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와 떠난 여행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선집 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원유경 옮김 / 새움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진작에 사두었지만 다른 많은 책들처럼 읽지 않은 책 무더기 사이에 묻혀 있다가, 우연찮게 앤디 메리필드의 『당나귀의 지혜』에 급격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책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당나귀와 떠난 세벤느 여행의 노정을 따랐음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R. L. 스티븐슨의 『당나귀와 떠난 여행』을 갑작스럽게 읽게 된 인연은 이러하다.

『당나귀와 떠난 여행』은 스티븐슨이 암탕나귀 ‘모데스틴’과 함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종교 분쟁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남부 세벤느를 여행한 경험과 사색의 기록이다. 르 퓌에서 출발하여 생 장 뒤 갸르에 도착하기까지 열흘 동안 120마일의 험준한 산길을 오로지 두 발에 의지해 뚜벅뚜벅 걸었다. 길에서 길으로, 마을에서 마을으로, 숲에서 골짜기로, 계곡으로, 강가로, 그가 잠시 걷기를 멈출 때는 어둠이 내려와 몸을 누일 곳을 찾아들 때뿐이다.

르 퓌의 작은 마을, 르 모나스티에에서 처음 만나 생 장 뒤 갸르에서 헤어지기까지 스티븐슨의 여행을 함께한 암탕나귀 그녀, 모데스틴과의 실랑이도 웃음이 비어져 나오게 하고(그러나 몰이 막대를 휘두르는 광경은 잔인했다. 내 엉덩이가 다 따끔거렸다.), 종교와 관용, 삶과 인간에 대해 따뜻하고 너그러운 시선으로 사색하게 해주지만,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스티븐슨이 기꺼이 하룻밤의 평화를 의탁한 ‘자연의 밤’이다.

닫혀 있는 지붕 아래 인공적인 세계에서는 죽음처럼 단조로운 밤의 시간이, 별들의 가호를 받고 대지의 여신이 품어주는 자연에서는 “별과 이슬과 향기”로 채워진다. “침대가 있는 방은 적당했다. / 어김없이 밤이 드니 별들은 빛나고 / 공기는 달콤하고, 물이 흘렀다. / 하녀나 하인은 필요없었다. / 신의 푸른 숙소에서 / 나귀와 나, 우리가 묵을 때”라는 아름다운 인용 글귀 아래 「소나무 숲에서 보낸 하룻밤」에는 신의 푸른 숙소에서 잠드는 스티븐슨의 밤이 너무나 매혹적으로 그려진다. 어느 누가 이토록 고혹적인 서정성을 품을 수 있을까. 별들이 반짝이는 천상의 지붕 아래 지상의 초록 융단을 마련해 준 ‘신의 푸른 숙소’의 주인, 자연의 환대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스티븐슨은 장난스레 풀밭 위에 자기 숙박비를 남긴다.

이런 글을 읽었으니 내 머리 위를 압박하는 인공적인 지붕의 무게를 간절히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이 책을 읽은 부작용이다. 문득 집, 출퇴근 버스, 회사는 모두 나를 가두어 자연으로부터 차단시키는 사각형 관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하지만 그 관에서 도저히 벗어날 도리가 없다. 그때 이 책은 또한 깊은 위안이 되어준다. 스티븐슨의 서정적인 글만으로 상상해도 얼마나 고요하고, 평안하고, 안심이 되는지. 스티븐슨의 아름다운 묘사만으로도 내 머리 위는 절로 열린다. 이거야 원, 병 주고 약 주는 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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