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맨스 랜드 - 청춘이 머무는 곳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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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가 시간적 배경인 소설 두 편을 연달아 읽었다.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와 에이단 체임버스의 『노 맨스 랜드』. 두 소설을 비교하는 것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독일군이 철수한 직후 이탈리아의 오래된 빌라를 현재로 이야기한다면, 『노 맨스 랜드』에는 독일군이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쟁 속에 살아야 했던 네덜란드 오스테르베크의 이야기가 과거로 포함되어 있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든, 여전히 전쟁으로 과열되어 있는 자리든, 전쟁의 상흔을 현재로 겪어내든, 과거로 추억하든 전쟁은 모든 것을 참혹하고 황폐하게 휩쓸고 ‘사람’을 앗아간다. ‘사람’을 빼앗긴 뼈아픈 자리에 희생을 정당화하는 전쟁의 대의명분은 무의미하다. 그저 전쟁이라는 괴물만 남을 뿐이다.

『노 맨스 랜드』는 그 괴물(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 아른헴 전투)에게 ‘사람’을 잃고 또 지킨 헤르트라위 할머니가 회상하는 과거 1944년과, 열일곱 영국 소년 제이콥 토드가 네덜란드에 방문한 현재가 교차되어 두 개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전쟁 중에 부상을 당한, 제이콥의 할아버지인 제이콥을 돌봐주었다는 고마운 인연 외에는 별다른 연결고리를 갖지 못한 채 별개로 진행되던 이야기 둘은 헤르트라위의 비밀스러운 인연으로 커다란 이야기 하나에 이른다. 헤르트라위의 비밀은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으니, 이 이야기에서 떠오른 몇 가지 단편적인 생각을 기록해 둔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괴물이지만, 그 괴물이 무자비하게 뿜어내는 독기 속에서도 삶은 끈질지게 이어지고 사랑은 새로 싹튼다. 그것은 신의 뜻, 자연의 섭리, 그리고 헤르트라위 할머니가 이야기하는 ‘생명 원리’다. 1944년의 젊은 청년 제이콥은 당시 아른헴 근처에 낙하산 공수부대원으로 투입됐다가 헤르트라위를 만난다. 독일군이 라인 강을 건너는 다리를 격파하지 못하도록 먼저 차지하고 지키기 위해 치렀던 아른헴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군대가 가장 쓸데없이 희생당했던 재앙 가운데 하나로 악명이 높다. 낙하산 공수부대원의 4분의 3을 잃고 나서야 영국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했는데, 이 소설에서 제이콥은 그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곧 독일군이 들이닥칠 사지에 남겨지게 된다. 그때 역시 앳된 여인이었던 헤르트라위가 용감하게 제이콥을 지켜내고 살뜰하게 보살펴준다. 전쟁 중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서로를 의지한 두 청춘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생겨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랑을 꿈꾸지 않는 것이 오히려 억지스러우리만치 부자연스럽다. 제이콥에게 영국에 두고 온 가족이 있었더라도 그들을 누가 비난할까.

이제 헤르트라위는 제이콥과 사랑을 나눈 기억을 가슴에 품은 채 할머니가 되어 안락사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비밀스레 지켜온 제이콥과의 사랑을, 제이콥의 영국 아내인 새라에게 고백하려 한다. 거짓은 영혼을 좀먹으므로. 새라 역시 제이콥과 짧게 함께한 결혼 생활에 환상적인 사랑의 베일을 씌워 지금껏 그를 추억하며 살아온 할머니다. 그런 새라에게 헤르트라위의 진실은 독이지 않을까? 나는 테셀과 같은 입장이다. 헤르트라위가 딸 테셀에게 제 혈통을 제대로 찾아주고 싶었으리라는 마음에는 공감할 수 있지만, 이제 와서 새라에게 이것이 진실이라면서 들이미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헤르트라위는 고백의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비밀을 털어놓아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겠지만,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진실이라면 굳이 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진실의 존재조차 영원히 모를 수만 있다면 거짓도, 배반감도 결코 없다. 새라의 행복한 환상을 지켜줄 책임은 헤르트라위에게 있다. 그러나 헤르트라위는 그 책임을 제이콥의 손자인 제이콥에게 넘겼다.

