카에다에 대한 ‘테러와의 전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지젝은 2002년 봄에 이루어진 불가사의한 초점의 이동을 지목한다. 갑자기 아프가니스탄이, 심지어는 WTC 공격에 대한 기억까지도 뒤로 물러나고 초점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규 쪽으로 옮겨갔다. 두 가지 ‘본질주의적 환원’이 가해졌다. 미국과 이스라엘 매파(강경파)에게 ‘테러와의 전쟁’은 기본적 전거가 된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투는 이러한 투쟁의 부속 장이었다. 더불어 아라파트는 빈 라덴이 되었고. 한편으로, 아랍인들에게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 기본적 전거가 된바, 9.11 사건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과 미국이 팔레스타인에 저지른 불의와 만행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이러한 이중의 ‘본질주의적 환원’은 구문적으론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의 형식을 취한다. 자살폭탄 테러에 대해 자유주의적 이스라엘인들은 “나는 샤론을 지지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란 태도를 취한다. ‘그래도 역시’ 이런 상황에서라면 이스라엘은 자구책이 필요하며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가 있다는 식이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서구 지식인들은 어떤가. 그들은 “이스라엘 민간인들의 무차별적인 살해를 옹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란 태도를 취한다. 즉 자살폭탄 테러는 ‘그래도 역시’ 이스라엘의 군사력에 항거하는 무력한 사람들의 절박한 행동이라고 본다. 물론 서로가 이런 식이라면 출구는 없다. 이런 악순환을 어떻게 깨뜨릴 수 방도는 무엇인가?  

 

   
 

이런 악순환을 깨뜨리는 유일한 방법은 다름아닌 그 갈등의 좌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행위를 통해서 가능하다. 결국 아리엘 샤론의 문제는 그의 과잉반응이 아니라 그가 충분히 행동하지 않음에 있다. 샤론은 잔인한 군사 실행자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혼란스런 정치를 추구하는 지도자의 모델이 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과도한 군사행동은 결국 무능함의 표현이다. 그것은 모든 겉모습과는 반대로 뚜렷한 목표가 없는 무능한 ‘행위로의 이행’이다.(<실재계 사막>, 225쪽)

 
   

 

즉 이스라엘의 무력 개입은 얼핏 과도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는 ‘행위로의 이행’, 곧 발작적 행동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책은 먼저 현 상황의 궁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곧 어느 쪽도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모든 아랍지역을 점령할 수 없으며, 반면에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파괴할 수 없다. 그런 교착 상태에 대한 인식이 낳을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일까? 지젝은 ‘코소보화(化)’를 제안한다. 즉 “점령된 서안(西岸)과 가자지구에 국제군의 직접적이고 일시적인 주둔이 팔레스타인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테러’를 동시에 예방할 수 있을 것 같고, 따라서 팔레스타인의 국가로서의 지위와 이스라엘의 평화 둘 모두의 조건을 보증할 것 같다”(226~227쪽)는 생각이다. 다시 물어보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그 용어의 가장 철저한 의미로는 ‘진짜’ 적개심의 가짜 갈등이고, 하나의 미끼이며, 이데올로기적 전치이다. 그렇다. 아랍의 ‘근본주의자들’은 ‘이슬람-파시스트들’이다. 전형적인 파시스트의 제스처를 반복하면서 그들은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 이스라엘인들은 서양의 자유주의적 관용의 원칙을 나타내면서도 그들의 특이함 속에 이런 원칙의 예외를 구현해내고 있다. 그러나 서양의 자유주의적 관용에 대한 이스라엘인의 참조는 신식민주의적 자본의 테러에 대한 외관의 한 형식이다. ‘부자유’에 대한 요청(반동적인 ‘근본주의’)은 이런 테러에 대한 저항의 겉모습을 보여주는 한 형태이다.(<실재계 사막>, 229쪽)

 
   

 

‘진짜 적개심(true antagonism)’은 ‘진정한 적대’로 이해하는 게 낫겠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갈등이란 것은 진정한 적대를 드러내는 갈등이 아니라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전치된 가짜 갈등이라는 얘기다. 아랍의 근본주의자들이 이슬람-파시스트라고 치자.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은 자유주의적 관용의 원칙을 대표한다고 치자. 하지만 그러한 자유주의적 관용은 자본의 신식민주의적 테러가 갖는 외양에 불과하다. 더불어 반동적 ‘근본주의’는 이러한 테러에 대한 저항의 외양이다. 즉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진정한 적대는 자본주의적 적대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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