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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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스타 존, 존 레논. 비틀즈의 기타리스트이며 보컬이며 과격한 팬에 의해 사망한 그는 밴드 시절 수많은 곡을 발표하며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며 젊은이들의 우상,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아티스트로서 최고의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있던 존이 아내 요코와의 만남 이후 휴식기를 갖게 되며 그 이후 존은 음악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변화하였다. 요코는 존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존이 전처를 버리면서 죽을 때까지 사랑했던 영혼의 반려자이긴 했지만 비틀즈의 나머지 멤버와 팬들에겐 존을 빼앗아가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마녀’일 뿐이었다.

오쿠다 히데오의 『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는 존과 가족이 대중의 눈을 피해 일본에서 가졌던 4년간의 휴식기 동안 존이 음악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엉뚱하고 유쾌한 상상력으로 채워 넣고 있다. 오쿠다 히데오는 비틀즈와 존 레논의 밴드 시절의 에피소드와 어머니에 대한 애증 등 실제 존의 이야기를 절묘하게 끼워 넣는 것으로 오봉절을 통해 혼령을 만나고 갈등을 해소하는 것과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 속에서 현실감을 주고 있다.

일본의 최대 명절인 오봉절 무렵 유명한 휴양지인 가루이자와에 도착한 존의 가족은 롤빵을 사러 나갔다가 어머니와 꼭 닮은 여성을 보고 이후 알 수 없는 변비에 시달리게 된다. 약국과 병원에서 강력한 변비약과 가축에게나 쓸 것 같은 관장 등 황당한 치료들을 받아 보지만 병은 전혀 고쳐지지 않고 아내인 게이코는 아네모네라는 병원을 추천하며 심리치료를 받아 볼 것을 권한다. 자신도 모르게 최면치료를 받고 있던 존은 변비의 원인 되었던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회복하게 되고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어머니를 만난 후 존의 정신적 공황 상태는 해소되고 결국 존을 괴롭히던 변비도 극복한다.

오쿠다 히데오는 후기를 통해 존 레논의 전기, 특히 그의 음악적, 사상적으로 변하게 된 4년간의 은둔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어떤 의미로는 비틀즈와 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게 된 계기가 된 시기, 가족과의 삶을 택하고 트라우마를 극복한 이 시기의 작가의 상상력은 그럴듯하고 유쾌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이 소설을 읽고 현실 세계의 존도 4년간의 휴가로 존의 음악적, 사상적인 모습이 ‘긍정적’으로 변한 것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휴식기를 통해 현실의 존은 가족을 통해 음악적, 사상적 지향점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런 생각을 들게 만든 작가의 교묘한 솜씨만큼이나 곳곳에 존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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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의 모자 - 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본 17세기 동서문명교류사
티모시 브룩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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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머시 브룩은 『베르메르의 모자』에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베르메르의 매혹적인 그림에 17세기 문물 교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놓았다. 티머시 브룩이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그것도 베르메르의 그림에 주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티머시 브룩이 말했듯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동서양의 문물이 왕성하게 교류되었다는 역사적인 배경 지식은 제쳐두고,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특징만 살펴봐도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신화적, 종교적, 역사적 의미나 상징 없이 온전히 인간의 일상생활에 집중한 장르화(genre, ‘일반적인’ 혹은 ‘전형적인’이라는 뜻의 ‘générique’에서 기원한 미술 용어-츠베탕 토도로프 『일상 예찬』)들이 많이 그려졌다. 일상생활을 회화로 옮겨도 충분히 미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당연히 그 당시에 일상적으로 쓰였던 가정용품을 비롯한 다양한 물건들이 그림 곳곳에 등장한다.