헤르트라위의 초대에 엉덩이 부상을 핑계로 손자를 대신 보낸 새라는 어쩌면 그 모든 것을 진작에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를 쏙 빼닮은 현재의 제이콥은 새라에게 과거의 제이콥의 분신이다. 새라는 현재의 제이콥을 보내 헤르트라위가 과거의 제이콥과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제이콥을 선물한 것이라고. (새라는 헤르트라위의 위독한 상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분명하므로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놀라운 예감과 혜안이 있지 않은가.) 헤르트라위 할머니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이콥에게 지어 보인 마지막 미소는 어찌나 그립고, 슬프고, 애틋하고, 안타깝게 다가왔는지!

제이콥의 묘사에, 체임버스는 렘브란트 반 라인이 아들 티튀스를 그린 그림인 「수도복을 입은 티튀스」를 가져온다. 제이콥이 티튀스를 닮았다면서(제이콥은 자기 외모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듯하지만 티튀스를 보면 그리 못난 얼굴도 아니다) 헤르트라위의 손자인 단이 이 그림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렘브란트와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현재 제이콥의 이야기에는 이 외에도 도시 암스테르담, 안네 프랑크, 동성애, 양성애, 이성애, 안락사 등을 비교적 비중 있게 다룬다. (사실 현재 제이콥이 암스테르담에서 지낸 짧은 기간의 이야기에는 상당한 주제들이 거의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어 제이콥을 통해 작가가 정확히 무엇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안락사에 관한 문제는 아주 예민해서 짧게 동의한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품위 있게 인간으로 죽을 권리’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는 꼭 안락사가 언급되는데(주로 안락사를 선택하게 되는 불치의, 극한의 아픔 속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체임버스의 소설은 결국 남겨지게 되는 가족의 필연적인 죄책감과 고통까지 묘사하여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화해의 날’. 이 책에서 힐레의 설명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 이날은 “우리를 해방시켜준 군인 자녀들의 날”이었다. 군인의 아이를 낳고 그 사실을 숨겼던 사람들이 처음 공개적으로 자녀들에게 털어놓았던. 참 부럽고도 멋진 날이라고 생각했다. 해방을 시켜줬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혼란스러운 전쟁통에 허락받지 못한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사실 그것이 누구에게 허락받을 일이던가?) 결코 수치스러운 죄가 아니다. 우리도 그런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참으로 부끄럽고, 그들에게 죄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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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페이션트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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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이탈리아 북부의 빌라 산 지롤라모. 한때 고풍스러운 수도원이었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독일군에게 점령됐다가 연합군의 야전병원으로 쓰인 곳. 폭탄이 곳곳에 떨어져 지붕과 벽을 허물고 독일군이 철수하면서 온통 지뢰를 묻어둔 전쟁의 폐허. 전쟁은 땅에만 포화를 퍼부어대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 휘말린 역사 속의 개인도 갈가리 찢겨 영혼 깊숙이 비극을 지뢰처럼 품게 된다. 전쟁으로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신은 전쟁조차 자연의 무성한 초록빛으로 포근하게 덮어 전쟁으로 단절된 삶을 계속 이어가도록 다독이신다.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전쟁조차 파멸할 수 없는 사랑과 의지와 치유에 관한 이야기다. 전쟁으로 삶을 잃은 네 사람이 전쟁이 아니었으면 자신과 무관했을 나라에서 인생의 가장 아픈 한순간을 공유하며 전쟁이 파고든 서로의 상흔을 봉합한다. 흐릿한 촛불의 빛 말고는 온통 어둠인 전쟁의 폐허에서 화상으로 어둠보다 더 까맣게 타버려 얼굴 윤곽조차 알아볼 수 없는 남자 알마시가 누워 있다. 그의 옆에는 제멋대로 삐죽삐죽 짧게 잘린 머리의 여자 해나가 촛불이 가닿는 빛의 작은 동그라미 안에서 책을 읽어준다. 모두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자리. 그들만 고집스레 남은 온통 지뢰밭인 이 폐허에 해나의 아버지 친구였던 카라바지오가 찾아와 그들 곁을 배회한다. 그리고 독일군이 촘촘히 설치해 둔 지뢰를 해체하라는 명령을 받은 공병 킵이 건물 바깥에 천막을 친다.

