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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ㅣ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샬럿 브론테가 『제인 에어』에서 매혹적으로 그려낸 영국 신사, 로체스터에게 반했는가? 그렇다면 그의 미치광이 아내, 버사 메이슨을 기억하는가?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손필드 저택에 음울한 저주를 드리우는 악의 화신을……. 진 리스는 퉁명함 속에 다정다감한 본성을 감추고 있는 로체스터와 지적이고도 순수한 제인 에어의 아름다운 사랑을 훼방 놓는 방해꾼으로만 등장하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완벽한 조연, 버사 메이슨이 실존할 수 있는 삶을 선사해 주었다.
진 리스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Wide Sargasso Sea』에서 로체스터의 편견이 짙게배어 있는 ‘버사’라는 이름 대신 ‘앙투아네트’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아 주었다. 이 소설은 서인도제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로체스터와 결혼하고 영국 손필드 저택의 화재로 죽기까지 앙투아네트의 일생을 이야기한다. 적어도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서만큼은 진정한 주인공인 앙투아네트와 ‘나’로만 등장하는 로체스터의 교차 시점으로 앙투아네트의 가슴 시린 생애가 흘러가는데, 그녀가 지독한 인종적 편견과 오해로 서서히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이 너무도 서늘하게 다가온다. 앙투아네트의 이야기 속에는 『제인 에어』에 그녀의 가족력으로 등장하는 또 한 명의 광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옹호도 들어 있다. 앙투아네트의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그려지는 그녀의 어머니 아네트와, 로체스터의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지는 앙투아네트가 외부의 지독한 선입관에 의해 대물림으로 정신의 균형을 잃어가는 과정이 슬프게 겹쳐진다.
서인도제도 태생의 프랑스계 크리올로 노예를 부렸던 가문의 딸, 앙투아네트가 그늘 없이 행복한 시절을 보내긴 어려웠다. 앙투아네트 가족의 쇠락사는 노예해방령의 선포를 기점으로 한다. 너무나 윤리적인 노예해방령은 흑인 노예들에 의지하여 농장을 경영하고 부를 쌓은 앙투아네트의 가문을 한순간에 몰락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인도제도의 크리올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선입관을 가진, 같은 인종인 유럽 백인들로부터도 고립되면서 앙투아네트의 가족은 ‘검둥이’보다 못한 ‘흰 검둥이’로 깊게 상처 입는다.
폐허처럼 스산한 저택에서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을 차단한 채 유령처럼 아슬아슬한 은둔 생활을 하던 앙투아네트의 아름답고 의존적인 어머니, 아네트가 극심한 가난을 헤쳐 나갈 최선의 방도는 자신의 미모를 내세워 영국의 부호와 재혼하는 길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서인도제도의 토착민들에 대한 몰지각한 편견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유럽인, 메이슨과의 결혼은 아네트의 생에 치명적인 독으로 스며들었다.
로체스터도 앙투아네트에게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불구여서 더욱 애처로웠던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치욕스럽게 허물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성장해야 했던 앙투아네트는 본능적으로 로체스터에게서 불길한 위험을 감지했다. 이국적인 아름다움으로 로체스터를 한때 매혹했던 앙투아네트의 거침없는 매력은 음란하고 퇴폐적이며 밀교적으로 변색된다. 앙투아네트와 로체스터의 이질적인 대화는 자꾸만 서걱거리고 어긋난다. 그들 사이에 자리 잡은 불신은 미약媚藥으로라도 로체스터의 환심을 사려는 앙투아네트의 집착과, 앙투아네트 가족에 관한 과장된 소문을 맹목적으로 믿어버리는 로체스터의 증오로 나타난다.
아네트와 앙투아네트, 2대에 걸친 정신의 균열은 이방인의 극심한 고통을 상징한다. 서인도제도에서 태어났지만 토착민과 토착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같은 유럽계 백인이지만 유럽인과 유럽 문화에도 온전히 동조할 수 없었던, 영원한 이방인이 그들 모녀였다. 이방인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은 없다. 서인도제도인이면서 유럽인이었지만, 결국은 크리올일 수밖에 없었던 아네트와 앙투아네트에게 들씌워진 멍에는 지금도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드러내는, ‘문화적 이질감’이라는 점잖은 용어로 난무한다. 그래서 속죄한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고이 꽂혀 있는 책장에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도 나란히 꽂아, 나, 앙투아네트도 잊지 않겠다. 꼭 기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