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사 오디세이
쓰지 유미 지음, 이희재 옮김 / 끌레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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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외국 문학을 더 많이 읽는 편독 습관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늘 ‘번역’의 문제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실 원어를 해독할 능력이 없는 이상 ‘오역’을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닌지라, 내가 분노하거나 짜증을 주체하지 못할 때는 도통 우리말의 기본 문법도 지키지 않은 비문들이 가득해 문장 하나하나뿐만 아니라 앞뒤 맥락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다. 그럴 때는 번역자가 자신의 번역을 한 번이라도 다시 읽어봤는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래도 꾹 참고 대강의 뜻만 짐작하며 겨우겨우 읽었는데 그 책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면 정말 오호통재라. 이렇게나마 읽게 해준 번역자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당신 아니면 다른 번역자가 이보다는 더 낫게 번역했을 거라고 원망해야 할지 헷갈린다. 감히 원어 고유의 미묘한 뉘앙스를 완벽하게 전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책의 이야기를 여유롭게 음미하며 즐길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식욕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본의 다치바나 다카시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독서법을 제시하면서 “번역서는 오역이나 나쁜 번역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 번역서를 읽다가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머리가 나쁘다고 자책하지 말고 우선 오역이 아닌지 의심해 보라”고 말했다. 즉 난해한 번역서는 오역 혹은 나쁜 번역임을 의심하라는 것이다. 이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어주었는지. 그 이후로 나는 문장이 잘 통하지 않고 앞뒤 문맥이 어울리지 않으면 무턱대고 ‘나쁜 번역’을 의심했다. 감히 ‘오역’을 의심하기에는 역시 원어에 자신 없거나 조금도 알지 못하니 그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번역에 대한 내 기대와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원서의 정확한 의미가 통하는 올바른 우리말 문장은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고, 책의 내용에 따라, 작가의 시대에 따라 문체가 다소 달라지긴 하겠지만(거의 느껴본 적 없지만), 의미 해독에는 별 어려움 없어도 우리말 문장이 너무나 촌스러우면 그것도 읽어내기가 여간 고역이 아닌 것이다. 16세기 프랑스 시인 조아샹 뒤 벨레가 주장한 것처럼, “언어에는 그 나름의 고유성이 있기 때문에 번역을 해놓으면(좋은 번역, 나쁜 번역을 막론하고 일단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겨놓으면-※나의 사족) 원문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은 사라져버린다.” 이것은 독자인 내가 모든 언어에 통달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원문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사라져도 번역가가 없으면 나는 그 이야기도, 그 작가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번역가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게, 또한 크게 생각한다. 나는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의 눈으로 들어와 머리로 재해석하기 시작하면 작가의 작품은 이제 별개로 독자의 작품으로 공존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번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번역가가 번역한 원저자의 작품은 온전히 번역가의 작품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벨 앵피델Belles Infidèles”의 문제가 불거진다. 벨 앵피델은 “글자 그대로 말하면 ‘부실한 미녀’인데 ‘아름답지만 원문에 충실하지 않은 번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가 촌스럽지 않은 번역문, 세련된 번역문, 좀더 잘 읽히는 번역문을 원한다고 해서 번역가가 임의로 원서에 없는 수식어나 내용을 덧붙이고, 또한 원서에는 버젓이 있는 난해한 문장을 빼버리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단은 불가피하게 번역을 통한다고 해도, 그 한계 속에서 원래 작품의 묘미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독자에게서 완벽하게 박탈하는 것이다. 원문에도 충실하고 번역문도 아름다운 균형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울지 잘 안다. 그러나 당신이 번역가인 이상 가장 이상적인 번역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당신의 번역문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읽는 나도 역시 더 나은 번역을 자꾸만 기대해도 되지 않겠는가. (여기서는 번역가가 자신의 번역을 작품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프랑스어 번역가인 쓰지 유미의 『번역사 오디세이』는 프랑스 번역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곧 보편적인 번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신에게 좀더 가까이 있고자 쌓아올린 바벨탑이 무너져 하나의 언어였던 것이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언어들로 흩어진 이래로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정확하게 잘 옮기는 일은 특정 지역, 특정 시대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번역에 대해 거듭 고민하는 문제들은 먼 과거에도, 먼 미래에도, 지구 곳곳에서 계속 제기될 것이다. 신이 서로 알아들을 수 없도록 흩어놓은 무수히 많은 언어들을 하나의 언어로 다시 모으지 않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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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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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브론테가 『제인 에어』에서 매혹적으로 그려낸 영국 신사, 로체스터에게 반했는가? 그렇다면 그의 미치광이 아내, 버사 메이슨을 기억하는가?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손필드 저택에 음울한 저주를 드리우는 악의 화신을……. 진 리스는 퉁명함 속에 다정다감한 본성을 감추고 있는 로체스터와 지적이고도 순수한 제인 에어의 아름다운 사랑을 훼방 놓는 방해꾼으로만 등장하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완벽한 조연, 버사 메이슨이 실존할 수 있는 삶을 선사해 주었다.

