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앵무새 루이지토
수산나 타마로 지음, 이현경 옮김 / 레드박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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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순수한 꿈, 열정, 호기심, 관심사를 전부 빼앗긴 채, 36.5도의 따뜻한 피가 아니라 0도의 차디찬 피가 온몸을 돌아 구석구석 살얼음이 낀 것처럼 서걱거리며 살다가 70대 노인이 되어버린다면 어떤 마음을 지고 있을까. 수산나 타마로의 『마법의 앵무새, 루이지토 』를 덮고 나서 그 생각에 기분이 찬물을 끼얹은 듯 착 가라앉았다. 일흔 할머니 안셀마와 이제 서른을 살아가는 나의 시간적 간극이 제법 깊고 넓어 처음에는 그 마음을 가늠하는 일이 참으로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사람은 ‘공감’ 혹은 ‘교감’이라는 아름답고도 경이로운 능력으로 ‘나’에서 ‘너’로, ‘오늘’에서 ‘내일’ 혹은 ‘어제’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단숨에 육체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할 수 있지 않은가. 안셀마 할어니의 깊은 슬픔, 외로움, 쓸쓸함, 허전함,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자신을 잃고 허깨비처럼 헛살아왔다는 절망, 그 절망이 참담함으로 다가왔다. 1분, 아니 1초, 아니 찰나의 시간이라도 ‘나’가 없이는 ‘내 삶’이라 할 수 없다. 누구를 위해 그처럼 지독한 시간을 인내해 왔는지, 안셀마 할머니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작가 수산나 타마로는 “서서히 몸이 얼어가는 시간”을 “냉동실에 오래 방치한 고깃덩어리”처럼 얼음으로 뒤덮인 육신으로 살아온 안셀마 할머니를 위로해 주려고 무지갯빛 앵무새 한 마리를 선물한다. 작가는 참으로 짓궂기도 하지. 외유내강형의 생기 넘치고 열정 가득하며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자긍심 강한 젊은 여교사에게서 ‘선생님’의 자리를 빼앗고, 달콤한 거짓말로 기만하는 남자 잔카를로와 결혼시켜 질투와 자격지심으로 평생 그녀의 삶을 옥죄인 채 괴롭힘당하게 하고, 자식들도 하나같이 아버지의 기질을 쏙 빼닮아 어머니를 얼른 치워버려야 할 귀찮은 쓰레기 더미로 여기게 설정하고, 무엇보다 그녀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들을 함께했던 세상의 단 하나뿐인 친구 루이지타까지 앗아 간 것이다. 그러고는 미안하다는 듯 슬그머니,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안셀마 앞에 버림받은 앵무새를 놓아준다.

안셀마 할머니가 영혼의 동반자였던 친구 루이지타의 이름을 따서 ‘루이지토’라고 이름을 붙여준 앵무새는 절망이 너무나 깊어 지독히 우울한 무기력증으로 옴짝 못하던 그녀에게 생의 의욕을 돌려준다. 이제 돌이킬 수 없이 다 끝난 것만 같았던 자신의 나이에 “인생은 70부터!”라는 호기로운 캐치프레이즈를 화환처럼 걸어주고 ‘행동한다’. 앵무새는 파문 하나 일지 않는 웅덩이처럼 침잠해 있던 안셀마 할머니의 마음에 감정을 일깨우고, 그 감정에 따라 살아 움직이도록 따뜻한 숨으로 온 몸에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핏속의 얼음을 녹여준다. 그 따뜻한 숨은 바로 사랑이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이었겠지만 그 인간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동물 앵무새와, 역시 사랑인 줄만 알았던 인간들에게 배신당한 사람 안셀마 할머니가 서로를 위해 나누는 따뜻한 마음들과 더 따뜻한 마음들, 더더 따뜻한 마음들 전부 말이다.

수산나 타마로의 『마법의 앵무새, 루이지토』는 “어른을 위한 동화”(※표지)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작가가 ‘이건 정말 아니잖아’라고 생각하는 것을 명확히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다. 그러니 소설적 재미와 즐거움을 원하는 사람보다 따뜻한 교훈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 책의 가치를 더 알아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쉬운 마음도 많이 들었다. 안셀마 할머니에게 그토록 소중한 존재였던 친구 루이지타와의 이야기도, 안셀마 할머니와 영리한 앵무새(너무 영리해!) 사이에 신뢰와 유대감, 사랑이 쌓이는 과정의 이야기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마지막 결말은 꽤 작위적인 훈훈함을 연출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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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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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똥주 좀 죽여달라고 하느님을 조르느라, 아니 자기 말을 들어주면 뚱주한테 받는 헌금만큼 내겠노라며 구슬리느라, 급기야는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절에 가겠노라며 아예 협박하느라, 교회에 다니는 완득이가 강렬한 첫인상과 함께 툭 튀어나온다. 김려령의 『완득이』는 너무나 살벌하지만 그만큼 웃기고 맹랑한 소원을 사뭇 진지하게 비는 완득이의 모습을 들이밀며 경쾌하게 시작한다. 물론 시작뿐만이 아니다. 이 작가, ‘김려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깔깔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장면으로 배꼽이 무사한지부터 살피게 만든다. 오히려 내가 이 장면에서 마냥 이렇게 웃어도 되나? 의구심이 들 정도다.

