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해부
로렌스 골드스톤 지음, 임옥희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좋은 팩션의 조건 중의 하나는 ‘얼마나 사실과 가까운가’를 꼽을 수 있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인 팩션은 사실에 근거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므로 사실과 닮아 있고 허구와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야말로 좋은 팩션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를 위해 많은 장치를 해 두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켜 작가가 가공한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것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주인공 에이프림 캐롤은 유명한 오슬러 박사의 밑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촉망 받는 젊은 의사다. 오슬러 박사와 제자들은 당시만 해도 범죄 수준으로 여겨지던 해부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해부학 실습실에서 본 젊은 여자의 시체와 동료 의사인 터크의 죽음을 접한 캐롤은 그 비밀을 파헤쳐가며 터크가 했던 수많은 불법행위를 보게 된다. 그 후 상류사회와 접하게 된 캐롤은 베네딕트가의 애비게일이라는 여인을 알게 되고 실종된 친구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캐롤은 사건을 조사하면서 터크의 독살과 젊은 여자의 죽음이 상류층의 추악한 모습과 얽혀 있고 자신이 존경하던 오슬러 교수와 영웅과 같은 선배 의사들에게도 겉과는 달리 숨겨진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토머스 에이킨스의 [애그뉴 박사의 임상강의]를 표지로 내세운 로렌스 골드스톤은 <죽음의 해부>를 통해 의사의 윤리, 해부에 대한 정당성, 낙태‘등과 같은 당시에 논란이 되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로렌스 골드스톤이 직접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다. 수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소수는 희생되어도 괜찮은가?’라는 인간집단에 대한 의문, ‘천재 또는 영웅이 가져다 줄 이익을 위해 그의 잘못은 덮어두어도 괜찮은가?’라는 개인에 대한 의문이다. 다만 그 문제제기가 깊이 다루어지지 못한 것은 작가 자신도 해답을 낼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윤리적인 의문에 앞서 역사는 늘 공리주의의 편에 서 소수를 희생하며 흘러 왔고 앞으로도 그런 선택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다수의 기록이기 때문에 사실만을 두고 본다면 지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소수에 대한 폭력이며 광신에 가깝다. 

‘셜록 홈스와 CSI의 절묘한 조화’라는 화려한 광고 카피를 달고 있는 로렌스 골드스톤의 <죽음의해부>는 셜록 홈스와도 CSI와도 닮은 구석은 없다. 감기약의 효시가 헤로인이었다는 것과 바이엘이 염료 회사였다는 것과 같은 19세기의 의학적 사실들과 당시의 의사들과 상류층의 추악한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 이 책은 ‘리얼 다큐멘터리 의학 팩션’이라는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처럼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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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 참으로 지난하게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어쩌다가 정말로 일에 파묻히는 바람에 아침에 출근할 때 15분 정도밖에 책 읽는 시간을 할애하지 못해서 한 달 내내 이 책 한 권만 들고 있었다. 설상가상, 눈도 마음도 문자에 슬슬 진력났다. 눈이 글자를 거부하고 머리가 생각을 차단했달까. 이 책을 읽을 때 내 상황이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단편집 『다른 남자』를 아우르는 주제가 ‘사랑’이라 해도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랑의 의미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다채롭고 보편적인지에 대해 생각하면 이리저리 조각 퍼즐 맞추듯 꿰맞출 수도 있겠지만.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 중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던 「아들」을 제외하면, 아무리 눈이 글자를 거부하고 머리가 생각을 차단하는 지경에 처했을지라도 대체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소녀와 도마뱀」은 나치 시절 군사재판소 판사로 고위 신분을 보장받아 사치스러운 부를 누렸지만 나치의 몰락과 함께 한순간에 추락한 아버지와,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치부를 들여다보게 되는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아버지와 아들이 유일하게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커다란 소녀와 그 소녀를 응시하는 작은 도마뱀이 함께 있는 그림 한 점에 대한 집착이다. 아버지는 그 그림을 자기 서재에 꽁꽁 감춰두려 하고 아들은 그 그림의 신비로움에 사로잡혀 성장한다. 하지만 거대했던 아버지가 초라해지는 만큼 성장한 아들은 그 그림이 르네 달만이라는 유명한 유대인 화가의 그림이며 커다란 도마뱀과 그 도마뱀을 유혹하려는 작은 소녀가 그려진 그림의 짝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 그림이 나치 시절 아버지의 추악한 죄를 입증하는 증거임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버지가 남긴 서류철이었다. 그 서류철에는 자신을 비판하는 신문기사들과 그 기사 한 줄 한 줄에 대해 빽빽하게 첨언하는 자기 합리화의 교묘한 변명들이 가득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작가도 명확하게 밝혀주지 않는다. 

