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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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펼치면 재미있는 경고문이 먼저 눈에 띈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기소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추방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총살할 것이다.
―지은이의 명령에 따라 군사령관 G. G.
 
   

나는 원래 이야기에서 교훈을 찾지 않는다. 내가 찾지 않았는데도 억지스러운 감동에 기반한 교훈이 드러나면 그 이야기는 대개 바로 아웃이다! 하지만 동기는 제법 짐작해 보려 하고 플롯은 따지는 편이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기소되어 총살당할 위험이 크다. 조심해야지! 마크 트웨인의 경고를 받아들여 남북전쟁 이전 흑인 노예제도의 부조리한 참상과 당대 사회상의(오늘날도 여전한, 허위와 기만과 위선으로 가득한) 풍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

나에게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제목처럼 가슴 두근거리는 모험 이야기다. 모험! 얼마나 설레고 흥분되는 말인가. 실제로 모험을 감행하기는 겁났던(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린 시절, ‘모험’에 대한 욕구를 달래주었던 것은 이런 모험소설들이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미시시피 강과 뗏목의 낭만적인 로망이 가득하다. 몇 날 며칠 뗏목을 타고 물살에 모든 것을 맡긴 채 흘러 내려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강을 상상하는 것은 평범하고 지리한 나날을 보내던 어린 나에게 느긋한 평화와 심장박동이 증가하는 흥분감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더군다나 고지대에 있는 우리 집에서는 고향을 감싸고 유유히 흐르던 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강한 날이면 강물이 반짝거렸다. 물론 길이와 유역 면적에서 세계 3, 4위를 다투는 미시시피 강에 비하면 샛강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톰 소여의 모험』의 속편 격인 마크 트웨인의 작품으로(하지만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문학사적으로 더욱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그토록 찾지 말라고 경고한 의미들을, 그래서 더더욱 찾았기 때문이다!), 톰 소여와 함께 인디언 조의 보물을 찾아 나섰던 허클베리 핀이 흑인 노예 짐과 함께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여행하는 모험기다. 허크는 술주정뱅이 아빠와(날마다 매질하고 교육받지 못하게 하고 남의 것을 훔치라고(빌리라고) 시키고 급기야는 톰 소여와 함께한 모험을 통해 들어온 자식의 돈을 갈취하기 위해 허크를 납치하고 감금하니, 세상에, 이런 부모가 어디 있나 싶었지만 오늘날 자기 아이를 학대하고 성폭행하는 흉흉하고 처참한 뉴스를 떠올리면 인간이 진저리 나고 무서워진다), 답답한 관습과 예절을 종용하는 후견인 더글러스 과부댁, 왓츤 아줌마를 피해, 짐은 가족과 영영 만날 길 없는 곳으로 팔려가지 않기 위해 뗏목 여행을 시작한다.

   
 

우리는 고기를 낚았고, 이야기도 나누었으며, 때때로 졸음을 쫓기 위해 헤엄도 쳤습니다. 벌렁 누워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유유히 흐르는 큰 강을 떠내려가는 것에는 뭐랄까, 일종의 엄숙함마저 감돌았습니다. 커다란 목소리로 지껄이지도 못할 것 같았으며 크게 웃음소리도 낼 수 없을 것 같아서 나지막한 소리로 킬킬대는 정도였지요.

 
   

아, 상상은 언제나 감미롭다. 얼마나 황홀하고 평화로운 공간인지, 얼마나 한가로운 시간인지. 하지만 허크와 짐에게 뗏목 여행은 값비싼 요트 여행처럼 안전하고 안락하지만은 않았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에만 뗏목을 탔으며, 짙은 안개와 급류로 위험천만한 위기를 겪기도 하고, 뗏목을 잠시 멈추는 곳마다 온갖 사건에 휘말린다. 게다가 짐은 백인에게 붙잡힐까 봐 불안해하고, 허크는 짐이 자유로워지도록 함께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 확신할 수 없어 죄스럽다.

