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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의식의 흐름’이라는 현대소설 기법을 배우면서 으레 거론되기 마련인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이름은 내게 현대소설사를 이루는 역사 속의 인물일 뿐이었다. 게다가 너무나 낭만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그의 긴긴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지루한 ‘고전’이라는 나의 고정관념 속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케케묵어 있었다. 그런데 알랭 드 보통이라는 범상치 않은 스위스 작가가 내 기억 속에 죽어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손을 내밀고는 그의 두꺼운 책 무더기 위로 소복이 쌓인 먼지를 깨끗이 털어 안겨주었다. 그렇게 프루스트가 내 안에서 생동하기 시작했다. 프루스트는 보통의 재치 넘치는 글줄을 빌어 내 인생을 통째로 상담해 준다. 그것도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는 인생의 아홉 가지 고민들과 명쾌한 해결법을 들이밀면서 말이다.
첫째,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법. 오늘 당신은 행복한가? 당신이 오늘을 불행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 애착을 가져야 한다. 몹시 허약했던 프루스트는 언제나 내일 당장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오늘을 부여잡고 살았다. 그에게 ‘내일’이 기약되었다면, 그는 아마 자신의 대작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내일은 없다. 오늘이 있을 뿐.
둘째, 자신을 위한 독서법. 당신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실용주의자 의사인 그의 아버지가 쓴 《위생의 기본적인 요소들》 중 어떤 책을 선택할 것인가? 실용 정신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프루스트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해서 자책하지 말자. 그도 문학의 치유 효과를 확신하며 평생의 대작을 썼다. ‘유용성’을 독서의 제1목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문학 나부랭이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찾으면 될 일이다.
셋째, 여유 있게 사는 법. 프루스트가 자신의 대작을 통해 가장 확실하게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이다. 주인공이 잠들기 전에 어떻게 뒤척이는지를 보여주는 데 30쪽을 할애할뿐더러 한 문장이 두서너 쪽에 걸쳐 있는데도 그의 책을 꼭 읽어야겠다면, ‘인내’보다 ‘여유’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앞뒤 설명 없이 잘려진 신문의 무미건조한 단신보다 앞뒤 정황이 지나치게 풍부한 그의 자~앙문이 당신의 삶을 더욱 여유롭게 할 것이다.
넷째, 훌륭하게 고통을 견디는 법. 프루스트만큼 무수한 고통을 안고 살아간 사람도 드물 것이다. 심한 천식과 발작적인 기침, 극심한 변비와 위경련,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추위. 게다가 아들의 병구완이 취미인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 동성애, 자신의 작품에 대한 친구들의 몰이해, 죽음에 대한 공포 등등. 그는 고통이 진정한 지혜와 강한 정신력을 얻는 지름길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조심하라.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모두 그처럼 빛나는 족적을 남긴 것은 아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삶마저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다섯째, 감정을 표현하는 법. 프루스트는 진부하고 상투적이고 구태의연한 표현을 혐오했다. 그에게 현실은 언제나 낯설었다. 어느 한순간도 똑같은 현실은 없는 것이다. 틀에 박힌 표현을 남발하는 것은 다채로운 현실을 무시한 처사로, 언젠가 그가 사정없이 찡그리는 표정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섯째, 좋은 친구가 되는 법. 프루스트가 우정의 가치를 찬양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정의 대화들은 “우리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지 않게 하려는 거짓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열망이 너무나 강했다. 그가 우정을 다루는 방법으로 적극 추천한 것은 관계의 중심을 상대에게 두는 것이다. 내 말을 하기보다 상대의 말을 온전히 들어주고, 내 관심사를 피력하기보다는 상대의 관심사에 귀 기울여라. 그러면 사후에 당신을 위한 회고록을 기꺼이 써주는 친구들이 넘쳐날 것이다.
일곱째, 일상에 눈뜨는 법. 프루스트는 현재의 삶이 불만스러운 이유가 삶 자체의 치명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라 그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시선 때문이라고 말한다. 늘 똑같은 풍경이 지겨워지면 당신은 단 한 번도 그 풍경을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을 크게 뜨고 생생하게 바라보라. 지금도 그 풍경이 빛바랜 낡은 사진 같은지.
여덟째, 행복한 사랑을 하는 법. 프루스트는 창녀가 매혹적이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랑’이라는 욕망을 불타오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절’이다. 연인의 부탁을 일단 거절하라. 당신이 연인의 욕구를 완벽하게 채워주는 날, 사랑은 저만치 물러나 있을지도 모른다.
아홉째, 책을 치워버리는 법. 책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이 프루스트의 요지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그 배경이 되는 일리에 콩브레를 찾아가 감탄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잘라 말한다. 소설 속 콩브레는 꼭 일리에 콩브레가 아니어도 되는 허구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의 콩브레를 보더라도 자신의 콩브레를 발견해야 한다.
프루스트의 인생 상담 내용이 특별히 기발하지는 않다. 오히려 어떤 내용들은 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방법들은 묘한 설득력을 갖는다. 프루스트의 이야기들에서 해결법을 이끌어내는 보통의 재치와 기지 덕분이기도 하지만, 프루스트가 “삶을 낭비하지 않고 삶에 감사할 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남루한 일상이 맨 얼굴을 지루하게 들이밀 때, 삶의 의미가 퇴색될 때, 나 자신을 좀더 아끼고 싶을 때마다 프루스트와의 유쾌한 만남이 그리워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책장을 뒤적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는 알맹이가 말끔하지 못하다. 성의 없이 만든 책이라는 것이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낱낱이 드러난다. 프루스트를 좋아하냐고 묻기 전에, 최소한 그에게서 멀어지는 일은 없게 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