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공이 그렇게 잘 팔렸던 데에는, 물론 모든 공인 경기에선 소가죽 공만을 써야 한다는 축구협회의 규정이 끼친 영향도 컸으나, 무엇보다도 그의 뛰어난 마케팅 실력이 한몫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는, 군함을 앞세워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만든 국가 덕분에 갑자기 돈에 여유가 생긴 중산층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간파했다.

현대적 마케팅 기법이나 광고학도 배우지 않은 토마스 굿맨이 어떻게 그런 대단한 판매 기법을 개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는 당시 런던에서 가장 잘나가던 신문인 ‘데일리모닝’과 손잡고 ‘한 가족 한 축구공 가지기 운동‘ 이라는 생소한 캠페인을 전개했다.

당대 최고의 내과의사가 쓴 사설을 가장한 광고문을 보면 그때 런던을 휩쓴 축 구공 광풍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즉 거 기서 의사는 "체력은 곧 국력이며, 지구 반대편까지국가의 힘이 뻗어나가는 이때 어린 시절부터 공을 차고 달리며 심신을 강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 국"임을 엄숙하게 설파한 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그런데 얼마 전 필자가 직접 공을 차보니, 토 마스 굿맨이라는 업자가 만든 가죽 공이 체력단련에 가장 좋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는 사연을 덧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어느 정도 여유 있는중산층 집안에선 아들들에게 토마스 굿맨 상표가 새겨진 가죽 축구공을 선물하는 것이 일종의 관습으로자리잡았다.

그렇게 하여 일군 부를 바탕으로 토마스굿맨은 왕실로부터 작위를 얻었으며, 일약 체육계의명사가 되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군납업체로까지 선 정되는 행운마저 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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