내가 쉼 없이 깔깔거리는 사이 작가는 난쟁이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외모는 번듯하지만 약간 모자란 말더듬이 민구 삼촌까지, 세상의 잣대에 의하면 지지리 궁상, 불우한 환경을 완득이의 배경에 툭툭 떨구어놓는다. 그러나 옆집 옥상에 살면서 동네방네 고성방가로 ‘완득이네 통신원’을 자처하는 요상한 욕쟁이 담임 똥주와, 완득이를 부르는 똥주의 고함 소리에 화음을 넣듯 다시 한 번 완득이의 이름을 들먹이며 욕설을 퍼붓는 앞집 아저씨의 존재는 웃음을 뻥뻥 터지게 한다. 차마 웃지 못할, 웃어서는 안 될 장면에 어울리지 않게 경쾌한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들을 지뢰밭처럼 깔아놓은 작가의 능청스러움은 자칫 울적하고 잿빛으로 가라앉기 쉬운 주제들을 밝고 긍정적으로 스케치하면서 웃음이 뻥뻥 터지는 박장대소 속에 감동이 묵직하게 들어설 자리까지 잡아놓는다.

김려령의 『완득이』는 지금껏 내가 만났던 한국 소설들 중 가장 유쾌하게 웃으며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고, 완득이는 지금껏 내가 만났던 한국 현대소설에 등장했던 인물들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다. 70, 80년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무거운 주제, 질척거리는 신파조 불륜, 감상적인 자전소설, 서사는 없고 공들여 조탁한 겉멋 가득한 문장들만 난무하는 소설, 서사도 없고 문장력도 없고 시의적절하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만 있는 소설 등등 한때의 유행처럼 끓어올랐다가 사라지는 우리나라 현대소설들 가운데 『완득이』의 등장은 너무도 반갑다. ‘난쟁이 아빠와 베트남인 엄마를 둔 고등학생의 성장기’라고 하면 그저 그렇고 그런, 또 다른 구태의연한 소설 한 편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오해라는 것은 『완득이』를 읽어봐야 알 수 있다. 무거운 주제를 더더욱 무겁게 형상화하는 것은 얼마나 숨 막히는 일인가.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가벼운 웃음으로 풀어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완득이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더욱 빛난다. 물론 욕설이 난무하는 조폭 같은 선생 똥주의 모습이 많이 과장되어 있고 그의 배경에 외국인 노동자를 착취하는 부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실소를 머금게 하긴 했지만, 그것도 사랑스러운 완득이의 후광에 가려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강산이 한 번 바뀔 만큼 나이 먹은 내가 ‘너,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고 멋지잖아!’라고 말하면 완득이는 분명 코웃음 치며 들은 체도 하지 않겠지만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네게 전염되어 나도 웃고 있는데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 당신도 완득이를 만나볼래? 금방이라도 소설 속에서 툭 튀어나와 개천에 얼음이 얼었다고 데굴데굴 구를 것만 같은.