깊고 고요하고 농밀한 마이클 온다치의 문장은 시간도 공간도 시점도 꿈처럼 통과하며, 알마시와 해나와 카라바지오와 킵이 기억하는 전쟁 직전의 과거와 전쟁 이후 뼈아픈 상실의 현재를 교차시키는 데 집중한다. 해나는 영국인이라고 믿고 있지만 헝가리인인 알마시는 지독한 화상을 입고 이탈리아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며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한다. 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인 간호사로 이탈리아에까지 흘러들게 되었지만 해나는 이젠 더 이상 아버지도 없는 이곳을 떠나지 않고 알마시 곁을 지킨다. 전직 낭만적인 도둑이었고 그 재능을 발휘해 연합군 스파이로 활동하다가 두 엄지손가락까지 잃고서도 카라바지오는 캐나다로 돌아가지고 않고 과거의 친분을 이유로 해나를 찾아와 알마시의 정체를 파헤친다. ‘키르팔 싱’이 본명인 킵은 영국의 지배를 당하는 인도 사람이면서도 형 대신 영국군 공병으로 자원하여 폭탄을 해체하는 순간순간 죽음과 맞닥뜨린다.

그들은 이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신이 원래 속했던 곳도 아닌 이탈리아에서 무엇을 위해 전쟁에 휘말려 세계를 잃고 황폐하게 떡떡 갈라지는 스산한 마음만 남겼을까? 전쟁은 그들의 ‘목적’을 속이고 ‘의지’를 희롱하고 ‘세계’를 빼앗고, 그리고 미련 없이 버린다. 알마시와 해나와 카라바지오와 킵은 모두 그처럼 잔혹하게 버려진, 그래서 각자 다른 과거 위에 서 있지만 결국은 같은 현재를 공유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 사이에 미묘한 유대감이 생겨난다. 출신 국가도, 연합군도, 독일군도, 다른 과거의 시간도 무의미해진다. 그들에게 웃음이, 장난이, 애정이, 사랑이, 이해가, 치유가 마법을 부린다. 전쟁의 폐허에서 전쟁으로 깊이 상처 입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무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럼에도 숨이 남아 있는 한 다시 삶의 ‘목적’을 세우고 ‘의지’를 일으켜 ‘세계’를 구축해 나가야 하는 것은, 정말 억울한 일이지만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자기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나를 구하지 못한다.

꿈처럼 단절되어 있던 빌라 산 지롤라모를 바깥세상과 유일하게 연결해 주던 킵의 라디오가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는 소식을 전하던 날, 그들의 빌라도 킵의 분노의 불길에 휩싸이고 그들 사이에 고요히 스며들어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던 유대감도 함께 타버린다. 무수한 폭탄을 해체해 온 공병인 그도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원자폭탄 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킵의 무서운 질주로 완전한 비극을 예상했지만, 다행히 마이클 온다치는 인도에서 의사가 되어 가정을 꾸린 키르팔 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지뢰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폐허를 돌아다니던 해나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카라바지오도 킵처럼 상실의 아픔을 딛고도 삶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사막과 캐서린을 사랑한 알마시는 그의 사랑을 증거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영면했겠지.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다시 읽게 되면, 그때는 알마시에게 집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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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
페기 구겐하임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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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 구겐하임’은 굳이 현대미술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서양 그림들 사이를 헤매다 보면 필연코 만나게 되는 이름이다. 나는 맨 레이의 아름다운 사진(「Peggy Guggenheim」, Man Ray, 1924) 속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몸을 살짝 비튼 채 고개를 돌려 정면을 강렬하게 쏘아보는 고혹적인 여인. 그리고 이 여인을 메리 V. 디어본의 평전 『페기 구겐하임』(번역본)의 표지에서 다시 맞닥뜨렸다. 동일한 사진은 아니었지만 좀더 신비스러울 뿐 옷, 모자, 귀고리, 팔찌, 배경, 바둑판 타일이 전부 같은 날에 찍은 것임을 알려준다.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에는 현대미술의 소소한 풍경 속에서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멋진 독립적인 여성이 주체적으로 우뚝 서 있다.

페기 구겐하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녀는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베네치아 분관, 페기는 삼촌 솔로몬 구겐하임이 설립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자신의 모든 수집품을 기증했다. 페기가 생전에 미술관으로 개조한 베네치아 운하 변의 궁전 ‘팔라초 베니에르 데이 레오니’는 현재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되고 있다)에 전시되어 있는 어마어마한 작품들의 주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현대미술품들의 진가를 알아보고 아낌없이 사들이고 진실로 사랑했던 “미술 중독자”였다.