지금은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소유한다는 것이, 급기야 사고판다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일임을 통감하지만(그러나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돈이 인간을 소유하고 부리고 사고파는데), 허크의 시대는 미국 남북전쟁 직전이다. 그러나 허크는 끝내 짐을 배반하지 않는다. 인간의 따뜻한 심장을 따라 짐이 자유를 찾도록 도와주고 자신은 “지옥”에 가는 길을 선택한다. 짐도 자기 자유를 위해 매정하게 제 몸만 사리지 않는다. 뗏목 여행 마지막 위기에서 허크와 짐은 톰 소여의 위험한 모험 놀이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때 짐은 톰을 살리기 위해 다시 붙잡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오늘날로 치면 허크는 문제아 악동이고 짐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이지만, 그들은 낙천적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민감하며 인간에 대한 연민과 휴머니즘을 간직한 멋진 짝이다. 허크와 짐이 경계 없이 나누는 우정과 인간애는 더없이 아름답다.

허크와 짐의 뗏목 여행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톰 소여와의 대소동으로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모험소설에 심취한 톰은 모험의 온갖 원칙을 들먹이며 허크와 짐에게 터무니없는 일들을 제안한다. 하지만 그토록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모두 해내기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법, 그러자 톰은 암묵적인 상상을 한다. 그렇게 했다고 치자고. 이 부분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어릴 때 나의 모든 놀이도 대개 상상을 덧입힌 현실에서 이루어졌다. 누더기 옷을 화려한 드레스로, 호박을 근사한 마차로, 쥐를 위엄 있는 마부로 바꾼 요정 할머니처럼 내가 상상하는 순간 나를 둘러싼 일상적인 현실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특별하게 변화시킬 줄 아는 아이들의 순수한 마법이 아닐까. 행복한 마법의 시간을 통과해 온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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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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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음은 감각을 통해 생생하게 자각된다. 두 눈에 들어와 박히는 모든 풍경과 물질, 두 콧구멍으로 흘러드는 모든 냄새와 향기, 두 귀로 흘러드는 모든 소리, 입과 혀로 맛보는 모든 맛, 온몸이 접촉하는 모든 느낌은 내가 펄펄 뛰는 심장과 끊임없이 인지하는 뇌로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살아 있는 어느 한순간도 감각은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감각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고 때때로 망각되기까지 한다. 급기야 고통의 한계에 직면할 때면 그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감각을 저주하기도 한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그토록 본능적인 작용을 ‘작은 축제’라고 이야기한다. 이 감각의 축제는 감각기관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늘 열리고 있다. 순간순간마다 열리는 그 감각의 축제에 참가하여 감각의 축복을 얼마나 즐기느냐는 순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다. 얼마나 감각을 향해 온몸을 열어두는지, 얼마나 감각을 다채롭게 활용하는지. 다이앤 애커먼의 『감각의 박물학』은 우리의 오감(후각, 촉각, 미각, 청각, 시각)과 공감각이 벌이는 감각의 향연에 우리를 불러들이는 고혹적인 초대장이다.

나는 시각의 기쁨과 고마움은 늘 느끼고 있었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들은 대부분 ‘눈’ 없이는 결코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책 읽는 일부터도 그렇다(물론 읽는다는 행위에는 시각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글자들의 상징체계를 인식하고 통합할 수 있는 뇌의 해독 능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책, 못 읽는 남자』의 작가 하워드 엥겔을 통해 잘 알고 있지만). 청각을 이용한 오디오북도, 촉각을 이용한 점자책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책과 문자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시각의 세계다. 여기에서 소리 내어 읽기를 하면 청각은 시각의 세계를 한 차원 더 고양한다. 또한 책장을 넘길 때 느껴지는 종이의 촉감도, 얼핏 풍겨 나오는 종이 냄새도 책 읽기의 기쁨을 증폭한다.

