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춘은 시계태엽으로 걸어가는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 주변에 부딪히는 조그만 기계같은 것'

나는 길거리 깡패 알렉스. 욕설을 하고 음악을 사랑하고, 약을 탄 우유를 좋아하며, 폭력을 사랑하는 길거리 무법자. 돈 때문에 홀로 사는 노파를 죽이고 동료에게 배신당하고 감옥에 갇혔지.

감옥에 갇힌 알렉스는 일찍 출소할 수 있다는 꼬임에 빠져 루드비코 실험대상이 된다. 약물과 정신적인 쇼크를 이용한 인공적인 교화. 파블로프의 개처럼 사악한 것에 대해 몸으로 무력감과 구토를 느끼게 하는 교화를 받은 알렉스는 교도소에서 출감하게 되지만 부모에게도 버림받고, 경찰이 되어버린 배신자 동무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결국 자신이 전에 강간했던 여자의 남편에게 도움을 받는다.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괴상한 소설을 쓰고 있던 남자...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것과 타협해 가는 것이다. 그 타협이 어쩔 수 없는 것일 수도, 의외로 만족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알렉스는 그 타협에 만족한 것일까. 약을 탄 우유보다는 우유를 탄 차를 좋아하고, 일찍 결혼한 친구를 부러워하고, 아빠가 된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는 알렉스로 변했다. '멋진 신세계'에 만족한 것일까. 어쨌던 알렉스를 대상으로 한 실험은 그 목적을 달성했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약을 탄 우유를 마실 순 없으니까, 그러기엔 너무 늙었으니까.
알렉스도 나도 이미 어른이 되어 버렸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psychic ━  n. 심령력이 강한 사람;무당, 영매(靈媒)

미야베 미유키의 이름은 <이유>라는 잘 알려진 작품이 있다는 것을 얼핏 들었을 정도로 내겐 생소한 작가였다. 생소한 작가의 작품을-더군다나 추리소설을 읽는 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일수도 지겨운 책장 넘기기일수도 있다. 다행히 <용은 잠들다>는 전자였다. 사회파나 하드보일드보다는 본격추리소설을 더 선호하지만 이 <용은 잠들다>에는 사이킥이라는 초능력자의 등장으로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게 되었다. 초능력자라는게 미확인비행물체 같은 것이어서 실제로 그런게 있을까 하는 의문을 남기는 것이 대부분인데 미야베 미유키는 과감히 작품에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것도 사회파 추리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명이 말이다.
 
사람들의 생각을 '스캔'하는 능력을 가진 사이킥 신지와 사건 현장을 통해서 만난 고사카는 사이킥에 대해 알아가면서 알고 싶지 않은 것마저도 알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삶에, 고통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고사카에게는 괴편지가 계속 배달되고 그 동안의 등장인물들의 얽히고 얽힌 관계가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데...
중심을 이루는 사건은 사실 단순하다. 사회파 추리소설적인 면에서도 불성실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는데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는 그 사건에 관계된 인물이다. 물론 그 중심은 신지와 나오야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사이킥의 고통과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 이야기 하려는 바는 자신과는 다른 타인과의 하나됨이다. 사이킥인 나오야와 말을 하지 못하는 나나에의 '스캔'의 대화, 그리고 나나에와 대화하기 위한 고사카의 수화. 외눈박이 나라에서는 외눈박이가 왕이고 두 눈을 가진 사람이 특수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들이 보는 세상도 다를까? 사이킥이건 말을 못하건 그들은 같은 것을 느끼고 같은 것을 본다.
사람은 모두 용을 용을 키우고 있다. 용이 깨어나 재앙을 내렸건 잠들어 있건 그들은 모두 같은 사람들이다.

사실 나오야의 그 능력-읽다보면 알게 될-은 너무 과한 면이 있긴 했다. 사건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라도 설득력있게 전개되던 사이킥의 이야기가 현실성이 없어진 점은 좀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을 지나가는 길 - An Inspector Morse Mystery 2
콜린 덱스터 지음, 이정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추리소설답지-사실 추리소설다운 제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우습지만- 않게 우아한 제목을 가진 이 책은 그 제목만큼이나 매력적인 탐정이 등장한다. 모스는 술과 여자를 사랑한다. 특히 여자에게 자신을 생각하게 능력은 탁월하다 못해 기이할 정도이니 책 전반에 드러나는 유머와 더불어 모스를 특징짓는 부분이 된다.
이 <숲을 지나가는 길>에서의 사건과 그 해결은 새로운 점은 없다. 오히려 부수적인 요소가 더 흥미를 제공해 주는데 신문에 투고된 시(詩)의 투고자의 정체에 있어서는 모스 시리즈를 구분짓게 만드는 요소이다. 그 투고자 뿐 아니라 신문이라는 매체가 활용된 점은 각 꼭지의 인용문-때로 작가 자신이 창조해낸 인용문도 있다-들도 굉장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탐정, 로맨스 등이 추리물에서 색다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모스와 결합되었을 때 그 매력은 두 배가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모스에 대한 부러움과 느슨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시리즈물도 머지 않아 읽게 될 듯한 느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인 에어 네버랜드 클래식 26
샬럿 브론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을 다룬 소설로 《제인 에어》를 처음 만난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소위 동화의 세계에서 소설의 세계로 어설프게 넘어가려던 그때 그 시절,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또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놓으려는 나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마른침을 삼켜가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잠재우고, 어떤 감정을 다 큰 연인의 ‘사랑’이라 이름하는지 배웠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제인 에어》를 ‘고품격 연애소설’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 《제인 에어》에 대한 평가는 영문학자들 사이에서도 극과 극으로 나뉜다. 그러나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오래도록 ‘고전’으로 손꼽히는 단골손님이다. 《제인 에어》를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견주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일부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문학성조차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결코 맞바꾸지 않겠다”고 거만하게 말한 영국인의 자만심이 빚어낸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적어도 내게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감수성 짙은 시절에 낭만과 꿈, 그리움을 심어주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어느 정도였는지 조금만 말해 보면, 그 시절 나는 단번에 글자만 빼곡히 들어찬 《제인 에어》를 다섯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사랑’이라는 설레는 감정이 전면에 드러난 책은 처음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제인 에어가 로우드 학교 시절 그렸다던 세 점의 그림을 나도 샬럿 브론테의 묘사에 의지해서 그려보았다. (물론 내 그림은 로체스터의 인색한 칭찬조차 듣지 못했을 정도로 볼품없었다.)