그렇다면 페기는 현대미술에 얼마나 중독되어 있었을까? 그녀는 현대미술에 매혹되기 시작하면서 ‘하루에 한 점씩!’ 사들였다. 요즘 그림이 재테크에 이용될 만큼 고가임을 감안하면(페기의 수집 시절에는 예술이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바로 직전이었다지만 책 한 권의 가격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입이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시쳇말로 유태인 부호의 집안에서 ‘입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페기의 미술 중독은 분명 세습된 부의 덕을 톡톡히 봤다. 하지만 페기처럼 미술에 중독될 수 있는 행운은 누구나 누리는 것이 아니라고 그녀의 컬렉션을 단지 부자의 호사스러운 취미, 고상한 사업쯤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미술에 관심을 가진 구겐하임 집안의 솔로몬과 페기를 비교해 보면, 현대미술에 대한 페기의 애정이 얼마나 순수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솔로몬은 막대한 부를 이용해 자신의 큐레이터를 따로 고용하여 미술품 수집을 전적으로 맡겨두었다. 그것도 작품의 값어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걸작들만 사들여 재산 목록에 추가했다. 그러나 페기는 자신의 재력을 최소한 유지하거나 불리는 데 몰두하지 않고 20세기 현대미술의 골목길들을 열정적으로 기웃거리며 ‘모험’을 즐겼다. 페기가 기꺼이 사들였던 작품들은 당시만 해도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것들이 다수였다. 자족적으로 작품만 수집했을까. 페기는 런던에 ‘구겐하임 죈’ 화랑을, 뉴욕에 ‘금세기 화랑’을 열어, 지금은 그 이름만으로도 주눅 드는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구상해 현대미술을 알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유럽의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경비를 대어 뉴욕이 예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급부상하는 데 일조했으며, 가난한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잭슨 폴록과의 인연은 너무나 유명하다. 페기의 감식안도 남달랐겠지만 그녀는 그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예술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아낌없이 자기 재산을 그야말로 쏟아부었다. 물론 그 재력은 그처럼 탕진하고도 완전히 마르지는 않아 페기는 생전에 늘 부유하긴 했나 보다. 아, 미치도록 부럽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부러운 것은 페기가 일상적으로 교류했던 사람들이다! 현대미술사를 읽다 보면 자주 마주치게 되는 익숙한 이름들이 줄줄이 엮여 나온다. 예술계는 서로 통한다고 문학가들도 즐비하게 등장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조카이자 베르트 모리조의 딸인 줄리 마네의 일기(『인상주의, 빛나는 색채의 나날들』)나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자서전(『파리의 화상 볼라르』)을 읽으면서 느꼈던 질투는 고스란히 페기를 향했다. 마르셀 뒤샹이 현대미술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 주고, 이브 탕기와 알렉산더 콜더가 페기를 위해 귀고리를 만들어주고, 제임스 조이스의 생일 디너파티에 참석하고, 사무엘 베케트와 연인으로 사랑한다. 자신의 작품과 사랑에 빠진 콘스탄틴 브란쿠시의 모습은 인상적이었고, 세 번째 남편이었던 막스 에른스트와의 일화는 무척 재미있었다. 페기와의 결혼 생활 내내 한 번도 생활비를 낸 적이 없다는 에른스트는 이혼 후 페기가 사랑하던 개, 라사 테리어를 데려가버렸다. 물론 에른스트가 너무나 귀여워하여 선물로 주긴 했지만, 그 강아지까지 돈을 받고 페기에게 팔았다는 것은 그가 좀 좀스러워 보인다. 이 부분이 어찌나 웃기던지, 페기는 꽤 섭섭했을 텐데. 원서 표지의 강아지들이 에른스트에게 산 라사 테리어와 그 새끼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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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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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라는 것도 역시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모여 이룬 집단이기 때문에 사람과 다를 바 없어서 오랜 시간 내려온 트라우마나 관습은 그저 드러내지 않거나 감추어 두고 있을 뿐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종교적 갈등이거나 권력과 부에 대한 쏠림, 인종적 차별이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트라우마가 이념에 관한 것이 가장 크다면 인도는 계급제도에 대한 것이 가장 크다. 사실 계급제도라는 것은 세계 어떤 나라에도 존재했다. 아니 현재도 권력이나 돈이라는 이름으로 나뉜 계급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계급제 사회를 이야기할 때 인도를 우선 떠올리게 되는 것은 카스트제도라는 이름이 근대까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도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아리안족이 인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카스트 제도는 크게 넷으로 나누어진다.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무사, 귀족), 바이샤(서민), 수드라(노비)로 나뉜다. 그리고 이들 카스트제도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을 일컬어 달리트(불가촉천민)이라고 하는데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은 불가촉천민과 다른 계급들의 이야기, 즉 인도 자체의 이야기다.