 “개천에 얼음이 얼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 웃음이 났다. 아니 무슨 물도 별로 없는 개천이 얼고 그래. 아이참, 저거 얼어도 썰매 못 타잖아. 아이고 배야, 개천이 자꾸 나를 웃겼다. 계집애가 겁도 없지 무슨 종군기자야. 하하하. 아우, 왜 오늘따라 종군기자라는 말이 다 웃겨. 오다가 꽃 냄새 나는 껌을 씹었나? 이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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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시바사키 토모카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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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토가 묻는다. “매일 잠들 때마다 생각했어.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언제일까? 아침까지 깨어 있으면 알 수 있을까? 그런데 테츠가 이러잖아. ‘그것도 몰라? 밤 12시부터 내일이지. ’ 나로선 꽤 충격이었어. 내일이란 게 시간으로 정해진다는 사실이.” 정말 테츠의 말처럼 자정을 기점으로 그렇게 간단히 오늘과 내일을 구분할 수 있을까? 오늘과 내일을 구분할 수 있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케이토를 따라 나도 곰곰 생각에 잠긴다. ‘자정 24시’를 기준으로 오늘과 내일을 무 자르듯 경계 짓는다면 모든 사람은 오늘과 내일에 걸쳐 깨어 있거나 잠자게 된다. 내가 깨어 있는 동안이나 잠자는 동안 오늘과 내일이 이성적으로, 산술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몸도 그토록 급작스럽게 기계적으로 오늘과 내일을 달리하여 생체리듬을 조절할까? 그렇다면 ‘잠 ’으로는? 너무 피곤하여 늦은 9시쯤 잠들면 그 이후의 잠자는 시간은 내일에 속할까? 왠지 눈이 말똥말똥 감기지 않아 자정을 넘겨 새벽 4시쯤 잠든다면 날짜가 바뀐 후의 네 시간까지 오늘이고 그 이후의 잠자는 시간부터 내일일까? 이것도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내가 대답한다. “오늘만 있을 뿐이야!” 편의상 오늘과 내일을 구분할 수 있다 치고, 오늘 자고 내일 일어난다고 해도 “어, 드디어 내일이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 하루를 다시 시작해야겠군.”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오늘 자도 내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일어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시각각 내일이 다가오는 순간순간이 모두 ‘오늘’이 되어버리니까. 어제를 추억하든 내일을 기대하든 나는 언제나 오늘을 산다. ‘오늘 하루’가 차곡차곡 쌓여 일상이 되고 역사가 되고 내일을 오늘로 끌어안는 용기와 희망이 된다. 그래서 오늘과 다르지 않은 내일을 오늘로 살아가는 것은 눈부신 일이다.

시바사키 토모카의 『오늘의 사건사고』는 3월 24일 오후 1시부터 3월 25일 새벽 4시까지 교토로 이사 간 마사미치네 집들이에 모인 친구들의 ‘사건’이랄 것도, ‘사고’랄 것도 없는 자잘한 이야기다. 그런데 소설 제목은 왜 “오늘의 사건사고(きょうのできごと)”일까?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아무도 어쩌지 못하는 유장한 시간의 흐름을 인간의 인식 한계 내에서 관리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정해 놓은 날짜와 시계의 시침, 분침에 따라 기계적으로 구분하면, 3월 24일 오늘과 3월 25일 내일 혹은 3월 24일 어제와 3월 25일 오늘의 이야기인데? 마사미치네 집에 모여 술을 해롱해롱 마셔대긴 했지만 케이토가 꽃미남 가와치와 친해지려고 노골적으로 들이대고, 마키가 남자 친구 나카자와의 동기인 니시야마의 머리를 엉망으로 잘라놓고, 니시야마가 문에 발라놓은 맹장지에 삼각형을 규칙적으로 여러 개 도려내고, 마실 거리를 더 사러 나간 마사미치가 자전거를 탄 채 넘어진 일이 있었을 뿐인데? 그러나 시바사키 토모카의 모순적인 제목은 이 소설에서 가장 돋보이는 매력으로 압축되어 있다.

마사미치네 집들이에 모인 친구들에게는 3월 24일과 3월 25일이 모두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이다. 어제의 머릿속 추억도, 내일의 머릿속 계획도 아닌 지금 이 순간 공간과 시간을 나누며 몸으로 함께 부대끼는 ‘오늘’인 것이다. 큰 일 대신 작은 일, 별일 대신 흔한 일, 특별한 일 대신 평범한 일로 소박한 하루를 아름답게 빛내는 일상들이 모두 ‘오늘’인 것이다. 그것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늘’을 따분해하지만 않고 열심히 이어가는 이유다. 문득 아시나노 히토시의 만화 『카페 알파』가 떠올랐다. 어느 미래 육지가 점점 바다에 잠겨가는 세상의 종말을 코앞에 두고서도 평범하게 흘러가는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무수한 오늘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시바사키 토모카는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나를 감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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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티 잡
크리스토퍼 무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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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시각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지리적인 위치 때문일 수도 있고 종교적 가치관 때문일 수도 있으며 관념적인 차이일 수도 있다. 죽음을 관장하는 신에 관련해서도 이런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서양의 경우 죽음의 신은 그림 리퍼(The Grim Reaper)라 하여 해골처럼 앙상하게 마른 데다가 헐렁한 옷으로 몸을 감싼 채 거대한 낫(추수를 의미하는 낫을 들고 있는 것은 생명을 거두어들인다는 의미와 관련이 있다)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 리퍼가 죽은 자를 데려가는 일을 하는데 직접적인 ‘죽음의 신’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대리 인격인 저승사자와는 차이를 보인다. 크리스토퍼 무어는 영혼의 물품을 수거해 윤회를 돕는 ‘죽음의 상인’을 등장시켜 동양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접목시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제 감이 오시는지? 검은 표지의 앙증맞은 그림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보행기에 타고 있는 빨간 리본을 맨 꼬맹이 그림 리퍼(이 책에서는 죽음의 제왕인 루미나투스)는 찰리의 딸인 소피이며, 보행기를 끄는 손의 주인공이야말로 자신이 루미나투스라고 착각한 우리의 보잘것없는 베타 남성인 찰리다. 이렇게 크리스토퍼 무어는 루미나투스와 죽음의 상인들, 개성 넘치는 주변 인물들(심지어 케르베로스의 개를 연상시키는 개 두 마리까지)을 등장시켜 기발한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육체적, 지적 능력 등 여러 면에서 뛰어난 알파 남성(수컷 우두머리)에 비해 훨씬 평범하거나 그보다 떨어지는, 하지만 성실하고 가정적인 베타 남성인 찰리의 부인 레이첼은 딸 소피를 낳고 죽는데(루미나투스를 낳았으니 그럴 수밖에), 찰리는 아내의 영혼이 깃든 물품을 수거하러 온 죽음의 상인을 보게 된다. 이후 자신에게 우편으로 도착한 ‘죽음의 백서’라는 책을 금발머리 종업원 릴리 때문에 제때 넘겨받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주위에 항상 죽음이 함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찰리는 우여곡절 끝에 죽음의 상인의 일원이 된다. 소중한 딸인 소피는 자라면서 말 한마디로 생명을 없앨 수 있는 무서운 능력을 갖게 되고 소피를 지키기 위한 거대한 지옥의 개 두 마리까지 등장한다. 죽음의 상인들이 영혼의 물품을 제때 수거하지 못하고 지하의 괴물들이 이를 차지해 힘을 키워 출몰하게 되자 자신을 죽음의 제왕인 루미나투스라고 착각한 죽음의 상인 찰리는 이에 맞서게 된다.