진 리스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Wide Sargasso Sea』에서 로체스터의 편견이 짙게배어 있는 ‘버사’라는 이름 대신 ‘앙투아네트’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아 주었다. 이 소설은 서인도제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로체스터와 결혼하고 영국 손필드 저택의 화재로 죽기까지 앙투아네트의 일생을 이야기한다. 적어도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서만큼은 진정한 주인공인 앙투아네트와 ‘나’로만 등장하는 로체스터의 교차 시점으로 앙투아네트의 가슴 시린 생애가 흘러가는데, 그녀가 지독한 인종적 편견과 오해로 서서히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이 너무도 서늘하게 다가온다. 앙투아네트의 이야기 속에는 『제인 에어』에 그녀의 가족력으로 등장하는 또 한 명의 광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옹호도 들어 있다. 앙투아네트의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그려지는 그녀의 어머니 아네트와, 로체스터의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지는 앙투아네트가 외부의 지독한 선입관에 의해 대물림으로 정신의 균형을 잃어가는 과정이 슬프게 겹쳐진다.

서인도제도 태생의 프랑스계 크리올로 노예를 부렸던 가문의 딸, 앙투아네트가 그늘 없이 행복한 시절을 보내긴 어려웠다. 앙투아네트 가족의 쇠락사는 노예해방령의 선포를 기점으로 한다. 너무나 윤리적인 노예해방령은 흑인 노예들에 의지하여 농장을 경영하고 부를 쌓은 앙투아네트의 가문을 한순간에 몰락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인도제도의 크리올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선입관을 가진, 같은 인종인 유럽 백인들로부터도 고립되면서 앙투아네트의 가족은 ‘검둥이’보다 못한 ‘흰 검둥이’로 깊게 상처 입는다.

폐허처럼 스산한 저택에서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을 차단한 채 유령처럼 아슬아슬한 은둔 생활을 하던 앙투아네트의 아름답고 의존적인 어머니, 아네트가 극심한 가난을 헤쳐 나갈 최선의 방도는 자신의 미모를 내세워 영국의 부호와 재혼하는 길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서인도제도의 토착민들에 대한 몰지각한 편견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유럽인, 메이슨과의 결혼은 아네트의 생에 치명적인 독으로 스며들었다.

로체스터도 앙투아네트에게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불구여서 더욱 애처로웠던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치욕스럽게 허물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성장해야 했던 앙투아네트는 본능적으로 로체스터에게서 불길한 위험을 감지했다. 이국적인 아름다움으로 로체스터를 한때 매혹했던 앙투아네트의 거침없는 매력은 음란하고 퇴폐적이며 밀교적으로 변색된다. 앙투아네트와 로체스터의 이질적인 대화는 자꾸만 서걱거리고 어긋난다. 그들 사이에 자리 잡은 불신은 미약媚藥으로라도 로체스터의 환심을 사려는 앙투아네트의 집착과, 앙투아네트 가족에 관한 과장된 소문을 맹목적으로 믿어버리는 로체스터의 증오로 나타난다.

아네트와 앙투아네트, 2대에 걸친 정신의 균열은 이방인의 극심한 고통을 상징한다. 서인도제도에서 태어났지만 토착민과 토착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같은 유럽계 백인이지만 유럽인과 유럽 문화에도 온전히 동조할 수 없었던, 영원한 이방인이 그들 모녀였다. 이방인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은 없다. 서인도제도인이면서 유럽인이었지만, 결국은 크리올일 수밖에 없었던 아네트와 앙투아네트에게 들씌워진 멍에는 지금도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드러내는, ‘문화적 이질감’이라는 점잖은 용어로 난무한다. 그래서 속죄한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고이 꽂혀 있는 책장에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도 나란히 꽂아, 나, 앙투아네트도 잊지 않겠다. 꼭 기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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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크림 러브 -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가’ 나가시마 유 첫 장편소설
나가시마 유 지음, 김난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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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럽고 달콤한 슈크림, 먹을 때는 달콤하고 부드러워 한없이 입이 즐겁지만 다 먹고 난 후에는 허전함으로 입맛을 다시게 되는 슈크림처럼 나가시마 유의 『슈크림 러브』는 화사한 분홍색 표지와는 다르게 현실적인 사랑의 뒷맛을 이야기한다.