공식적이기는 하지만 카스트제도가 폐지된 인도에서 하급 계층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돈을 버는 방법 뿐이다. 불가촉천민이며 재봉일을 배운 이시바 다르지와 조카인 옴프라가시를 기차 안에서 만나 향하는 곳은 디나의 하숙집이다. 대학생인 마넥은 기숙사 선배들의 괴롭힘과 더러움 때문에 어머니의 고등학교 동창인 디나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된다. 디나 달랄은 사랑하는 남편을 신혼 초에 잃고 살아가기 위해 하숙을 하고 불가촉천민인 재봉사를 고용해 일을 시작한다. 이들 넷은 서로 다른 계급이면서도 서로를 알아가며 행복과 희망을 느끼게 된다. 인도가 나아가야 할 모습처럼 보이는 이 집의 행복은 얼마 가지 못해 깨지게 된다. 현실은 비참했고 권력자들과 상위 계층은 불가촉천민의 희망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불가촉천민이 생각하는 적절한 균형이 계급에 상관 없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면 상위 계급이 원하는 적절한 균형은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하위계층을 짓밟고 영원히 계급제도의 상위계층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외국으로 일을 하러 나갔다가 돌아온 마넥의 눈에 비친 1984년 인도의 모습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지독히 절망적인 것이었다.

삶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망만큼의 희망이 존재해야 하는 법, 선을 그은 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우거나 뛰어 넘으려는 노력이 있을 때 희망의 불씨가 보일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의 막막함은 희망을 짓밟힌 사람들이 결국 그 비참한 현실에 순응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안타깝다. 여전히 희망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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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홈즈걸 1 -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 명탐정 홈즈걸 1
오사키 고즈에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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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일본에서 번역되는 추리소설의 다양함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대작이나 히트작 위주로 소개되는 서양 쪽의 작품과는 달리 일본 쪽의 이야기들은 의외로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번역되곤 한다. 유행이 한참 지나 버린 듯한 하위장르의 다양한 추리소설이 쓰여지고 읽혀지고 있는데 이는 오랜 추리소설 역사 덕분이기도 하고 소비층이 넓다는 것도 있어서인지 전통적인 탐정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 사회파, 하드보일드, 코지 계열 같은 작품들도 꾸준히 등장한다. 장르식 구분 뿐 아니라 내용의 다양성에서도 그 범위는 매우 넓은데 이 오사키 고즈에의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 역시 독특한 이야기다. 굳이 장르별로 구분하자면 코지 미스터리 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코지 미스터리의 특징처럼 굉장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게다가 이야기의 주 무대는 세후도라는 서점이고 그 곳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이야기가 중심이니 ‘일상 속의 미스터리’라는 말이 이처럼 어울릴 수 있을까. 게다가 호흡이 짧은 단편으로 구성되어 부담 없이 읽기 적당하다. 작가 오사키 고즈에는 자신이 서점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서점과 책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세후도 서점 사건 메모’라는 세 권의 시리즈로 맛깔 나게 만들어 냈다.

서점이라면 당연히 책이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을 터 모든 사건들은 책과 관련되어 발생한다. 책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고 책 때문에 사건이 또 해결된다. 물론 사건이 발생하면 이를 해결하는 탐정이 등장해야 하는 법. 물론 이 이야기에도 탐정이 등장하는데 아무리 봐도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책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6년차의 베테랑 직원 쿄코와 번뜩이는 지혜로 사건을 꿰뚫어 보는 아르바이트 직원인 다에는 제목의 홈즈걸이라는 애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왓슨과 홈즈처럼 전통적인 조언자와 탐정 관계다. 세후도 서점에서 발생하는 사건들 역시 소소하지만 여러 가지 사건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 단편인 [판다는 속삭인다]에서는 한 노인이 알려준 책에 관련된 암호를 해결하는 것을 시작으로 책과 관련된 사랑의 이야기, 그리고 책과 서점 직원과 디스플레이에 얽힌 이야기 등, 서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책과 사람에 관련된 이야기 등이 다섯 단편 속에 들어 있다.

역시 서점에서 일했던 작가답게 이야기 속에서도 온갖 책들이 등장한다. 가상의 책도 있다고 하는데 꽤나 낯익은 작가의 작품들도 많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 서점의 분위기도 사실감 있게 전해주고 있다. 두 번째로 출간된 『명탐정 홈즈걸의 사라진 원고지』는 시리즈 유일한 장편으로 27년 전의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콤비의 활약을 그린 이야기로 기대가 된다. 마음 편하게 읽을 만한 추리소설을 찾는 독자들에게는 최상의 선택이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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