우리 몸의 감각 체계는 무엇을 할 때 단 하나의 감각만 작동시키지 않는다. 그 무엇을 향유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그 감각들이 상승작용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감각들의 상승작용을 통해 생의 기쁨은 증폭된다. 다이앤 애커먼은 후각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해서 촉각, 미각, 청각, 시각에 이어 공감각으로 끝맺지만, 때때로 다른 감각들까지 넘나드는 것은 모두 그 때문이다. “세상은 얼마나 황홀하고 감각적인가”로 감각의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다이앤 애커먼의 명징한 은유로 가득한, 아름다운 문장들은 우아하고 세련됐으며 사랑스럽다. 감각에 대한 소소하고도 거침없는 호기심들은 귀엽고 지적이다. 모든 것이 궁금하기 그지없는 아이의 시선이지만, 그녀의 해박한 지성은 오롯이 드러난다. 다이앤 애커먼이 주최는 감각의 축제에서 그녀가 이끄는 대로 감각을 열어놓으면 “직접적인 삶의 감각을 피해 황량하고, 단순하고, 엄숙하고, 금욕적이며, 사무적인 일상으로 찌그러진” 우리 삶의 결을 되찾을 수 있다. 그녀의 말대로 감각이 생을 얼마나 아름답게 물들이는지에 절실해지고, 잊었던 혹은 놓쳤던 감각을 되살리고 싶어진다. 그것은 사랑이다. 감각은 우리가 소소한 생을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통로다. 

   
  감각은 인간을 확장시키지만 구속하고 속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랑 또한 아름다운 구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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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인은 죽었다 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2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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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나는 『의뢰인은 죽었다』를 읽기 전에 와카타케 나나미의 두 작품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과 『네 탓이야』를 읽을 수 있었다.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은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 속에 숨겨져 있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그린 것이며 『네 탓이야』 역시 일상적인 삶 속에 숨겨진 섬뜩한 이웃의 악의에 대한 이야기로 여탐정 하무라 아키라가 등장하는 첫 작품이기도 하다. 이처럼 와카타케 나나미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이야기 속에 숨겨진 미스터리를 잘 그려 내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본격적이다. 사건의 스케일이 커졌을 뿐 아니라 이야기가 주는 위압감도 커졌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전 두 작품이 더 좋다. 이야기 자체가 변화하면서 하무라 아키라의 매력도 전작에 비해 반감되었을 뿐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주는 재미가 다른 작가의 작품들과 차이점을 발견하기 쉽지 않았던 탓이다. 이런 변화가 불만스러운 것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의뢰인은 죽었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 속에 숨겨진 어두움이다. 9개의 단편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연작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단편 속에는 하무라 아키라와 관련된 큰 줄기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런 구성은 연작 추리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단편만으로 구성되었을 때의 약점이기도 한 이야기가 단절되는 느낌을 방지해 준다. 『의뢰인은 죽었다』에서도 첫 번째 이야기와 마지막 이야기에 등장하는 짙은 감색의 악마는 하무라 아키라와 관련된 큰 줄기의 이야기다.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에 냉정하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하무라 아키라는 하세가와 탐정 사무소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언니 스즈의 자살로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하무라 아키라는 언니의 자살처럼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철저하게 조사해 진실만을 바라보려 한다. 계절이 지나며 여러 사건을 해결하는 도중 하무라는 각 사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의 흔적을 보게 되며 마침내 감색의 악마와 마주하게 되는데…….