게다가 그 시대 최고의 화가였던 베르메르는 평온한 일상생활의 아름다움을 위해 그린다기보다 자신의 그림이 아름다움으로 빛날 수 있도록 일상생활의 평온한 정경과 오브제들을 배치하고 빛과 그림자를 고려하여 너무도 꼼꼼히(?) 그렸다. 그것도 세계 각지에서 들여온 값비싼 물품들을 자신들의 실내로 기꺼이 들여올 수 있는 상류층 사람들의 일상을 말이다. 티머시 브룩이 주목한 비버 펠트 모자, 진주 귀고리, 중국 도자기 접시, 은화, 세계 지도 등은 그들의 일상 속에서 조금도 간과되지 않고 똑같은 중요성을 지닌 듯 반복적으로 그려졌다. 마치 그림을 위한 소품들로 애용한 듯 그의 그림들에서 여러 번 찾아볼 수 있다.

사실 티머시 브룩의 17세기 네덜란드의 동서양 문물 교류사를 이야기하는 데 꼭 베르메르의 그림들을 언급하지 않았어도 크게 상관없었을 것이다. 제목에 화가 ‘베르메르’의 이름이 들어갔다고 ‘베르메르’와 ‘베르메르의 그림 읽기’에 초점을 맞춘 예술서라는 오해를 하지 말길 바란다. 티머시 브룩의 『베르메르의 모자』는 17세기 네덜란드, 더욱 확장하여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지역)와 “단절 없이 이어진 세계”의 역사서다. 베르메르의 그림 속 오브제들은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 작지만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열쇠가 되어주는 동시에 흩어진 역사를 유기적으로 매끄럽게 조합하는 윤활유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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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책들의 도서관
알렉산더 페히만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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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기계’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한 반 도젠 교수를 창조한 추리소설 작가인 잭 푸트렐의 미발표 원고는 타이타닉 호의 침몰과 함께 사라졌다. 어디 그뿐이랴, 과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화재로 소실된 70만 점의 문서, 작가 개인적인 이유로 스스로 태워버리거나 도둑맞은 미발표 작품들, 자연에 의해 훼손되거나 강제로 폐기된 책들. 이런 이유로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책들을 모아놓은 도서관이 바로 ‘사라진 책들의 도서관’이다. 얼마나 환상적인가. 이 도서관에 발을 디디면 다양한 역사와 문화로 안내하는 말단 사서에 의해 신화로만 전해지는, 존재하지 않는 책들을 만나볼 수 있다. “실낱같은 존재의 개연성만 있어도 그 책은 얼마든지 실재한다고 볼 수 있다”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이 도서관은 그 실낱같은 개연성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도서관은 상징적인 존재이다. 단순히 텍스트만을 보관하는 것이라면 현재의 기술로 얼마든지 압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텍스트만으로 절대 느낄 수 없는 시간과 문화가 책 표지에, 책장 사이사이에 녹아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안내하는 사서가 관리하는 도서관이 필요한 것이다. ‘사라진 책들의 도서관’은 특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책들이 존재하는 곳이어서 더욱 상징적이다.

하지만 현재 살아남은 책들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개인과의 개연성이 없는 책들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책들이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자. 서점에도, 도서관에도, 심지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도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나와의 개연성을 찾지 못하는 한 존재하지 않는 책들이다.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책들은 물리적인 이유뿐 아니라 내가 읽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내가 읽었을 때 그 책은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 『심판』은 내게 존재하는 책이지만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의미로는 독서는 그 책을 존재하게 해주는 의미 있는 행위가 아닐는지.

책에는 언제나 나이만큼의 역사가 숨쉬고 있다. 수십 년 전에 만들어져 누렇게 변해 버린 책,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우연히 접하게 된 책, 막 구입한 새하얀 느낌의 책, 이런 책 모두가 그만큼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다. 이 세상의 수많은 책들 중에서 몇 십 년 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이름을 이어갈 책도 있을 테고 당장 내일이면 사람들에게 잊혀져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고 결국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책들도 있을 것이다. 읽고 싶어서 구했지만 구석에서 먼지만 쌓인 책들이 보인다면 먼지를 훌훌 털어내고 책장을 넘겨보라. 이제 그 책은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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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에 물들다 1 - 흔들리는 대지
아라이 지음, 임계재 옮김 / 디오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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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를 떠올리면, 영혼이 태어나면서부터 잃어버렸던 신성을 되찾게 해주는 불교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 히말라야 고지에 움튼 달라이 라마의 신비로운 나라, 맑은 영혼의 고향, 분노한 신들의 안식처……, 이런 몽환적인 인상들이 먼저 그려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작가 피터 시스는 그의 아름다운 그림책 『티베트』에서 이렇게 내 머릿속에 한 번 새겨진 전설 속 티베트가 지워지지 않도록 야성의 자연과 어울려 욕심 없이 맑은 영혼으로 살아가던 지상의 태곳적 낙원으로 티베트에 대한 환상을 더욱 공고히 해주었다.

