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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 버틀러의 사람들
도널드 맥카이그 지음, 박아람 옮김 / 레드박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아이였던 내가 만난 두 번째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였다. 제인 에어처럼(“동화의 세계에서 소설의 세계로 어설프게 넘어가려던 시절” 내가 만난 첫 번째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는 연인 제인 에어와 에드워드 로체스터가 등장하는 『제인 에어』였다) 나와 동일시하기에는 스칼렛 오하라가 너무나 버거운 상대였지만, 나와 달라도 너무나 달라서 매혹될 수밖에 없었던 소설 속 인물로는 아마도 그녀가 처음일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 이전 흑인들을 노예로 거느리고 광활한 농장을 운영하면서 호화로운 사치를 누렸던 남부 백인 사회에서, 스칼렛은 아일랜드에서 이주해 와 기득권층에 안전하게 안착한 부모 슬하에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오만방자한 아가씨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콧대는 스칼렛의 강력한 매력의 근원이다. 스칼렛은 앙큼하게도 자신이 어느 누구보다 예쁘다는 것을 잘 알고, 또 그런 자기 외모를 마음껏 이용할 줄 아는 수완을 지녔다. 불리할 때마다 카멜레온의 천 가지 보호색처럼 뒤집어쓰는 ‘숙녀’의 가짜 허울은, 산들바람에도 흩날리는 얇은 베일처럼 그녀의 욕망을 감추기에 역부족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고, 설령 자기암시에 의한 환상의 그림자일 뿐이라 해도 그것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그러니 ‘신사’의 가면 아래 숨겨진 허례허식과 기만, 잔인함에 신물을 내고, ‘숙녀’의 가면 아래 인형 공장에서 똑같이 만들어져 나오는 바비 인형들처럼 개성 없이 천편일률적인 여인들에게 넌더리 난 레트 버틀러는 마치 자신의 분신 같은 스칼렛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또한 스칼렛도 한눈에 레트가 자신의 분신 같은 사람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비록 줄곧 모른 체 외면하고 있었지만. 스칼렛이 ‘숙녀’ 멜라니 해밀턴 같은 여자였다면, 레트가 ‘신사’ 애슐리 윌크스 같은 남자였다면 서로를 끌어당기지도, 독자들을 몰입시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누구나 솔직한 진심에 마음이 움직이기 마련이다.
도널드 매케이그의 『레트 버틀러의 사람들』은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레트의 시선을 중심으로 다시 쓰고, 스칼렛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멋진 말을 남기며 타라로 돌아간 이후 레트 버틀러의 재회하기까지를 새롭게 덧붙인 속편이다. 소위 ‘원작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속편의 징크스를 고스란히 안고서도, 또다시 조금 과장해서 목침 두께의 이 책을 펼쳐 든 것은 이상하게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속편은 무턱대고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알렉산드라 리플리의 속편 『스칼렛』도 읽었다. 스칼렛도, 레트도 아닌 짝퉁 여자와 남자가 등장하는 로맨스 소설을 읽었다는 씁쓸한 뒷맛이 여전히 남아 있어, 도널드 매케이그의 속편을 읽을 때도 한 번 더 속아주자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웬걸, 이 정도면 충분히 충실하고 만족할 만하잖아, 싶었다. 처음부터 어쭙잖은 편견을 가진 것이 미안할 만큼. 물론 스칼렛의 오만한 매력과 레트의 짖궂은 매력, 그리고 둘의 감정선이 원작의 섬세함을 완벽히 따르지는 못하지만, 『레트 버틀러의 사람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어 있는 이야기들을 도저히 자신의 상상력으로 메울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스칼렛』에서 지독한 실망감을 맛본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권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