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오래 울었는데도 이상하게 진정이 잘되지 않았다. 심장이 물에 뜬 듯 출렁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봉투안에 든 편지를 꺼내서 펼쳤다. "글씨를 힘차게 쓰던 용감한 한국의 숙녀분께."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구나. 나는 마치 그 편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노인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한줄 한줄 읽어내려갈 때마다 알 수 없는 곳을 향한 미안함의 눈물이 자꾸 흘렀다. 편지의 끝에는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과 함께 숫자 열세개가 적혀 있었다. 노인이 전화번호까지 적어줬었어? 왜 나는 이런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대체 왜.
(p.211 탐페레 공항)

그런 기이한 작별인사가 끊어질 듯 이어졌고, 그렇게 놓으려는자와 끊지 못하는 자의 실랑이가 한참을 더 이어진 끝에 통화가 끝났다. 세상 질척거리는 통화였다. 심지어 나는 울고 있었다. 최악이었다.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져버리고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뚜껑을 닫지 않은 채로 올려놨던 작은 생수병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고 바닥에 두었던 백팩 위로 물이 쏟아졌다. 나는 황급히 백팩을 집어 들었다. 백팩의 앞주머니 지퍼가 활짝 열려 있었다.
이 씨발년이. 열었으면 닫아놔야 할 거 아냐. 소중한 황금연휴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가 지유씨 앞에서 울었다는 사실이 억울해서 또 눈물이 났고 그렇게 눈물의 악순환 속에서 잠이 들었다.
(p.97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새집에 놓여 있는 물건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들인 게 없었다. 침실 조명은 며칠씩 해외 사이트를 뒤져서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으로 설치했다.
이사 오고 나서는 한동안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집도 내 것이고,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내가 고른 내 것인데, 그런 집에서 내 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 내 것 같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이상한 불안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잠들었다가도 쉽게 깼다. 그럴 때면나는 조용히 일어나 침실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그러고는 마치처음 와보는 것처럼, 손님의 시선으로 집을 둘러봤다. 무광의 골드로 포인트를 준 방문 손잡이와 날렵한 곡선의 싱크대 수전을 매만졌고, 세겹의 셰이드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퍼져나오는 루이스폴 센의 펜던트 조명을 껐다 켰다 해봤다. 내가 신경 쓰고 힘준 것들을 하나씩 짚어본 다음에야 편히 잠들 수 있었다.
(p.130 도움의 손길)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없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 안에 거대한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민서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피아노 보관시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가 기실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테고 패브릭 소파와 소파스툴, 원목장과 몬스테라 화분은 둘 엄두도 못 낼 것이다.
(p.142 도움의 손길)

연봉계약서에 서명하던 그 순간, 씁쓸한 감정이 들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기뻤다. 방송국이고,
피디고 뭐고 지긋지긋했다. 대신 4대 보험이 어쩌고 하는 말들과 상여금, 특근수당, 연차와 실비보험 같은 단어들이 그렇게나 따뜻하고 푹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수습 기간이 끝나고 정직원이 되면서 회사에서 가족 의료비도 지원해주었다. 아빠는 그 돈으로 수술할 수 있었다.
(p.207 탐페레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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