그때도 현재 티베트가 중국의 속국이라느니, 티베트에 겸손하고 선량한 티베트인들보다 오만하고 거드름 빼는 중국인이 더 많이 산다느니 떠들어대는 말들을 들었었다. 또한 그때도 인도에서 망명 정부를 세우고 티베트 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는 달라이 라마가 중국과 동화되어 고유한 정신을 잃어가는 티베트를 안타까워한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었다. 그럼에도 ‘무욕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자유롭고 신성한 나라’라는 티베트에 대한 환상을 잃고 싶지 않았다. 티베트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공간에서 별개의 삶을 이어가는 내가 티베트의 현실을 직시하든, 티베트에 대한 환상만을 품든, 그것은 아무 상관 없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고 쉽게 치부했다.

그러나 현실 속 티베트는 남루하고 비참하고, 먼 신성을 구하기보다는 당장의 자유로운 생존권을 지키는 데 삶의 온 힘을 바쳐야 한다. 티베트 사람들은 중국의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에 맞추어 필사적으로 독립을 외쳤다. 비단 중국만을 향한 외침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제 시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려 했던 것처럼, 그들도 세계의 이목이 중국으로 집중되어 있을 때 자신들의 정당한 독립을 온 몸, 온 마음으로 부르짖었다. 그 부르짖음은 나를 향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 티베트의 억울하고 참혹한 현실을 알아만 달라고.

티베트 작가 아라이의 『색에 물들다』는 강력한 투스의 바보 아들의 시선으로 티베트 투스들이 몰락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나가지만, 바보 아들의 이야기에는 비장하고도 장중한 비극미가 서려 있다. 아라이는 소설가로서 탁월한 작가다.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면서 소설 속 인물들을 개성적으로 형성하는 힘도 굉장하고, 아름다운 묘사력도 반할 만하며, 곳곳에 숨겨둔 상징들과 메타포도 은밀하기 그지없다.

소설로서의 매력은 부인할 수 없지만, 『색에 물들다』에서 ‘투스’는 중국과 가까운 티베트 변방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부족장을 일컫는 말로, 중국으로부터 하사받은 호칭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로 생사여탈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투스의 권위는 결국 중국으로부터 나오며, 중국에 의해 투스는 몰락한다. 더 비약하자면 소왕국 티베트 투스의 몰락은 시대의 필연적인 귀결이지만, 투스의 존재 기반을 세우는 것도, 그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도 온전히 중국의 의지라는 말인 것만 같다.  노예와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움켜 쥔 투스들이지만, 이 투스들의 생사여탈권은 중국에게 있다는.