「외도」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과 그 후를 배경으로 동독인과 서독인의 우정과 배신을 다루고 있다. 가정을 꾸린 동독 남자와 아직 독신인 서독 남자가 우정을 나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우정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도 지속될 만큼 순수하다고 믿는다. 정치 체제가 다른 동독과 서독에 속한 사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파생되는 이득 때문이 아니라. 그러나 그런 척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척은 죽 이어진다. 

「다른 남자」는 이 단편집의 표제작이다. 흠 잡을 데 없는 가정을 함께 이루어 서로만 사랑한 줄 알았던 남편은 아내의 죽음 이후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음을 알리는, 아내에게 보내는 다른 남자의 밀어가 담긴 편지를 받게 된다. 그는 질투심에 불타오른다. 소위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아내에게도 가족에게도 안락한 가정을 제공해 주었다고 굳게 믿었던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의 다른 남자는 허풍선이에 그의 시선으로는 지질한 패배자였으니. 그의 안락한 가정 안에서 아내는 다른 남자로부터 위로를 받았고 딸은 그를 원망하며 냉정하게 대한다. 그가 준다고 믿었다고 주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청완두」는 세 여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완벽하고 다재다능한 남자를 이야기한다. 이 남자는 이 여자가 필요할 때는 그녀에게, 저 여자가 필요할 때는 다른 그녀에게, 이 여자도 저 여자도 부담스럽게 다가올 때는 또 다른 그녀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을 아무런 사심 없이(죄책감도 없이!) 구한다. 남자는 이 관계와 그로 인해 빚어지는 상황들을 통제할 수 있으며 언제든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자만하지만 도리어 영원히, 영원히 속박되고 만다(사실 당연한 귀결, 꼴 좋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간에!). 

「아들」에서는 분쟁 지역에 평화 사절단으로 파견됐다가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젊은 시절 어린 아들이 보내는 눈길을 외면하고 아들과의 관계를 쉽게 포기한 자신의 무기력함을 뼈아프게 회한한다. 

「주유소의 여인」에서는 지금껏 별다른 불행 없이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해 온 중년의 남자가 별안간 아내를 떠나 꿈속의 여인을 찾아 나선다. 사랑과 설렘으로 부부의 관계를 시작했지만, 이제 그 관계를 지속해 주는 열정은 식어버리고 그 자리에는 서걱이는 냉랭함만 감돈다. 부부는 그들의 관계를 이어 나가기 위한 여행을 떠나지만, 남편은 꿈속의 여인에게 남는다. 남편에게 ‘꿈속의 여인’은 그들 부부가 잃어버린 열정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며, 그 인생에서 대범하게 마주하지 못하고 회피하며 물러선 꿈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번 식어버린 사랑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인가, 어떤 것도 다시 꽃피울 수 없다는 것인가. 남겨진 아내의 황망함과 뒤이어 밀려올 온갖 감정들의 파도는 어찌할 것인가. 

이 단편들 속 인물들의 관계는 하나같이 아슬아슬하다. 「소녀와 도마뱀」의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어머니, 「외도」의 서독 남자와 동독 남자, 서독 남자와 동독 남자의 아내, 「다른 남자」의 남편과 죽은 아내, 남편과 죽은 아내의 다른 남자, 「청완두」의 한 남자와 각각의 여자 셋, 「아들」의 아버지와 아들, 「주유소의 여인」의 남편과 아내. 어느 관계도 그 관계만으로 충만하지 못하다. 그래서 실로 쓸쓸하다. 오래도록 이 책을 손에 잡고 있으면서 그토록 쓸쓸했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인가 보다. 그러나 실로 언제나 충만하기만 한 관계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자신의 마음 변덕조차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은데 타인과 타인이 이루어가는 관계에서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의 문제다. 그것은 사람이 그 문제의 정답이라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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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와 떠난 여행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선집 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원유경 옮김 / 새움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진작에 사두었지만 다른 많은 책들처럼 읽지 않은 책 무더기 사이에 묻혀 있다가, 우연찮게 앤디 메리필드의 『당나귀의 지혜』에 급격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책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당나귀와 떠난 세벤느 여행의 노정을 따랐음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R. L. 스티븐슨의 『당나귀와 떠난 여행』을 갑작스럽게 읽게 된 인연은 이러하다.

