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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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이는 뛰어난 작가다. 그의 첫 장편소설 『색에 물들다』를 읽고 반짝이는 이야기꾼의 재능을 눈치 챈다면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티베트 출신으로  중국 현대문학의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는 ‘마오둔 문학상’을 받았다니 작품의 수준을 떠나서 어딘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어 조금은 야박한 감상을 남겼지만, 아라이의 비범한 작가적 역량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 이후 중국 쓰촨 성과 티베트 경계에 있는 마을 ‘지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작소설의 형태로 열세 편의 단편에 담은 『소년은 자란다』도 일단은 그에 대한 기대가 컸고, 조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라이는, 티베트는 심오한 명상과 종교적 구도의 나라 ‘샹그릴라’가 아니라 “한국이 그렇고 미국이 그렇듯, 프랑스와 영국, 일본이 그렇듯 이 세상의 한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 연작소설집의 단편들이 한국소설이 그렇고 미국소설이 그렇듯, 프랑스소설과 영국소설, 일본소설이 그렇듯 이 세상의 어느 한 곳일 뿐인 티베트에서 살아가는 그저 사람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로 읽히길 바라는 듯하다. 친구를 질투하고 정을 쌓고 풋사랑을 하고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끊임없이 욕망하는, 보편적인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인 사람들 말이다.

   
  티베트에도 풀과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열리고 꽃이 핍니다. 풀과 나무의 바다에서 사람들은 흥망성쇠를 겪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도시에 살면서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노력합니다. 외부 세계에서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그곳 사람들은 심오한 명상만 하거나 현실 문제에 초연한 정신적 스승들에게 의지만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정신적인 스승도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욕구를 느끼고, 그런 욕구가 채워진 다음에야 감성이 풍부해질 수 있을 겁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그래서 『소년은 자란다』의 지촌 사람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로 이 땅에 생생하게, 그리고 수더분하고 소박하고 순박하게 살아 있다. 다만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 자기 색깔을 품고 있듯이 티베트 고유의 향기가 배어난다. 무엇보다 사원 철폐, 강제로 환속당한 라마승, ‘바퀴’와 트랙터가 상징하는 외부 문명, 매춘의 유혹, ‘해방군, 문화공작단, 생산대’ 같은 공산주의 말 등과, 그로 인한 급격한 변화의 거센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또 다른 일상을 이어가는 지촌 사람들에 대한 아라이의 해학적이면서도 애잔하고 조금은 쓸쓸한 시선은 티베트 역사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1950년대는 불교(라마교)를 신봉하고 고유의 문화를 지키며 티베트어를 사용하는 단일 국가였던 티베트 역사의 분기점이다. 고립의 시기와 연결의 시기가 나뉘는 격변기인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불행하게도 티베트 역시 우리 조선처럼 자국의 의지와 힘으로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것처럼 1950년대에 중국의 본격적인 침략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지고 나서야 중국과 서양 문명으로 대변되는 외부 세계는 티베트에 물밀듯 밀어닥쳤다. 그리고 티베트는 휩쓸리고 말았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변화를 강요당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명분을 지니고 있더라도 비극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국가의 대부분을 이루는 피지배계층은 비극 앞에 속수무책이다. 그들의 최선은 온몸으로 부대끼고 적응하고 견디면서 살아남는 것뿐이다. 분통 터지게 울면서 우스꽝스럽게 웃으면서. 그래서 그들을 바라보는 일은 애처롭고 안타깝고, 남 일 아닌 내 일처럼 슬프다.

『소년은 자란다』에서 무척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홰나무꽃」, 그리고 「마지막 마부」와 「아오파라 마을」이다. 그중에서도 「홰나무꽃」이 가장 좋았다. 소도시 주차장의 비좁은 유리 초소에서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는 티베트 노인 셰라반과 같은 고향 사투리를 쓰는 버릇없는 젊은이가 홰나무꽃 찐빵을 쪄먹는 풍경은 경탄스러우리만치 아릿하다. 웃음이 나는데 슬픔이 슬며시 배어든다. 슬픈데 유리 초소 안까지 풍겨 오는 짙은 홰나무꽃 향기, 하얀 홰나무꽃을 한아름 안고 와 찐빵을 만들어달라는 젊은이, 홰나무꽃 찐빵을 찌고 홰나무꽃을 따는 셰라반은 너무나 아름답다. 「마지막 마부」에서는 불교 경문이 빼곡히 새겨진 티베트 유일의 바퀴인 경륜(經輪)이 마차와 트랙터의 바퀴로 변천해 가는 ‘바퀴’의 변화가 몹시 메마르게 다가왔다. 경륜을 돌리면 우르릉 윙윙 경문을 통째로 쏟아내며 대신 축원해 주던 하늘의 바퀴가 마차의 한 부분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기면서 땅의 바퀴가 되어 사람들에게는 편리함을, 마부에게는 긍지를 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땅의 바퀴는 더 빠르게 굴러 금세 트랙터 바퀴로 다시 등장한다. 마차 바퀴를 끌었던 말이 수명을 다해 죽어도 트랙터는 야멸치도록 건재하다. 점점 쇠락해 가는 티베트 마을을 작가인 ‘나’의 시선으로 잔잔하게 묘사한 「아오파라 마을」은 마치 이 연작 단편들을 쓴 작가인 아라이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듯 느껴져 티베트를 바라보는 그의 애잔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런데도 가슴 한 켠을 떠나지 않는, 이 의뭉스러운 의구심. 티베트 사람들에게 아라이는 어떤 작가일까. 아라이는 “티베트는 중세 이래 수천 년 동안 생활상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대를 이어오던 생명들이 조용히 시들어갔지만 역사는 여전히 답보 상태로 있었지요. 저는 제가 행운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태어날 때 변화가 시작됐고, 그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습니다. 운 좋게도 저는 그 진행 과정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고, 동시에 관찰하고 기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한국의 독자들에게)”라고 말했다. 그는 왠지 중국이라는 타의에서 비롯된 변화를 환영하는 듯한, 좀더 비약하자면 고마워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소년은 자란다』에서도 불가피한 변화를 겪어내는 티베트 사람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분명 작가의 진심이지만, 그 변화 역시 별 비판 없이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모든 변화에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지만, 그 계기가 강제된 타의라도 그로 인한 변화가 역사적 발전일까? 지금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 사람들도 아라이에게 동의할까? 나는 중국인에게 인정받는 아라이보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라이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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