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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 ㅣ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국가라는 것도 역시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모여 이룬 집단이기 때문에 사람과 다를 바 없어서 오랜 시간 내려온 트라우마나 관습은 그저 드러내지 않거나 감추어 두고 있을 뿐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종교적 갈등이거나 권력과 부에 대한 쏠림, 인종적 차별이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트라우마가 이념에 관한 것이 가장 크다면 인도는 계급제도에 대한 것이 가장 크다. 사실 계급제도라는 것은 세계 어떤 나라에도 존재했다. 아니 현재도 권력이나 돈이라는 이름으로 나뉜 계급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계급제 사회를 이야기할 때 인도를 우선 떠올리게 되는 것은 카스트제도라는 이름이 근대까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도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아리안족이 인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카스트 제도는 크게 넷으로 나누어진다.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무사, 귀족), 바이샤(서민), 수드라(노비)로 나뉜다. 그리고 이들 카스트제도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을 일컬어 달리트(불가촉천민)이라고 하는데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은 불가촉천민과 다른 계급들의 이야기, 즉 인도 자체의 이야기다.
공식적이기는 하지만 카스트제도가 폐지된 인도에서 하급 계층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돈을 버는 방법 뿐이다. 불가촉천민이며 재봉일을 배운 이시바 다르지와 조카인 옴프라가시를 기차 안에서 만나 향하는 곳은 디나의 하숙집이다. 대학생인 마넥은 기숙사 선배들의 괴롭힘과 더러움 때문에 어머니의 고등학교 동창인 디나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된다. 디나 달랄은 사랑하는 남편을 신혼 초에 잃고 살아가기 위해 하숙을 하고 불가촉천민인 재봉사를 고용해 일을 시작한다. 이들 넷은 서로 다른 계급이면서도 서로를 알아가며 행복과 희망을 느끼게 된다. 인도가 나아가야 할 모습처럼 보이는 이 집의 행복은 얼마 가지 못해 깨지게 된다. 현실은 비참했고 권력자들과 상위 계층은 불가촉천민의 희망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불가촉천민이 생각하는 적절한 균형이 계급에 상관 없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면 상위 계급이 원하는 적절한 균형은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하위계층을 짓밟고 영원히 계급제도의 상위계층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외국으로 일을 하러 나갔다가 돌아온 마넥의 눈에 비친 1984년 인도의 모습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지독히 절망적인 것이었다.
삶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망만큼의 희망이 존재해야 하는 법, 선을 그은 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우거나 뛰어 넘으려는 노력이 있을 때 희망의 불씨가 보일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의 막막함은 희망을 짓밟힌 사람들이 결국 그 비참한 현실에 순응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안타깝다. 여전히 희망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