크리스토퍼 무어의 『더티 잡 』은 유머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책 전체에 죽음이 가득해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이런 시끌벅적한 유머 속에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죽음의 상인이 하는 일이 바로 ‘더티 잡’일 것이다. 항상 죽음 곁에 있어야 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영혼의 물품을 수거해야 하니까. 만일 내 영혼이 깃든다면 어떤 물건이 좋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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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 글 못 쓰는 겁쟁이들을 위한 즐거운 창작 교실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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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연필로 고래 잡는 글쓰기』는 제목처럼 ‘글쓰기’에 관한 책이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소설 쓰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아주 독특하고 재미있는 개성적인 소설을 쓰는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면 누구나 다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면 어디 한 번 그의 소설 쓰기 수업을 들어볼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나는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을 쓰는 데는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비법이 아니라 타고나는 문재文才와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글쓰기’책이 난무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소설을 좋아하는, 한때 소설을 써볼까 끄적인 적이 있는(물론 재능과 상상력 부족으로 일찌감치 내 깜냥을 파악했지만) 나를 “친구”라고 부르며 ‘그까짓 소설, 아무나 쓸 수 있어’라고 말한다. 다만 “바보”가 되어 이야기를 기다려줄 자세를 갖추었다면, 소설과 느긋하게 놀아줄 준비가 되었다면, 악착같이 뭔가를 쓰려고 서두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연필로 고래 잡는 글쓰기』는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우연한 기회에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창작 교실을 열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성인을 대상으로 실제 소설 쓰기 수업을 하듯이 재구성한 책이다. 어른 작가 지망생을 바로 눈앞에 두고 말하는 것처럼 대화한다.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하고 싶은 말은 물론 자신이 하고, 자기 말에 적극적으로 따르거나 어처구니없는 소리라는 듯 따지고 드는 독자의 깨달음과 의문까지 자신이 전부 다 한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듯 글선생과 학생이 주고받는 품새가 재미있다. 그렇게 너스레를 치며 그가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세상에서 오로지 당신만 쓸 수 있는 당신만의 소설’을 쓰라는 것이다. 누구나 남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들으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그만의 소설 작법을 엿보면서(정말 엿보기만 했다. 글을 잘 써보려고, 소설을 쓰겠다는 못다 이룬 꿈을 이루어보려고 이 책을 읽은 것이 아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했던 “소설과 놀아준다”를 ‘소설 읽기’에 적용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에게 낯설고 생경해서, 마냥 지루하고 재미없어서 쉽게 ‘별로!’라고 단정했던 소설들과 좀더 느긋하게 놀아줘야겠다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이런 소설을 쓰라면서 “가장 즐거운 놀이는 아무도 생각해 낸 적이 없는 지평으로 나가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가장 즐거운 놀이는 책을 읽으면서 아무도 생각해 낸 적이 없는 의미의 지평으로 나가는 일이다”로 받아들인다. 진짜 소설가의 소설 쓰는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으로 소설을 제대로 읽는 법까지 알려준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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