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서 이스라엘 ‘명령 거부자’들이야말로 ‘호모 사케르에서 이웃으로의 이행’을 전범적적으로 보여준다는 대목까지 다루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호모 사케르’가 아닌 ‘이웃’으로 대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윤리적 행위’란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거부에 대해 충분하리만큼 열광적일 수는 없지만, 매스 미디어에 의해 가볍게 취급되었는데, 그건 의미로운 일이다. 참여하길 거부하는, 즉 선을 긋는 그러한 제스처는 진정으로 윤리적인 행위이다. 여기 바로 그런 행위 속에, 사도 바울이 제시했을 법한 것처럼, 실제적으로 더 이상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도 없고, 그 정치조직의 정회원과 호모 사케르도 없으며….(<실재계 사막>, 206쪽)

 
   

 

 


 

조금 정리해서 다시 읽으면, 일단 우리는 그러한 거부 행동에 대해서 아무리 열광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매스컴에서는 의미심장하게도 그 일을 평가절하해 보도했다(지나는 김에 말하자면 ‘의미로운’이란 말은 한국어가 아니다). 지젝은 어떤 일에 참여하길 거부하는 ‘바틀비적 태도’를 윤리적 행위의 전범으로 간주하는데, 이 명령 거부자들이야말로 거기에 해당한다. 그것은 사도 바울적 제스처이기도 하다. 즉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있을 뿐 더 이상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사이의 구분은 없다고 말하는 제스처다.

‘정치 조직의 정회원’이란 말은 ‘full member of the polity’를 옮긴 것인데,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이해하면 된다. 한국이라면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성인을 가리킨다. 원칙적으로 선거건과 피선거권을 가지며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가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물론 호모 사케르는 그러한 자격을 박탈당한 이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도 바울적 제스처가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염치없이 플라토닉해져야 한다. 이런 ‘아니오’는 영원한 정의가 경험적 현실이란 시간영역에 잠시 나타나는 기적 같은 순간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순간들의 인식이 이스라엘 정치에 관한 비판 가운데 흔히 분명하게 찾아낼 수 있는 반유대주의적 유혹에 대해 가장 훌륭한 해독제가 된다.(<실재계 사막>, 206쪽)

 
   

 

‘염치없이(unashamedly)’는 그냥 ‘당당하게’, ‘아무 부끄럼 없이’ 정도로 읽으면 좋겠다. ‘플라토닉해져야 한다’는 ‘플라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로 읽으면 된다. 현실을 이데아의 그림자로 간주하는 태도를 여기서는 보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명령 거부자들의 ‘거부(No!)’, 곧 부정의 제스처는 “영원한 정의가 경험적 현실이란 시간영역에 잠시 나타난 영원한 정의”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야말로 반유대주의적 유혹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가 된다는 것이 지젝의 생각이다. 그는 이런 ‘불가능한’ 윤리적 행위야말로 어떤 상황 변화와 재난 앞에서도 의미를 잃지 않을 윤리적 행위라고 말한다. ‘불가능한’이라고 수식한 것은 그것이 상징적 좌표계 혹은 상징적 질서의 바깥에 속하기 때문이다[지젝에게 ‘행위(act)’란 그러한 좌표계를 변화시키는 돌파행위를 말한다]. 지젝은 한 번 더 그러한 행위의 의의에 대해 강조한다.  

 

   
 

특히 지금(2002년 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간의 폭력의 순환이 점차 그 자체의 자동추진식의 역동 속에 빠져들어 가서 미국의 개입에도 분명하게 통하지 않게 되면, 이런 순환을 중단시킬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기적적인 행위일 뿐이다.(<실재계 사막>, 207쪽)

 
   

 

‘자동추진식 역동(self-propelling dynamic)’이란 ‘자가발전’으로 이해하면 된다. 아이들이 서로 상대방의 뺨을 때리기 놀이를 하다가 점점 과열되어가는 과정이 말하자면 ‘자가발전’ 과정이다. 옆에서 선생님이 말려도 소용없을 때가 있지 않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악순환적 폭력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상대방의 공격에 대한 ‘피의 보복’을 다짐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더 나아가 최악의 경우엔 미국의 개입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그런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조처가 바로 명령 거부자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기적적인 행위, 곧 윤리적 행위다.  

 

   
 

오늘날 우리의 의무는 그런 행위들을, 그런 윤리적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 일이다. 가장 나쁜 죄는 ‘순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와 같은 허위 보편화 속에 그런 행위들을 해소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게임을 할 수 있는데, 그 선수들한테 이중의 이득을 챙겨준다. 갈등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보다 도덕적 우월감을 유지하게 되는 이득(‘결국엔 똑같지만’), 그리고 전념과 구성좌표의 분석과 편들기와 같은 어려운 임무를 회피할 수 있는 이득이다.(<실재계 사막>, 207쪽)

 
   

  

 

 

이 대목에서 지젝이 윤리적 행위와 대비시키는 것은 ‘허위적 보편성’이다. ‘잘못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no one is pure)’라는 양비론적 태도로 윤리적 행위의 의미를 ‘물타기’하는 것이 가장 나쁜 죄다. 그런 물타기는 실상 다반사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득인가? 우선 “결국은 다 똑같은 놈들이지(ultimately all the same)”라고 말함으로써 은연중에 자신은 그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낫다는 점을 과시하게 된다. 이 양비론자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민간인까지 공격하는 이스라엘 놈들이나 그렇다고 폭탄 테러를 저지르는 팔레스타인 놈들이나 다 똑같은 놈들 아냐? 서로 좀 양보하면 되는 걸 갖고 말이야.”

이렇게 모든 책임을 양쪽에 전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득은 “전념과 구성좌표의 분석과 편들기와 같은 어려운 임무(the difficult task of committing himself, of analysing the constellation and taking sides in it)”를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념(committing himself)’이라고 옮긴 것은 자기 자신을 연루시키고 책임을 떠안는 걸 말한다. 양비론자들처럼 “너희 둘이 잘못했으니까 너희들이 책임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나도 책임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라며 나의 잘못과 책임을 발견․인정하는 것이다. 그 책임은 어떻게 질 수 있는가? 문제적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정확하게 한쪽 편을 지지함으로써이다. 누구의 잘못과 책임이 더 큰지를 분명하게 가려내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술에 물 탄 듯이 모든 것이 흐리멍덩해질 것이다. “그것은 최근 몇 년 동안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파시스트의 약속이 천천히 깨져나가는 것과 같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으며 그 부정적 결과는 무엇인지는 다음 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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