사랑의 달콤함, 결혼의 부드러움을 맛보았지만 현재는 아내와 이혼하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랑받지 못한 것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는 시치로, 독신에 자유로운 생활을 하지만 사랑의 달콤함을 믿고 싶은 ‘세상 모든 게 사랑과 일’이라는 츠다. 이 상반된 두 사람은 현대 남성의 삶과 사랑, 결혼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다.

전직 게임디자이너인 시치로는 사랑하는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퇴직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아내의 외도로 별거에 이어 이혼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아내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연락이 되지 않던 아내를 걱정하고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자신이 걱정하고 있을 때 아내가 남자친구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마음을 정리하게 된다. 시치로는 새로운 연인-묘하게도 한때 츠다의 여자였던-이 생기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학생 시절 아버지 회사의 부도 이후 자수성가한 츠다는 자유로운 연애와 거리낌없이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여자를 만난다. 그러면서도 후배의 결혼식장에서 ‘결혼은 문화’라고 하며 사랑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동경한다. 츠다는 사랑을 동경했지만 사랑을 알 수 없었고,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 부부라는 문화를 동경했지만 그 안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이기적이고 자유분방했다. 여성을 욕구 해소용으로만 바라보는 츠다에게 ‘문화’는 자신이 속할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일 뿐이었다.

시치로와 츠다의 말처럼 두 사람의 관계가 생성되고 사랑하며 결혼을 하게 된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음을 기반으로 한 ‘문화’가 생성되어야 한다. 츠다는 가족이라는 문화를 동경했으나 그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시치로 부부는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자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 형태가 깨졌다. 그러나 문화는 여전히 공유하고 있기에 함께하지 않아도 상대방을 걱정하고 기억한다.

나가시마 유는 시치로와 츠다라는 대조적인 인물을 통해 현대 남성들의 대표적인 모습을 섬세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려냈다. 슈크림을 처음 베어 물었을 때는 달콤하지만 먹고 난 후에는 허망함과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의 달콤함을 함께 기억하는 것, 나중의 아쉬움을 서로 다독이는 것이 믿음이고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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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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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좀 찾아봤다. 사실 내전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슬람 국가라는 막연한 인상이 전부였다. 토막토막 흩어져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참혹한 역사들을 꿰맞추어 훑어내리면서 아직도 과거완료형의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앞으로도 쭉 이어질 지금 이야기라는 사실이 끔찍하고 살 떨리게 다가왔다. 종교, 종파, 종족이 갈리고 이해관계가 생기고 지배층과 기득권층, 주류층이 형성되어 신념의 문제로 위장한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투기 시작하면, 그 싸움으로 인해 오랜 질곡의 세월 동안 고통당하고 다치는 이들은 착한 사람들뿐이다. 그저 누가 제 욕심껏 권력욕으로 배 불리든 오늘 하루도 양심의 거리낌 없이 자신의 나날들을 성실하게 채워가는 순진한 사람들 말이다.

문득 ‘구분’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개념인지 절실히 깨닫는다. 무엇으로든 나와 너를 구분하기 시작하면 ‘차이’가 드러나고, 우습게도 인간이 규정한 그 인위적인 차이로 인해 더 우습게도 ‘계급’이 생기며 오만하기 그지없는 우월 의식으로 죄의식 없이 ‘차별’을 자행한다. ‘다수의 나’와 ‘소수의 너’라면, 나는 너에 대한 탄압과 무시와 멸시를 당연시한다. 그러나 ‘소수의 나’와 ‘다수의 너’일 수도 있었다는 것은 망각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살아 이승에 있는 것이 좋다던가. 이처럼 소중한 생명의 존재로서 나와 너는 모든 구분을 초월하는 조물주의 사랑을 공유한다. 너보다 우월한 나도, 나보다 열등한 너도, 나보다 우월한 너도, 너보다 열등한 나도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구분’에 눈먼 어른들의 자만심이 아이들의 무결한 세계까지 침범한다면. 하지만 슬프게도 아이들의 세계는 놀랍도록 어른들의 세계를 닮아 있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에서는 다수의 수니파 이슬람교도 파쉬툰인으로 태어난 바바와 아미르, 그리고 소수의 시아파 이슬람교도 하자라인으로 태어난 알리와 하산, 소랍이 대를 이어 비극적인 운명을 되풀이한다. 다수와 소수, 수니파와 시아파(종파), 파쉬툰인과 하자라인(종족), 지배층과 피지배층(계급), 주인과 하인(신분)이라는 엄연한 사회적 구분 앞에 1대 바바와 알리의 형제 같은 우정도, 2대 아미르와 하산의 같은 젖을 먹고 자란 형제애도 배신과 죄책감으로 얼룩진다. 바바가 형제처럼 소중한 우정을 나누었던 알리를 배신했던 것처럼, 아미르도 본능적으로 혈육의 당김을 느꼈음에도 하산을 저버린다. 어른인 아버지와 알리 대의 일이 고스란히 아이인 아미르와 하산 대에서 반복되지만, 에 걸쳐 일그러진 운명은 아미르가 하산의 아들 3대 소랍을 자식으로 받아들이면서 마땅히 처음부터 그랬어야 할 제자리를 찾아가고 선명했던 구분선은 엷어지고 평생의 원죄는 속죄로 화합한다.

