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행동에 대한 비판은 곧잘 반유대주의와 동일시되곤 한다. 그러고는 ‘당신은 홀로코스트를 잊은 것 아니냐?’라는 반문과 함께 ‘유대인들이 당한 고통에 비하면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라는 식의 주장이 뒤따른다. 일종의 상투적 정당화다. 곧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과 정치 활동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하기 위해 홀로코스트의 수사학이 동원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지젝은 이렇게 권고한다.  

 

   
 

이스라엘이란 국가에 의해 취해진 특수한 조치에 대한 비판과 반유대주의와의 사이에 놓여진 차이점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경우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모독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국가라고 주장해야 한다. 즉 그들을 무자비하게 조작하고 최근의 정치적인 조치를 합법화하는 수단으로 그들을 도구화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홀로코스트와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긴장 사이에 맺어놓은 어떠한 논리적 연결 혹은 정치적 연결이란 개념을 즉석에서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실재계 사막>, 230쪽)

 
   

 

즉 이스라엘의 조치에 대한 비판과 반유대주의는 구별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을 모독하는 것은 오히려 이스라엘 자신이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들을 무자비하게 조작하고 최근의 정치적인 조치를 합법화하는 수단으로 그들을 도구화하는 것이다”라고 할 때 ‘그들’이 가리키는 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이다. 이 희생자들을 자신의 정치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무자비하게 갖다 쓰고 있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행태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을 홀로코스트와는 전혀 무관한 사태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걸 말해준다. “그들은 완전히 서로 다른 두 가지 현상들이다.” 어떻게 다른가? “하나는 현대화의 역동에 대한 우파의 저항에 관한 유럽 역사의 일부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화 역사의 마지막 장 가운데 하나이다.” 곧 홀로코스트가 근대화(현대화)에 대한 우파의 저항(파시즘)이 빚어낸 유럽 역사의 일부라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식민주의 역사의 한 귀결이다. 여기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어려운 과제’란 그들의 진정한 적은 유대인이 아니라 아랍 체제라는 인식이라는 게 지젝의 지적이다. 아랍권이 자체의 정치적 급진화, 혹은 급격한 변동을 방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곤경을 조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맥락에서 지젝은 뉴스위크의 <다보스 특별판>(2001년 12월/2002년 2월)에 실린 두 편의 논설을 검토한다. 하나는 새뮤엘 헌틴텅의 “무슬림 전쟁의 시대(The Age of Muslim Wars)”이고, 다른 하나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실제의 적(The Real Enemy)”’이다. 후쿠야마는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역사는 끝났다’는 ‘역사의 종언론’을 펼쳐 화제를 모은 바 있으며, 헌팅턴은 냉전 이후 세계는 이제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아닌 ‘문명의 충돌’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해 인구에 회자되었다. 두 사람의 견해는 어떻게 조우하는가. 실제로 두 사람 모두 근본주의 이슬람이 오늘날의 주된 위협이라는 데는 인식을 같이한다. 한 사람은 ‘종말’을 주장하고 한 사람은 ‘충돌’을 경고하므로 얼핏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을 같이 읽으면서 우리는 ‘문명의 충돌=역사의 종말’이라는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어째서인가?  

 

   
 

위장-자연화된 인종-종교적 갈등들은 세계화 자본주의에 꼭 맞는 갈등의 형태가 된다. 진정한 정치가 차츰 전문가의 사회관리로 대체되어가는 후리의 ‘후(後)정치’ 시대에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갈등의 합법적인 근원이 문화적(인종적, 종교적) 긴장이다. 따라서 오늘날 ‘불합리한’ 폭력의 야기는 우리 사회의 탈정치화와 정확히 상관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차원의 소실, 즉 사회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수준의 ‘관리’로의 전환과 상관되는 것으로 간주된다.(<실재계 사막>, 231~232쪽)

 
   

 

‘위장-자연화’는 ‘유사-자연화’란 뜻이다. 인종-종교적 갈등은 자연 현상이 아님에도 마치 자연 현상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갈등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 잘 부합하는 투쟁 형식이다. 왜냐하면 정치 이후의 시대, 탈정치 시대에는 본래적 정치가 점차 전문가들의 사회 관리, 곧 행정으로 대체되기 때문이고, 이 경우 갈등을 유발하는 원천은 문화적 차이로 인한 긴장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늘날 ‘비이성적’ 폭력의 증가는 사회의 탈정치와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본래의 정치적 차원에 실종됨으로써 발생하는 일이며, 사회적 문제가 여러 층위의 ‘행정적’ 처분의 대상으로, 곧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문제로 간주됨으로써 빚어지는 일이다.  

 

 

후쿠야마는 ‘이슬람-파시즘’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지젝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단, 엄밀한 의미에서의 ‘파시즘’, 곧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에 대한 불가능한 시도를 가리키는 말로써 말이다. 과도한 개인주의가 없고, 사회적 해체도 없으며 가치의 상대화도 없는 자본주의가 파시즘이 원하는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였다. ‘이슬람-파시즘’은 불가피한 선택지인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슬림에 대한 선택이 오로지 이슬람-파시스트의 근본주의자이거나 혹은 무슬림이 현대화와 양립할 수 있는 ‘이슬람 신교’라는 고통스런 과정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시도된 바 있던 제3의 선택도 있다. 그것이 바로 이슬람 사회주의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그 고유한 태도는 증상적인 주장으로서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진정한 이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일이다.(<실재계 사막>, 232~233쪽)

 
   

 

‘무슬림에 대한 선택’은 ‘무슬림의 선택지’를 뜻한다. 오늘날 무슬림에겐 ‘이슬람 파시즘적 근본주의’와 ‘이슬람 프로테스탄티즘’ 간의 양자택일적 선택만이 남은 것일까? 그건 아니라는 얘기다. 지젝은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또 하나의 선택지가 시도된 바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 새로운 선택지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근대화에 반대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슬람 파시즘’으로 귀결될 필연성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프로젝트로로 표명될 수 있다. 이슬람 파시즘의 현재의 곤경에 대한 ‘최악의’ 가능한 대답이라면, 이슬람 사회주의는 반대로 ‘최선의’ 대답이 될 수 있다.

결국 ‘유대인 문제’는 ‘아랍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미 지적된 것이지만(48회 참조), 아랍-유대인 긴장은 전치되고 신비화된 ‘계급투쟁’이다. 그것은 유대적 ‘코즈모폴리터니즘’과 근대성에 대한 무슬림의 거부 사이의 갈등이라는 탈정치적 형식으로 전치되었을 따름이다. 따라서 지구화된 세계에서 반유대주의의 회귀가 시사해주는 바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래된 통찰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하게 진정한 해결책은 바로 사회주의(Socialism)라는 통찰이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설 연휴를 쉬고 내주 화요일(8일)에 마지막 50회가 연재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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