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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 참으로 지난하게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어쩌다가 정말로 일에 파묻히는 바람에 아침에 출근할 때 15분 정도밖에 책 읽는 시간을 할애하지 못해서 한 달 내내 이 책 한 권만 들고 있었다. 설상가상, 눈도 마음도 문자에 슬슬 진력났다. 눈이 글자를 거부하고 머리가 생각을 차단했달까. 이 책을 읽을 때 내 상황이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단편집 『다른 남자』를 아우르는 주제가 ‘사랑’이라 해도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랑의 의미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다채롭고 보편적인지에 대해 생각하면 이리저리 조각 퍼즐 맞추듯 꿰맞출 수도 있겠지만.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 중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던 「아들」을 제외하면, 아무리 눈이 글자를 거부하고 머리가 생각을 차단하는 지경에 처했을지라도 대체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소녀와 도마뱀」은 나치 시절 군사재판소 판사로 고위 신분을 보장받아 사치스러운 부를 누렸지만 나치의 몰락과 함께 한순간에 추락한 아버지와,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치부를 들여다보게 되는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아버지와 아들이 유일하게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커다란 소녀와 그 소녀를 응시하는 작은 도마뱀이 함께 있는 그림 한 점에 대한 집착이다. 아버지는 그 그림을 자기 서재에 꽁꽁 감춰두려 하고 아들은 그 그림의 신비로움에 사로잡혀 성장한다. 하지만 거대했던 아버지가 초라해지는 만큼 성장한 아들은 그 그림이 르네 달만이라는 유명한 유대인 화가의 그림이며 커다란 도마뱀과 그 도마뱀을 유혹하려는 작은 소녀가 그려진 그림의 짝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 그림이 나치 시절 아버지의 추악한 죄를 입증하는 증거임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버지가 남긴 서류철이었다. 그 서류철에는 자신을 비판하는 신문기사들과 그 기사 한 줄 한 줄에 대해 빽빽하게 첨언하는 자기 합리화의 교묘한 변명들이 가득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작가도 명확하게 밝혀주지 않는다.
「외도」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과 그 후를 배경으로 동독인과 서독인의 우정과 배신을 다루고 있다. 가정을 꾸린 동독 남자와 아직 독신인 서독 남자가 우정을 나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우정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도 지속될 만큼 순수하다고 믿는다. 정치 체제가 다른 동독과 서독에 속한 사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파생되는 이득 때문이 아니라. 그러나 그런 척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척은 죽 이어진다.
「다른 남자」는 이 단편집의 표제작이다. 흠 잡을 데 없는 가정을 함께 이루어 서로만 사랑한 줄 알았던 남편은 아내의 죽음 이후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음을 알리는, 아내에게 보내는 다른 남자의 밀어가 담긴 편지를 받게 된다. 그는 질투심에 불타오른다. 소위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아내에게도 가족에게도 안락한 가정을 제공해 주었다고 굳게 믿었던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의 다른 남자는 허풍선이에 그의 시선으로는 지질한 패배자였으니. 그의 안락한 가정 안에서 아내는 다른 남자로부터 위로를 받았고 딸은 그를 원망하며 냉정하게 대한다. 그가 준다고 믿었다고 주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청완두」는 세 여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완벽하고 다재다능한 남자를 이야기한다. 이 남자는 이 여자가 필요할 때는 그녀에게, 저 여자가 필요할 때는 다른 그녀에게, 이 여자도 저 여자도 부담스럽게 다가올 때는 또 다른 그녀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을 아무런 사심 없이(죄책감도 없이!) 구한다. 남자는 이 관계와 그로 인해 빚어지는 상황들을 통제할 수 있으며 언제든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자만하지만 도리어 영원히, 영원히 속박되고 만다(사실 당연한 귀결, 꼴 좋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간에!).
「아들」에서는 분쟁 지역에 평화 사절단으로 파견됐다가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젊은 시절 어린 아들이 보내는 눈길을 외면하고 아들과의 관계를 쉽게 포기한 자신의 무기력함을 뼈아프게 회한한다.
「주유소의 여인」에서는 지금껏 별다른 불행 없이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해 온 중년의 남자가 별안간 아내를 떠나 꿈속의 여인을 찾아 나선다. 사랑과 설렘으로 부부의 관계를 시작했지만, 이제 그 관계를 지속해 주는 열정은 식어버리고 그 자리에는 서걱이는 냉랭함만 감돈다. 부부는 그들의 관계를 이어 나가기 위한 여행을 떠나지만, 남편은 꿈속의 여인에게 남는다. 남편에게 ‘꿈속의 여인’은 그들 부부가 잃어버린 열정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며, 그 인생에서 대범하게 마주하지 못하고 회피하며 물러선 꿈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번 식어버린 사랑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인가, 어떤 것도 다시 꽃피울 수 없다는 것인가. 남겨진 아내의 황망함과 뒤이어 밀려올 온갖 감정들의 파도는 어찌할 것인가.
이 단편들 속 인물들의 관계는 하나같이 아슬아슬하다. 「소녀와 도마뱀」의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어머니, 「외도」의 서독 남자와 동독 남자, 서독 남자와 동독 남자의 아내, 「다른 남자」의 남편과 죽은 아내, 남편과 죽은 아내의 다른 남자, 「청완두」의 한 남자와 각각의 여자 셋, 「아들」의 아버지와 아들, 「주유소의 여인」의 남편과 아내. 어느 관계도 그 관계만으로 충만하지 못하다. 그래서 실로 쓸쓸하다. 오래도록 이 책을 손에 잡고 있으면서 그토록 쓸쓸했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인가 보다. 그러나 실로 언제나 충만하기만 한 관계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자신의 마음 변덕조차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은데 타인과 타인이 이루어가는 관계에서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의 문제다. 그것은 사람이 그 문제의 정답이라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