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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페이션트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이탈리아 북부의 빌라 산 지롤라모. 한때 고풍스러운 수도원이었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독일군에게 점령됐다가 연합군의 야전병원으로 쓰인 곳. 폭탄이 곳곳에 떨어져 지붕과 벽을 허물고 독일군이 철수하면서 온통 지뢰를 묻어둔 전쟁의 폐허. 전쟁은 땅에만 포화를 퍼부어대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 휘말린 역사 속의 개인도 갈가리 찢겨 영혼 깊숙이 비극을 지뢰처럼 품게 된다. 전쟁으로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신은 전쟁조차 자연의 무성한 초록빛으로 포근하게 덮어 전쟁으로 단절된 삶을 계속 이어가도록 다독이신다.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전쟁조차 파멸할 수 없는 사랑과 의지와 치유에 관한 이야기다. 전쟁으로 삶을 잃은 네 사람이 전쟁이 아니었으면 자신과 무관했을 나라에서 인생의 가장 아픈 한순간을 공유하며 전쟁이 파고든 서로의 상흔을 봉합한다. 흐릿한 촛불의 빛 말고는 온통 어둠인 전쟁의 폐허에서 화상으로 어둠보다 더 까맣게 타버려 얼굴 윤곽조차 알아볼 수 없는 남자 알마시가 누워 있다. 그의 옆에는 제멋대로 삐죽삐죽 짧게 잘린 머리의 여자 해나가 촛불이 가닿는 빛의 작은 동그라미 안에서 책을 읽어준다. 모두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자리. 그들만 고집스레 남은 온통 지뢰밭인 이 폐허에 해나의 아버지 친구였던 카라바지오가 찾아와 그들 곁을 배회한다. 그리고 독일군이 촘촘히 설치해 둔 지뢰를 해체하라는 명령을 받은 공병 킵이 건물 바깥에 천막을 친다.
깊고 고요하고 농밀한 마이클 온다치의 문장은 시간도 공간도 시점도 꿈처럼 통과하며, 알마시와 해나와 카라바지오와 킵이 기억하는 전쟁 직전의 과거와 전쟁 이후 뼈아픈 상실의 현재를 교차시키는 데 집중한다. 해나는 영국인이라고 믿고 있지만 헝가리인인 알마시는 지독한 화상을 입고 이탈리아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며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한다. 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인 간호사로 이탈리아에까지 흘러들게 되었지만 해나는 이젠 더 이상 아버지도 없는 이곳을 떠나지 않고 알마시 곁을 지킨다. 전직 낭만적인 도둑이었고 그 재능을 발휘해 연합군 스파이로 활동하다가 두 엄지손가락까지 잃고서도 카라바지오는 캐나다로 돌아가지고 않고 과거의 친분을 이유로 해나를 찾아와 알마시의 정체를 파헤친다. ‘키르팔 싱’이 본명인 킵은 영국의 지배를 당하는 인도 사람이면서도 형 대신 영국군 공병으로 자원하여 폭탄을 해체하는 순간순간 죽음과 맞닥뜨린다.
그들은 이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신이 원래 속했던 곳도 아닌 이탈리아에서 무엇을 위해 전쟁에 휘말려 세계를 잃고 황폐하게 떡떡 갈라지는 스산한 마음만 남겼을까? 전쟁은 그들의 ‘목적’을 속이고 ‘의지’를 희롱하고 ‘세계’를 빼앗고, 그리고 미련 없이 버린다. 알마시와 해나와 카라바지오와 킵은 모두 그처럼 잔혹하게 버려진, 그래서 각자 다른 과거 위에 서 있지만 결국은 같은 현재를 공유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 사이에 미묘한 유대감이 생겨난다. 출신 국가도, 연합군도, 독일군도, 다른 과거의 시간도 무의미해진다. 그들에게 웃음이, 장난이, 애정이, 사랑이, 이해가, 치유가 마법을 부린다. 전쟁의 폐허에서 전쟁으로 깊이 상처 입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무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럼에도 숨이 남아 있는 한 다시 삶의 ‘목적’을 세우고 ‘의지’를 일으켜 ‘세계’를 구축해 나가야 하는 것은, 정말 억울한 일이지만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자기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나를 구하지 못한다.
꿈처럼 단절되어 있던 빌라 산 지롤라모를 바깥세상과 유일하게 연결해 주던 킵의 라디오가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는 소식을 전하던 날, 그들의 빌라도 킵의 분노의 불길에 휩싸이고 그들 사이에 고요히 스며들어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던 유대감도 함께 타버린다. 무수한 폭탄을 해체해 온 공병인 그도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원자폭탄 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킵의 무서운 질주로 완전한 비극을 예상했지만, 다행히 마이클 온다치는 인도에서 의사가 되어 가정을 꾸린 키르팔 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지뢰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폐허를 돌아다니던 해나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카라바지오도 킵처럼 상실의 아픔을 딛고도 삶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사막과 캐서린을 사랑한 알마시는 그의 사랑을 증거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영면했겠지.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다시 읽게 되면, 그때는 알마시에게 집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