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최근 몇 년 동안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파시스트의 약속이 천천히 깨져나가고 있는 것과 같다”(<실재계 사막>, 207쪽)는 대목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순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no one is pure)’는 논리, 곧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는 식의 논리가 도달하게 되는 부정적 귀결을 지적하는 대목인데, 제2차 세계대전의 교훈으로 그간에 파시즘만을 부정하다는 약속(묵계)이 지켜져왔지만 그게 와해되고 있다는 얘기다.  

 


 

“역사가-수정론자들로부터 신우파 포퓰리스트들에게로 터부는 굴러 떨어지고……”라고 이어지는데, ‘역사가-수정론자들(historians-revisionists)’은 홀로코스트의 실체를 부정하거나 의문시하는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파시즘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는 에른스트 놀테 같은 경우도 ‘수정주의’의 대표격이다. 그가 ‘수정’하고자 하는 견해는 파시즘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과 부정으로, 그가 보기에 파시즘이 나쁜 건 맞지만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서 불가피한 면이 있으며 또 그에 비하면 차악에 불과하다. 이러한 지식 사회의 수정주의에서부터 ‘신우파 포퓰리스트(New Right populists)’까지 파시즘이 뭐 그렇게 대단하게 나쁜 것인가란 의문이 제기되면서 ‘반파시즘’을 구호로 내건 사회적 연대가 흔들리고 있다. “금기들이 무너지고 있다(taboos are tumbling down)”라는 표현은 그것을 가리킨다.  

 

역설적으로 이런 약속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희생시키기의 자유주의적 보편화된 논리를 참조하게 된다. 틀림없이 파시즘의 희생자가 존재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추방에 의한 다른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1945년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자신들의 집에서 쫓겨난 독일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들도 (재정적인) 보상에 대한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돈과 희생의 이런 기묘한 결합은 오늘날 돈 물신주의 가운데 한 가지 형태(아마 ‘진실’까지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가 절대 확실한 범죄라고 되풀이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그에 대한 적절한 재정적 보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으며…….(<실재계 사막>, 207~208쪽)

 

원문에서 콜론(:)이 우리말 번역문에는 쓰이지 않기 때문에 종종 이해를 어렵게 만들기도 하는데, 인용문에서도 첫 문장 다음에 콜론이 쓰였다. 콜론은 어떤 예시나 보충 설명이 뒤따른다는 신호다. ‘희생시키기의 자유주의적 보편화된 논리’라는 게 어떤 것인지 보충 설명해주는 것이 이어지는 세 문장이다. 첫 문장에서 ‘약속’은 앞에서 본 대로 ‘반파시즘’을 내용으로 한다. 그걸 무력화하는 이들이 끌어들이는 게 ‘희생의 자유주의적 보편화 논리(liberal universalized logic of victimization)’다. 알고 보면 다 희생자 아니냐는 논리다. 가령, 파시즘에 대해서 비난들을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추방된 희생자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공평하게 말하자면 1945년 체코에서 추방된 독일인들도 희생자들 아닌가? 만약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해야 한다면 이들 독일인 희생자들에 대해선 어떤가? 이들도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등등이 그런 논리에서 제기되는 물음들이다.

지젝은 특별히 보상 문제와 관련하여 희생과 돈을 연계하는 것이 오늘날 화폐 물신주의(money fetishism)의 한 형식이라고 말한다. 아니 심지어 화폐 물신주의의 ‘진실’이라고 말한다. 홀로코스트가 결코 상대화될 수 없는 절대적인 범죄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사람들은 동시에 적절한 ‘보상’을 이야기한다(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일종의 난센스다). 그렇다면, 수정주의의 핵심은 ‘상대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연합군이 드레스덴을 폭격한 것도 불필요한 일이 아니던가?”라는 식의 상대화다. 따지고 보면 연합군도 실수한 것, 잘못한 것이 있지 않느냐, 히틀러만의 잘못은 아니다, 라는 식. 하지만 정작 그런 ‘보편주의’가 정작 필요한 쪽은 테러와의 전쟁이 아닐까.  

 

따라서 미국의 ‘테러에 대한 전쟁’의 허위성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지 그것을 보편화하는 것이다. 미국을 따라 다른 나라들도 자신들을 위해 동등한 권리를 주장했다.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테러리스트들이 인도의 국회를 공격한 후에 파키스탄에의 군사적 개입에 대한 동일한 권리를 주장하는 인도에 대해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미국이 의거하고 있는 ‘테러리스트’의 정의에 의심할 여지없이 꼭 들어맞는 그런 사람들의 인도를 거부했던 미국 정부에 대항하는 과거의 모든 정부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실재계 사막>, 220~221쪽)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파키스탄에 대해서 인도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때 우리는, 최소한 미국을 말릴 권리가 없지 않을까? 물론 그럼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뭔가 예외적이며, 어떤 병증적 매듭(symptomal knot)의 문제라고 지젝은 지적한다. “우리가 중동 위기의 병증적 매듭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모든 참여자들이 자주 어울리기 위해 되풀이해서 되돌아오는 그의 실재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221쪽)  

 

 

중동 위기의 병증적 매듭, 혹은 ‘징환적 매듭’이라는 것은 곧 그 실재(the real)다. “모든 참여자들이 자주 어울리기 위해 되풀이해서 되돌아오는 그의 실재계”라는 말은 부정확한데, 얘기인즉 어떤 실재가 끊임없이 되돌아와서 중동 위기의 관련 당사국들에 망령처럼 들러붙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협상이 잘 타결될 만하면 다음 순간 곧 모든 조처를 무력화하는 사건이 발생하곤 한다. 때문에 ‘징환적 매듭’이란 것이 여기서는 적절한 쓰임새를 갖는다(번역어로는 ‘징후/징환’, ‘증상/증환’ 쌍이 쓰인다).

징환, 혹은 증환은 환상을 넘어서까지도 잔존하는 병리적 형성물을 가리킨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처한 갈등 관계의 무엇을 설명해줄 수 있는지는 다음 회에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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