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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ㅣ 네버랜드 클래식 26
샬럿 브론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을 다룬 소설로 《제인 에어》를 처음 만난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소위 동화의 세계에서 소설의 세계로 어설프게 넘어가려던 그때 그 시절,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또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놓으려는 나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마른침을 삼켜가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잠재우고, 어떤 감정을 다 큰 연인의 ‘사랑’이라 이름하는지 배웠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제인 에어》를 ‘고품격 연애소설’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 《제인 에어》에 대한 평가는 영문학자들 사이에서도 극과 극으로 나뉜다. 그러나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오래도록 ‘고전’으로 손꼽히는 단골손님이다. 《제인 에어》를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견주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일부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문학성조차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결코 맞바꾸지 않겠다”고 거만하게 말한 영국인의 자만심이 빚어낸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적어도 내게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감수성 짙은 시절에 낭만과 꿈, 그리움을 심어주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어느 정도였는지 조금만 말해 보면, 그 시절 나는 단번에 글자만 빼곡히 들어찬 《제인 에어》를 다섯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사랑’이라는 설레는 감정이 전면에 드러난 책은 처음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제인 에어가 로우드 학교 시절 그렸다던 세 점의 그림을 나도 샬럿 브론테의 묘사에 의지해서 그려보았다. (물론 내 그림은 로체스터의 인색한 칭찬조차 듣지 못했을 정도로 볼품없었다.)
제인 에어는 내가 감정 이입을 하기에 알맞은 인물이었다. 우선 예쁘지 않고 깡마른 체형인 데다가 책을 좋아했으며, 무엇보다 천사같이 착한 여자가 아니라 고집스러운 여자였다. 제인은 시비를 가리는 자신의 잣대를 세워두고 고집스럽게 세상을 재단했다. 결코 화려한 주인공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어느 그늘진 구석에 외로이 서 있어도 제인은 자신이 재단한 세상 안에서는 ‘올바른’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사랑 받으면 사랑하고, 사랑 받지 못하면 굳이 사랑하려 하지 않았다. 미움 받으면 같이 미워해 주었다.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수많은 ‘나’ 중에 한 명이었을 뿐이다.
그런 그녀가 그다지 멋지지 않은(그러나 너무나 멋진) 에드워드 로체스터와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사이가 되었다. 조금씩 조심스럽게 농익어 가는 사랑이 그토록 어여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에만 가슴 벌렁이는 설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자꾸만 눈길이 서로를 좇고 서로의 말에 귀와 가슴을 활짝 열어놓고 서로의 마음길을 더듬어보고……, 무뚝뚝하지만 살뜰한 로체스터 앞에서 제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끝까지 억누를 수 없었고, 왜소하지만 솔직하고 강인한 제인 앞에서 로체스터는 떨리는 가슴을 끝까지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들의 사랑 앞에 엄청난 나이 차이, 로체스터의 미치광이 아내, 가정교사와 영주라는 진부한 신분 설정은 잠시 덮어두자. 여기에는 그저 한 명의 여자 인간과 또 한 명의 남자 인간이 있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저 그들이 사랑할 뿐이니까. 그들의 사랑으로 부당하게 희생된 이도 없으니까. 먼 곳에서도 서로의 이름을 애틋하게 부르고 애타게 대답한 사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감을 나눈 두 사람이니까. 나는 《제인 에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