할레드 호세이니는 수니파 파쉬툰인도, 시아파 하자라인도, 착한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을 부르기만 하는 잔혹하고도 오만한 구분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반쪽은 수니파 파쉬툰인의 피가, 또 반쪽은 시아파 하자라인의 피가 흐르는 ‘소랍’은 더 이상 그 둘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할레드 호세이니가 바라는 아프가니스탄의 미래인지도 모르겠다. 비단 그것은 아프가니스탄만의 미래뿐이겠는가. 무의식중에 끊임없이 구분하고 너를, 나보다 적은 혹은 많은, 가난한 혹은 부유한, 못한 혹은 나은 자로 규정하여 멸시하거나 아첨하는 우리 사이에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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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 버틀러의 사람들
도널드 맥카이그 지음, 박아람 옮김 / 레드박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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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아이였던 내가 만난 두 번째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였다. 제인 에어처럼(“동화의 세계에서 소설의 세계로 어설프게 넘어가려던 시절” 내가 만난 첫 번째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는 연인 제인 에어와 에드워드 로체스터가 등장하는 『제인 에어』였다) 나와 동일시하기에는 스칼렛 오하라가 너무나 버거운 상대였지만, 나와 달라도 너무나 달라서 매혹될 수밖에 없었던 소설 속 인물로는 아마도 그녀가 처음일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 이전 흑인들을 노예로 거느리고 광활한 농장을 운영하면서 호화로운 사치를 누렸던 남부 백인 사회에서, 스칼렛은 아일랜드에서 이주해 와 기득권층에 안전하게 안착한 부모 슬하에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오만방자한 아가씨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콧대는 스칼렛의 강력한 매력의 근원이다. 스칼렛은 앙큼하게도 자신이 어느 누구보다 예쁘다는 것을 잘 알고, 또 그런 자기 외모를 마음껏 이용할 줄 아는 수완을 지녔다. 불리할 때마다 카멜레온의 천 가지 보호색처럼 뒤집어쓰는 ‘숙녀’의 가짜 허울은, 산들바람에도 흩날리는 얇은 베일처럼 그녀의 욕망을 감추기에 역부족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고, 설령 자기암시에 의한 환상의 그림자일 뿐이라 해도 그것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그러니 ‘신사’의 가면 아래 숨겨진 허례허식과 기만, 잔인함에 신물을 내고, ‘숙녀’의 가면 아래 인형 공장에서 똑같이 만들어져 나오는 바비 인형들처럼 개성 없이 천편일률적인 여인들에게 넌더리 난 레트 버틀러는 마치 자신의 분신 같은 스칼렛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또한 스칼렛도 한눈에 레트가 자신의 분신 같은 사람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비록 줄곧 모른 체 외면하고 있었지만. 스칼렛이 ‘숙녀’ 멜라니 해밀턴 같은 여자였다면, 레트가 ‘신사’ 애슐리 윌크스 같은 남자였다면 서로를 끌어당기지도, 독자들을 몰입시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누구나 솔직한 진심에 마음이 움직이기 마련이다.

도널드 매케이그의 『레트 버틀러의 사람들』은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레트의 시선을 중심으로 다시 쓰고, 스칼렛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멋진 말을 남기며 타라로 돌아간 이후 레트 버틀러의 재회하기까지를 새롭게 덧붙인 속편이다. 소위 ‘원작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속편의 징크스를 고스란히 안고서도, 또다시 조금 과장해서 목침 두께의 이 책을 펼쳐 든 것은 이상하게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속편은 무턱대고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알렉산드라 리플리의 속편 『스칼렛』도 읽었다. 스칼렛도, 레트도 아닌 짝퉁 여자와 남자가 등장하는 로맨스 소설을 읽었다는 씁쓸한 뒷맛이 여전히 남아 있어, 도널드 매케이그의 속편을 읽을 때도 한 번 더 속아주자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웬걸, 이 정도면 충분히 충실하고 만족할 만하잖아, 싶었다. 처음부터 어쭙잖은 편견을 가진 것이 미안할 만큼. 물론 스칼렛의 오만한 매력과 레트의 짖궂은 매력, 그리고 둘의 감정선이 원작의 섬세함을 완벽히 따르지는 못하지만, 『레트 버틀러의 사람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어 있는 이야기들을 도저히 자신의 상상력으로 메울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스칼렛』에서 지독한 실망감을 맛본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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