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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좀 찾아봤다. 사실 내전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슬람 국가라는 막연한 인상이 전부였다. 토막토막 흩어져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참혹한 역사들을 꿰맞추어 훑어내리면서 아직도 과거완료형의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앞으로도 쭉 이어질 지금 이야기라는 사실이 끔찍하고 살 떨리게 다가왔다. 종교, 종파, 종족이 갈리고 이해관계가 생기고 지배층과 기득권층, 주류층이 형성되어 신념의 문제로 위장한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투기 시작하면, 그 싸움으로 인해 오랜 질곡의 세월 동안 고통당하고 다치는 이들은 착한 사람들뿐이다. 그저 누가 제 욕심껏 권력욕으로 배 불리든 오늘 하루도 양심의 거리낌 없이 자신의 나날들을 성실하게 채워가는 순진한 사람들 말이다.
문득 ‘구분’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개념인지 절실히 깨닫는다. 무엇으로든 나와 너를 구분하기 시작하면 ‘차이’가 드러나고, 우습게도 인간이 규정한 그 인위적인 차이로 인해 더 우습게도 ‘계급’이 생기며 오만하기 그지없는 우월 의식으로 죄의식 없이 ‘차별’을 자행한다. ‘다수의 나’와 ‘소수의 너’라면, 나는 너에 대한 탄압과 무시와 멸시를 당연시한다. 그러나 ‘소수의 나’와 ‘다수의 너’일 수도 있었다는 것은 망각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살아 이승에 있는 것이 좋다던가. 이처럼 소중한 생명의 존재로서 나와 너는 모든 구분을 초월하는 조물주의 사랑을 공유한다. 너보다 우월한 나도, 나보다 열등한 너도, 나보다 우월한 너도, 너보다 열등한 나도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구분’에 눈먼 어른들의 자만심이 아이들의 무결한 세계까지 침범한다면. 하지만 슬프게도 아이들의 세계는 놀랍도록 어른들의 세계를 닮아 있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에서는 다수의 수니파 이슬람교도 파쉬툰인으로 태어난 바바와 아미르, 그리고 소수의 시아파 이슬람교도 하자라인으로 태어난 알리와 하산, 소랍이 대를 이어 비극적인 운명을 되풀이한다. 다수와 소수, 수니파와 시아파(종파), 파쉬툰인과 하자라인(종족), 지배층과 피지배층(계급), 주인과 하인(신분)이라는 엄연한 사회적 구분 앞에 1대 바바와 알리의 형제 같은 우정도, 2대 아미르와 하산의 같은 젖을 먹고 자란 형제애도 배신과 죄책감으로 얼룩진다. 바바가 형제처럼 소중한 우정을 나누었던 알리를 배신했던 것처럼, 아미르도 본능적으로 혈육의 당김을 느꼈음에도 하산을 저버린다. 어른인 아버지와 알리 대의 일이 고스란히 아이인 아미르와 하산 대에서 반복되지만, 에 걸쳐 일그러진 운명은 아미르가 하산의 아들 3대 소랍을 자식으로 받아들이면서 마땅히 처음부터 그랬어야 할 제자리를 찾아가고 선명했던 구분선은 엷어지고 평생의 원죄는 속죄로 화합한다.
할레드 호세이니는 수니파 파쉬툰인도, 시아파 하자라인도, 착한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을 부르기만 하는 잔혹하고도 오만한 구분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반쪽은 수니파 파쉬툰인의 피가, 또 반쪽은 시아파 하자라인의 피가 흐르는 ‘소랍’은 더 이상 그 둘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할레드 호세이니가 바라는 아프가니스탄의 미래인지도 모르겠다. 비단 그것은 아프가니스탄만의 미래뿐이겠는가. 무의식중에 끊임없이 구분하고 너를, 나보다 적은 혹은 많은, 가난한 혹은 부유한, 못한 혹은 나은 자로 규정하여 멸시하거나 아첨하는 우리 사이에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