『당나귀와 떠난 여행』은 스티븐슨이 암탕나귀 ‘모데스틴’과 함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종교 분쟁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남부 세벤느를 여행한 경험과 사색의 기록이다. 르 퓌에서 출발하여 생 장 뒤 갸르에 도착하기까지 열흘 동안 120마일의 험준한 산길을 오로지 두 발에 의지해 뚜벅뚜벅 걸었다. 길에서 길으로, 마을에서 마을으로, 숲에서 골짜기로, 계곡으로, 강가로, 그가 잠시 걷기를 멈출 때는 어둠이 내려와 몸을 누일 곳을 찾아들 때뿐이다.

르 퓌의 작은 마을, 르 모나스티에에서 처음 만나 생 장 뒤 갸르에서 헤어지기까지 스티븐슨의 여행을 함께한 암탕나귀 그녀, 모데스틴과의 실랑이도 웃음이 비어져 나오게 하고(그러나 몰이 막대를 휘두르는 광경은 잔인했다. 내 엉덩이가 다 따끔거렸다.), 종교와 관용, 삶과 인간에 대해 따뜻하고 너그러운 시선으로 사색하게 해주지만,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스티븐슨이 기꺼이 하룻밤의 평화를 의탁한 ‘자연의 밤’이다.

닫혀 있는 지붕 아래 인공적인 세계에서는 죽음처럼 단조로운 밤의 시간이, 별들의 가호를 받고 대지의 여신이 품어주는 자연에서는 “별과 이슬과 향기”로 채워진다. “침대가 있는 방은 적당했다. / 어김없이 밤이 드니 별들은 빛나고 / 공기는 달콤하고, 물이 흘렀다. / 하녀나 하인은 필요없었다. / 신의 푸른 숙소에서 / 나귀와 나, 우리가 묵을 때”라는 아름다운 인용 글귀 아래 「소나무 숲에서 보낸 하룻밤」에는 신의 푸른 숙소에서 잠드는 스티븐슨의 밤이 너무나 매혹적으로 그려진다. 어느 누가 이토록 고혹적인 서정성을 품을 수 있을까. 별들이 반짝이는 천상의 지붕 아래 지상의 초록 융단을 마련해 준 ‘신의 푸른 숙소’의 주인, 자연의 환대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스티븐슨은 장난스레 풀밭 위에 자기 숙박비를 남긴다.

이런 글을 읽었으니 내 머리 위를 압박하는 인공적인 지붕의 무게를 간절히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이 책을 읽은 부작용이다. 문득 집, 출퇴근 버스, 회사는 모두 나를 가두어 자연으로부터 차단시키는 사각형 관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하지만 그 관에서 도저히 벗어날 도리가 없다. 그때 이 책은 또한 깊은 위안이 되어준다. 스티븐슨의 서정적인 글만으로 상상해도 얼마나 고요하고, 평안하고, 안심이 되는지. 스티븐슨의 아름다운 묘사만으로도 내 머리 위는 절로 열린다. 이거야 원, 병 주고 약 주는 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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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지음, 김안나 옮김 / 매직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진정으로 사랑스러운 소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지역신문 편집자로, 도서관 사서로, 서점 직원으로 문학회 회원으로 늘 문학을 가까이해 온 노부인 메리 앤 셰퍼는 “출판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으로 너무나 사랑스러운 소설인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딱 한 권을 남겼다. 문학과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세상의 모든 책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아니다. 그 책이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나무에게 몹시 미안하기도 하고, 조금은 덜 미안하기도 하다. 메리 앤 셰퍼의 ‘출판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은 나무가 아깝지 않은 책이리라.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라면 그녀의 바람대로 출판할 가치가 충분히 있어 나무가 아깝지 않은 책이다.

소설 속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주고받은 편지글로 이루어진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편지들은 전쟁의 잔혹한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여 전쟁으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웃음과 위안을 되돌려주는 칼럼을 쓰고 그 칼럼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한 작가, 줄리엣 애쉬튼이 받거나 쓴 것들로, 대부분은 칼럼집을 출판한 출판사 대표 시드니 스타크와 건지 섬 문학회 사람들과 나눈 애정 어린 편지들이다.

줄리엣과 이들을 연결해 주는 소중한 매개가 되어주는 것은 역시 ‘책’이다. 줄리엣의 집필에 대해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는 믿음직스러운 오빠, 시드니는 물론이고, 건지 섬 사람들과의 인연도 한 권의 책으로 이어진다. 바로 찰스 램 수필집이다. 한때 줄리엣이 소장했던 책으로 서명과 주소가 적힌 찰스 램 수필집 『엘리아 수필선집』이 우연히 건지 섬에 사는 남자 도시 애덤스에게로 흘러 들어갔고, 도시가 찰스 램을 아끼는 마음으로 줄리엣에게 용기 내어 쓴 편지 한 통으로 아름다운 인연들이 이어진다.

