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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님 이야기
권교정 지음 / 절대교감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어느 책자에서 권교정의 《왕비님 이야기》는 독자의 저력이 쾌거를 이루어낸 이례적인 출판물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15장 정도의 단편 하나를 책으로 묶는 발칙한 시도가 독자들의 주도하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박 출판을 노리는 우리나라 출판 시장에서, 더구나 만화가 아이들의 유치한 전유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풍토에서, 양질의 만화가 음지로 묻히지 않고 제 빛을 발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나는 감히 꿈꿔보지도 못한 일을 용감한 만화 독자들이 해낸 것이다. 그 결과물이 ‘절대교감’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단장하고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여러 인터넷 서점들의 판매지수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이 책은 독자의 승리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먼저 진정한 독자의 자리를 지키고 싶은 나의 우렁찬 박수를 진심으로 보내고 싶었다.
이런 글을 읽기 전에 수동적인 만화 독자인 나의 눈에 권교정의 《왕비님 이야기》가 확 들어온 이유는 내가 “옛날옛날에 임금님과 왕비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흐뭇한 결말에 환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펼쳐서는 안 된다. 권교정이 꽃을 피우고 보석을 생겨나게 하는 아름다운 왕비님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그녀가 말을 하면 소박한 꽃과 보석이 생겨나 주위를 따뜻하고 풍요로운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아무도 그녀의 아름다운 기적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 꽃과 보석의 흔적을 쫓다가 그녀를 첫눈에 사랑하게 된 왕의 눈에는 그녀의 가치가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녀를 독점한 왕조차도 그녀를 사랑한 것인지, 그녀의 꽃과 보석을 사랑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깊은 상처를 받고 말문을 닫아버린 그녀. 그녀 옆에서 괴로워하는 왕. 점차 탐욕스러워지는 백성들. 이렇게 왕비님의 서늘한 이야기가 권교정의 처연한 그림들을 따라 권교정의 독특한 유머가 빚어내는 따스한 느낌도 없이 흘러간다.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사랑 고백을 해온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걸까, 나의 가치를 사랑하는 걸까? 나와 내 일부인 나의 가치는 구분될 수 있을까? 분명한 진실은 내가 존재해야 나의 가치도 비로소 제 빛을 선연히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모든 관계의 중심에 바로 서야 한다. 아름다운 왕비님의 진정한 가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스러져가는 꽃과 보석이 아니다. 꽃과 보석이 모두 사라져도 왕비님은 여전히 아름답다. 가치는 언제나 찬란하게 빛나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이 그 찬란한 빛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눈부신 가치 한가운데 오롯이 떠오르는 사람을 알아보는 순간, 나도 당신도 찬란한 빛에 휩싸이는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