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년전거시아
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후 아시거
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전에는 거시기가 난 줄 알았는데,
팔십 년을 지나고 보니 내가 거시기로구나!"

"거시기"를 부처님으로 바꾸어놓고 생각해보죠! 어렸을 때 불문에들어와 구도자로서 행각을 시작할 때에는 부처님은 항상 저기 연화좌 위에 앉아있는 거시기(그 무엇)였습니다. 나 밖에 있는 초상화 같은것이었죠. 이제 열반에 들려고 하는 마지막 순간에 생각해보니, 이죽어가는 내가 곧 부처요, 80년을 살아온 이 나가 곧 싯달타였다(八十年後我是渠)라는 것이죠.

거시기를 "예수"로 바꾸어 놓고 보아도 똑같습니다. 보통사람들에 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상이 신앙의 대상으로서 거시기화 되 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궁극에 도달한 자는 깨달을 것입니 다. 예수가 나의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곧 예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내가 곧 십자가를 멘 예수가 될 때에만이 그리스도(=구세救世)의 의미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서산이 말한 거시기를 "철학"으로 바꾸어놓고 생각해봐도 동일하죠. 제가 철학과를 들어갔을 때는 물론 "철학philosophy"을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했고, 철학자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저 거시기 초상화가 걸려있듯이, 도상화 될 수 있는 객관적인 사 상체계, 그림화 될 수 있는 언어의 건물을 완성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인생을 이제 팔십 고개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철학은나의 언어의 걸개그림(=거시기)이 아니라 지금 살아 숨쉬는 나의 삶,
이 삶이 곧 나의 철학이다. 한마디로 거시기 철학은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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