건지 섬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나치스에게 점령당한 영국의 한 섬으로 그 점령기 5년 동안 영국 본토와의 연락이 완전히 차단된 섬이다. 줄리엣과 건지 섬 사람들이 주고받은 편지에는 건지 섬 사람들이 ‘감자껍질파이 클럽’이라는 문학회를 통해 그 참담한 시절을 함께 어떻게 견뎌냈는지, 그리고 재치 있는 임기응변으로 ‘감자껍질파이 클럽’을 순식간에 만들어내어 독일군의 매서운 눈을 속인 용감한 여성,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엘리자베스의 기지로 만들어진 ‘감자껍질파이 클럽’은 찰스 램, 셰익스피어,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슨,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플 여사,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로(그 고양이 머핀의 깜찍한 환생 모험 이야기는 실제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인가? 그렇다면 제목은 뭐지?) 전쟁 전후의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무한다.

작가 메리 앤 셰퍼의 따뜻한 시선은 전쟁의 어둠 속으로 침잠하여 음울해지지 않고 그 어둠까지 감싸 안아 포근한 위안을 준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에서 외부인으로 건지 섬에 정착하게 되는 전쟁 전의 엘리자베스와 전쟁 후의 줄리엣 외에도 건지 섬의 선량한 사람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매혹적인 개성으로 독자를 유혹한다. 그들은 전쟁의 그늘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유쾌함을 결코 잃지 않는 강인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 이름들을 일일이 늘어놓으며 찬사하고 싶지만, 일단 읽어보지 않고서는 입술 닳도록 이야기해 봐야 진실로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한 번을 읽든 두 번을 읽든 그들을 떠올리고 만나려면 몇 번이고 다시 책장을 펼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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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군화>를 리뷰해주세요.
강철군화 잭 런던 걸작선 3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궁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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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에 발표된 잭 런던의 『강철 군화』는 사회주의가 전 세계에 실현된 27세기에 한 문헌학자가 20세기 초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어니스트 에버하드의 일대기를 공개하면서 시작된다. 미래인 27세기에 전 세계가 사회주의에 물들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강철 군화』를 쓸 당시보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잭 런던의 소설 속 20세기의 상황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다. 

당시 미국은 독점 자본가에 의해 산업 시설과 국가 기반이 장악 당한 상태였다. 소수의 자본가는 모든 부와 권력을 움켜쥐었고 중산층이 몰락하고 노동자 계급은 실업과 빈곤으로 사회는 양극화된다. 결국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들에게 반기를 들고 집회와 파업으로 생존권을 요구하게 되며 사회주의 운동은 확산되게 된다. 마침내 사회당이 선거를 통해 승리하게 되지만 자본가들의 지배세력인 강철군화는 폭력, 금전을 미끼로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한다. 

잭 런던은 『강철 군화』를 통해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소수의 자본가에 의해 정치적, 사회적 권력을 독점한 과두제 사회를 그려 내었는데 이 과두제 사회가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를 그대로 갖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권력에 기생하는 부패한 변호사, 진실을 왜곡하는 언론, 거짓을 가르치는 교육체계는 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가속시키며 자본가의 헤게모니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이런 자본가들의 노력은 꽤나 성공적이어서 노동자 계급도 부를 거머쥔 특혜 노동자 계급이 그렇지 못한 노동자 계급을 무시하고, 소수의 성공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권력에 아부하기 바빴으며, 실질적인 노동자 계급은 하루를 살기에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 어떤가? 현재 자본주의와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초인이자 혁명가인 어니스트 에버하드는 철저하게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해 혁명을 유도했다. 노동자 계급 자체의 순수한 혁명이 아닌 지식인의 주도로 노동자 계급을 이용해야 했다는 것은 당시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잭 런던 역시 책의 성공으로 유명 작가가 되어 돈과 권력을 갖게 되자 노동자 계급과의 괴리감으로 절망한다. 책의 내용 뿐 아니라 작가 자신의 삶도 현재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부와 권력을 갖게 된 혁명가의 변절이라는 테마는 우리 사회에서도 흔해 빠진 이야기 아니던가. 

대부분의 인간이 가진 욕망으로 미루어 볼 때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건강한 사회는 이런 기회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이런 당연한 기회조차 나눌 수 있는 여유로움도 없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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