나는 사실 이렇게 찜찜하게 끝나는 작품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무언가 숨겨져 있는 무언가가 더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끝내면서 노골적으로 ‘다음 편을 기다려 주세요’라고 하는 느낌이 들어 싫다. 다음 이야기는 『나쁜 토끼』로 하무라 아키라가 등장하는 첫 장편이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는 하무라 아키라의 이야기가 끝맺음을 할 수 있을지, 와카타케 나나미의 단편을 읽는 재미가 장편에서도 계속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일본 독자들에게 “매우 충격적”이라는 평가를 얻었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된다. 개인적으로는 타이타닉 호에서 사라진 잭 푸트렐-사고기계 반 도젠 교수를 만들어낸 『13호 독방의 문제』의 작가-의 환상의 원고를 둘러싼 역사 추리물 『넵튠의 만찬』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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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의 도시들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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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뜸해졌지만 한때 서부를 무대로 한 총잡이들을 그린 영화가 대 유행했던 것과 여전히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이 창작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골드러시 전후의 개척시대에 대한 미국인들의 환상은 여전히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듯 하다. 코맥 매카시는 <핏빛 자오선>에 이어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를 배경으로 <모두 다 예쁜 말들>, <국경을 넘어>, <평원의 도시들>로 이어지는 ‘국경 3부작’을 발표하며 대중문학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미국의 서부시대의 이야기를 고급문학으로 끌어 올리는데 힘을 보탰다. <평원의 도시들>은‘국경 3부작’을 마무리 짓는 작품인 동시에 전작에 등장했던 인물들의 다시 만나는 무대이기도 하다. 각 작품마다 이야기가 독립되어 있어 따로 읽어도 큰 문제는 없지만 존의 이야기였던 <모두 다 예쁜 말들>과 빌리의 이야기였던 <국경을 넘어>를 먼저 읽는 것이 등장인물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존과 빌리가 그들의 운명에 맞서는 방식은 서로 다른데 이것은 이전 경험에 크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장을 팔려는 어머니와 갈등을 겪은 후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가 사랑에도 실패하고 여러 일을 겪으면서 성장한 존과 덫에 걸린 늑대를 놓아 주기 위해 국경을 넘나들며 냉혹한 세계에 절망하고 상처받은 빌리는 엘페소 근처의 농장에서 말과 함께 서로를 다독이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강을 사이에 둔 멕시코의 도시 후아레스로 놀러 간 존은 매음굴에서 상처입은 영혼을 지닌 창녀 막달레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매음굴에서 그녀를 빼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은 존이지만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혹한 현실 뿐이었다. 빌리는 이런 존에게 힘이 되어 주려고 노력하지만 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혹한 운명 뿐이었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알고 있던 빌리는 그 운명에 휩쓸리지 않고 빗겨갔지만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으며 아끼던 존까지 잃게 된 그에게 남겨진 것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코맥 매카시가 그려 내는 서부의 이야기는 아름다우면서도 잔혹하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자연 속의 일상 속에 침입해 오는 감당해 내기 버거운 운명은 서사적으로 표현되어 서로 대비되며 강렬한 느낌을 전하고 있다. 코맥 매카시는 국경지대와 국경을 넘는다는 행위를 의도적으로 사용해 인간이 잔혹한 운명 앞에 어떻게 변화하는 지를 보여준다. 사랑을 위해 국경을 다시 넘어가는 존과 운명의 잔혹함을 이미 알아 버린 빌리의 결말은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닮아 있다. 사랑 때문에 죽어 버린 존에게도 살아 남은 빌리에게도, 삶은 자기 자신만의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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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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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이는 뛰어난 작가다. 그의 첫 장편소설 『색에 물들다』를 읽고 반짝이는 이야기꾼의 재능을 눈치 챈다면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티베트 출신으로  중국 현대문학의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는 ‘마오둔 문학상’을 받았다니 작품의 수준을 떠나서 어딘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어 조금은 야박한 감상을 남겼지만, 아라이의 비범한 작가적 역량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 이후 중국 쓰촨 성과 티베트 경계에 있는 마을 ‘지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작소설의 형태로 열세 편의 단편에 담은 『소년은 자란다』도 일단은 그에 대한 기대가 컸고, 조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라이는, 티베트는 심오한 명상과 종교적 구도의 나라 ‘샹그릴라’가 아니라 “한국이 그렇고 미국이 그렇듯, 프랑스와 영국, 일본이 그렇듯 이 세상의 한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 연작소설집의 단편들이 한국소설이 그렇고 미국소설이 그렇듯, 프랑스소설과 영국소설, 일본소설이 그렇듯 이 세상의 어느 한 곳일 뿐인 티베트에서 살아가는 그저 사람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로 읽히길 바라는 듯하다. 친구를 질투하고 정을 쌓고 풋사랑을 하고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끊임없이 욕망하는, 보편적인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인 사람들 말이다.