제인 에어는 내가 감정 이입을 하기에 알맞은 인물이었다. 우선 예쁘지 않고 깡마른 체형인 데다가 책을 좋아했으며, 무엇보다 천사같이 착한 여자가 아니라 고집스러운 여자였다. 제인은 시비를 가리는 자신의 잣대를 세워두고 고집스럽게 세상을 재단했다. 결코 화려한 주인공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어느 그늘진 구석에 외로이 서 있어도 제인은 자신이 재단한 세상 안에서는 ‘올바른’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사랑 받으면 사랑하고, 사랑 받지 못하면 굳이 사랑하려 하지 않았다. 미움 받으면 같이 미워해 주었다.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수많은 ‘나’ 중에 한 명이었을 뿐이다.

그런 그녀가 그다지 멋지지 않은(그러나 너무나 멋진) 에드워드 로체스터와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사이가 되었다. 조금씩 조심스럽게 농익어 가는 사랑이 그토록 어여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에만 가슴 벌렁이는 설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자꾸만 눈길이 서로를 좇고 서로의 말에 귀와 가슴을 활짝 열어놓고 서로의 마음길을 더듬어보고……, 무뚝뚝하지만 살뜰한 로체스터 앞에서 제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끝까지 억누를 수 없었고, 왜소하지만 솔직하고 강인한 제인 앞에서 로체스터는 떨리는 가슴을 끝까지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들의 사랑 앞에 엄청난 나이 차이, 로체스터의 미치광이 아내, 가정교사와 영주라는 진부한 신분 설정은 잠시 덮어두자. 여기에는 그저 한 명의 여자 인간과 또 한 명의 남자 인간이 있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저 그들이 사랑할 뿐이니까. 그들의 사랑으로 부당하게 희생된 이도 없으니까. 먼 곳에서도 서로의 이름을 애틋하게 부르고 애타게 대답한 사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감을 나눈 두 사람이니까. 나는 《제인 에어》가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비님 이야기
권교정 지음 / 절대교감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어느 책자에서 권교정의 《왕비님 이야기》는 독자의 저력이 쾌거를 이루어낸 이례적인 출판물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15장 정도의 단편 하나를 책으로 묶는 발칙한 시도가 독자들의 주도하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박 출판을 노리는 우리나라 출판 시장에서, 더구나 만화가 아이들의 유치한 전유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풍토에서, 양질의 만화가 음지로 묻히지 않고 제 빛을 발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나는 감히 꿈꿔보지도 못한 일을 용감한 만화 독자들이 해낸 것이다. 그 결과물이 ‘절대교감’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단장하고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여러 인터넷 서점들의 판매지수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이 책은 독자의 승리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먼저 진정한 독자의 자리를 지키고 싶은 나의 우렁찬 박수를 진심으로 보내고 싶었다.

이런 글을 읽기 전에 수동적인 만화 독자인 나의 눈에 권교정의 《왕비님 이야기》가 확 들어온 이유는 내가 “옛날옛날에 임금님과 왕비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흐뭇한 결말에 환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펼쳐서는 안 된다. 권교정이 꽃을 피우고 보석을 생겨나게 하는 아름다운 왕비님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그녀가 말을 하면 소박한 꽃과 보석이 생겨나 주위를 따뜻하고 풍요로운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아무도 그녀의 아름다운 기적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 꽃과 보석의 흔적을 쫓다가 그녀를 첫눈에 사랑하게 된 왕의 눈에는 그녀의 가치가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녀를 독점한 왕조차도 그녀를 사랑한 것인지, 그녀의 꽃과 보석을 사랑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깊은 상처를 받고 말문을 닫아버린 그녀. 그녀 옆에서 괴로워하는 왕. 점차 탐욕스러워지는 백성들. 이렇게 왕비님의 서늘한 이야기가 권교정의 처연한 그림들을 따라 권교정의 독특한 유머가 빚어내는 따스한 느낌도 없이 흘러간다.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사랑 고백을 해온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걸까, 나의 가치를 사랑하는 걸까? 나와 내 일부인 나의 가치는 구분될 수 있을까? 분명한 진실은 내가 존재해야 나의 가치도 비로소 제 빛을 선연히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모든 관계의 중심에 바로 서야 한다. 아름다운 왕비님의 진정한 가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스러져가는 꽃과 보석이 아니다. 꽃과 보석이 모두 사라져도 왕비님은 여전히 아름답다. 가치는 언제나 찬란하게 빛나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이 그 찬란한 빛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눈부신 가치 한가운데 오롯이 떠오르는 사람을 알아보는 순간, 나도 당신도 찬란한 빛에 휩싸이는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