이것은 순전히 이 소설이 “중국 현대문학의 최고 권위 ‘마오둔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홍보 문구를 보고 의심을 떨치기 어려워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편견일지도 모른다. 중국의 문학상을 받고 중국인들까지 열광시킬 정도라면 중국의 시각에 순응하여 중국인의 입맛에 맞도록 교묘하게 써진 것이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국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광고 문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권력의 무상함과 매력적인 인물 바보 아들에 좀더 집중하여 소설 읽은 감상을 남겼을 것이다. 또 헷갈린다. 소설을 문학 자체로만 즐겨야 할지, 문학 이외의 것을 연관 지어 의심해 봐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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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6 - 청소년 성장 장편소설 아사노 아쓰코 장편소설 12
아사노 아쓰코 지음, 양억관 옮김 / 해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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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노 아쓰코의 『배터리』는 미치도록 야구를 좋아하는 소년들의 성장기다. 이것은 소설 제목에서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줄거리였다. 그렇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너무나 야구에 무지했던 것이다. 야구 경기장에 자주 들락거릴 만큼, 텔레비전에서 중계해 주는 야구 경기를 빼놓지 않고 일일이 챙겨 볼 만큼, 신문을 펼치면 야구 기사부터 살피게 될 만큼 내가 야구를 좋아했다면 아사노 아쓰코의 소설 제목 ‘배터리’가 ‘투수’와 ‘포수’를 짝으로 일컫는 야구 용어로 단번에 와 닿았을까. 물론 아사노 아쓰코의 소설 배경에 딱 맞는 ‘배터리’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는 못해도 제목에서 꽤 근사한 의미를 유추할 수 있으며, 그것은 소년들의 성장 드라마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에게 배터리는 무엇을 움직이도록 하는 힘이다. 내가 너를, 네가 나를 움직이도록 하는 힘, 그것도 내가 아니면 아무도 너에게 줄 수 없는 힘, 네가 아니면 아무도 나에게 줄 수 없는 힘 말이다. 그래서 너와 내가 서로의 배터리가 되어주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힘, 서로 죽이 잘 맞는 수다로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던 어제의 스트레스를 훌훌 털고 내일로 가는 길에 활기찬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힘, 겁 많아 온갖 걱정이 덕지덕지 나를 옭아매다가도 네가 믿어주면 무모한 용기도 별일 아니라는 듯 내어보게 하는 힘, 한참 헤매고 서성거리다가도 네가 따끔하게 질책해 주면 두 눈이 번쩍 뜨여 성큼성큼 바른 자리만 딛으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 그것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너와 ‘짝’을 이루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긍정적인 영향력 말이다.
 
천재 투수 하라다 다쿠미와,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거칠게 미트 속으로 돌진해 오는 다쿠미의 매혹적인 공에 반한 포수 나가쿠라 고도 그렇게 짝이 된다. 고 앞에서만 마음껏 전력 투구를 하는 다쿠미, 다쿠미가 전력으로 던지는 공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미트로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하는 고, 다쿠미와 고는 ‘야구’ 안에서만큼은 서로에게 최고의 힘을 끌어내는 최상의 짝, 배터리다. 물론 성장소설답게 정말로 야구밖에 몰라 그 이외에는 눈길 돌릴 줄 모르는 다쿠미와, 다쿠미의 공에 운명처럼 빠져들었지만 천재 투수에 걸맞은 천재 포수가 아니라는 두려움과 자괴감에 사로잡히는 고의 관계도 흔들린다. 그리고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온전히 서로에게만 집중했던 다쿠미와 고는 그 흔들림을 극복하고 관계의 외연을 더욱 풍성하게 넓혀 나간다. 이제 야구 안에서 투수와 포수로서뿐만 아니라 야구 밖에서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로서도 진정한 짝을 이루어 성장한다. 아사노 아쓰코의 『배터리』에서 가장 두드러진 짝은 하라다 다쿠미와 나가쿠라 고이지만, 이 둘 외에도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이루는 짝은 생애 단 한 명만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일생 동안 무수히 많은 타인과 부딪쳐, 이런 점은 좋아 닮고 저런 점은 싫어 엇나가면서 네가 아닌 나를 만들어간다.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나로 있게 하고 내일의 나로 변화시킨다면 나를 중심으로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모두 나와 짝을 이루는 무수히 많은 위성들로 내 삶을 구성한다. 물론 다쿠미의 짝도 고만은 아니다. 다쿠미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모두 다쿠미의 배터리가 되어준다. 자신의 천재적인 능력을 무한히 신뢰하며 오로지 자신의 야구밖에 몰랐던 외골수 다쿠미가 나만 들여다봤던 눈을 돌려 너를 헤아리고 우리도 생각해 보도록 마음의 영향을 준 사람들 모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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