   
  티베트에도 풀과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열리고 꽃이 핍니다. 풀과 나무의 바다에서 사람들은 흥망성쇠를 겪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도시에 살면서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노력합니다. 외부 세계에서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그곳 사람들은 심오한 명상만 하거나 현실 문제에 초연한 정신적 스승들에게 의지만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정신적인 스승도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욕구를 느끼고, 그런 욕구가 채워진 다음에야 감성이 풍부해질 수 있을 겁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그래서 『소년은 자란다』의 지촌 사람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로 이 땅에 생생하게, 그리고 수더분하고 소박하고 순박하게 살아 있다. 다만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 자기 색깔을 품고 있듯이 티베트 고유의 향기가 배어난다. 무엇보다 사원 철폐, 강제로 환속당한 라마승, ‘바퀴’와 트랙터가 상징하는 외부 문명, 매춘의 유혹, ‘해방군, 문화공작단, 생산대’ 같은 공산주의 말 등과, 그로 인한 급격한 변화의 거센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또 다른 일상을 이어가는 지촌 사람들에 대한 아라이의 해학적이면서도 애잔하고 조금은 쓸쓸한 시선은 티베트 역사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1950년대는 불교(라마교)를 신봉하고 고유의 문화를 지키며 티베트어를 사용하는 단일 국가였던 티베트 역사의 분기점이다. 고립의 시기와 연결의 시기가 나뉘는 격변기인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불행하게도 티베트 역시 우리 조선처럼 자국의 의지와 힘으로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것처럼 1950년대에 중국의 본격적인 침략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지고 나서야 중국과 서양 문명으로 대변되는 외부 세계는 티베트에 물밀듯 밀어닥쳤다. 그리고 티베트는 휩쓸리고 말았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변화를 강요당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명분을 지니고 있더라도 비극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국가의 대부분을 이루는 피지배계층은 비극 앞에 속수무책이다. 그들의 최선은 온몸으로 부대끼고 적응하고 견디면서 살아남는 것뿐이다. 분통 터지게 울면서 우스꽝스럽게 웃으면서. 그래서 그들을 바라보는 일은 애처롭고 안타깝고, 남 일 아닌 내 일처럼 슬프다.

『소년은 자란다』에서 무척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홰나무꽃」, 그리고 「마지막 마부」와 「아오파라 마을」이다. 그중에서도 「홰나무꽃」이 가장 좋았다. 소도시 주차장의 비좁은 유리 초소에서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는 티베트 노인 셰라반과 같은 고향 사투리를 쓰는 버릇없는 젊은이가 홰나무꽃 찐빵을 쪄먹는 풍경은 경탄스러우리만치 아릿하다. 웃음이 나는데 슬픔이 슬며시 배어든다. 슬픈데 유리 초소 안까지 풍겨 오는 짙은 홰나무꽃 향기, 하얀 홰나무꽃을 한아름 안고 와 찐빵을 만들어달라는 젊은이, 홰나무꽃 찐빵을 찌고 홰나무꽃을 따는 셰라반은 너무나 아름답다. 「마지막 마부」에서는 불교 경문이 빼곡히 새겨진 티베트 유일의 바퀴인 경륜(經輪)이 마차와 트랙터의 바퀴로 변천해 가는 ‘바퀴’의 변화가 몹시 메마르게 다가왔다. 경륜을 돌리면 우르릉 윙윙 경문을 통째로 쏟아내며 대신 축원해 주던 하늘의 바퀴가 마차의 한 부분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기면서 땅의 바퀴가 되어 사람들에게는 편리함을, 마부에게는 긍지를 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땅의 바퀴는 더 빠르게 굴러 금세 트랙터 바퀴로 다시 등장한다. 마차 바퀴를 끌었던 말이 수명을 다해 죽어도 트랙터는 야멸치도록 건재하다. 점점 쇠락해 가는 티베트 마을을 작가인 ‘나’의 시선으로 잔잔하게 묘사한 「아오파라 마을」은 마치 이 연작 단편들을 쓴 작가인 아라이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듯 느껴져 티베트를 바라보는 그의 애잔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런데도 가슴 한 켠을 떠나지 않는, 이 의뭉스러운 의구심. 티베트 사람들에게 아라이는 어떤 작가일까. 아라이는 “티베트는 중세 이래 수천 년 동안 생활상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대를 이어오던 생명들이 조용히 시들어갔지만 역사는 여전히 답보 상태로 있었지요. 저는 제가 행운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태어날 때 변화가 시작됐고, 그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습니다. 운 좋게도 저는 그 진행 과정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고, 동시에 관찰하고 기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한국의 독자들에게)”라고 말했다. 그는 왠지 중국이라는 타의에서 비롯된 변화를 환영하는 듯한, 좀더 비약하자면 고마워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소년은 자란다』에서도 불가피한 변화를 겪어내는 티베트 사람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분명 작가의 진심이지만, 그 변화 역시 별 비판 없이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모든 변화에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지만, 그 계기가 강제된 타의라도 그로 인한 변화가 역사적 발전일까? 지금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 사람들도 아라이에게 동의할까? 나는 중국인에게 인정받는 아라이보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라이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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