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
페기 구겐하임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페기 구겐하임’은 굳이 현대미술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서양 그림들 사이를 헤매다 보면 필연코 만나게 되는 이름이다. 나는 맨 레이의 아름다운 사진(「Peggy Guggenheim」, Man Ray, 1924) 속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몸을 살짝 비튼 채 고개를 돌려 정면을 강렬하게 쏘아보는 고혹적인 여인. 그리고 이 여인을 메리 V. 디어본의 평전 『페기 구겐하임』(번역본)의 표지에서 다시 맞닥뜨렸다. 동일한 사진은 아니었지만 좀더 신비스러울 뿐 옷, 모자, 귀고리, 팔찌, 배경, 바둑판 타일이 전부 같은 날에 찍은 것임을 알려준다.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에는 현대미술의 소소한 풍경 속에서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멋진 독립적인 여성이 주체적으로 우뚝 서 있다.

페기 구겐하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녀는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베네치아 분관, 페기는 삼촌 솔로몬 구겐하임이 설립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자신의 모든 수집품을 기증했다. 페기가 생전에 미술관으로 개조한 베네치아 운하 변의 궁전 ‘팔라초 베니에르 데이 레오니’는 현재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되고 있다)에 전시되어 있는 어마어마한 작품들의 주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현대미술품들의 진가를 알아보고 아낌없이 사들이고 진실로 사랑했던 “미술 중독자”였다.

그렇다면 페기는 현대미술에 얼마나 중독되어 있었을까? 그녀는 현대미술에 매혹되기 시작하면서 ‘하루에 한 점씩!’ 사들였다. 요즘 그림이 재테크에 이용될 만큼 고가임을 감안하면(페기의 수집 시절에는 예술이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바로 직전이었다지만 책 한 권의 가격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입이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시쳇말로 유태인 부호의 집안에서 ‘입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페기의 미술 중독은 분명 세습된 부의 덕을 톡톡히 봤다. 하지만 페기처럼 미술에 중독될 수 있는 행운은 누구나 누리는 것이 아니라고 그녀의 컬렉션을 단지 부자의 호사스러운 취미, 고상한 사업쯤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미술에 관심을 가진 구겐하임 집안의 솔로몬과 페기를 비교해 보면, 현대미술에 대한 페기의 애정이 얼마나 순수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솔로몬은 막대한 부를 이용해 자신의 큐레이터를 따로 고용하여 미술품 수집을 전적으로 맡겨두었다. 그것도 작품의 값어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걸작들만 사들여 재산 목록에 추가했다. 그러나 페기는 자신의 재력을 최소한 유지하거나 불리는 데 몰두하지 않고 20세기 현대미술의 골목길들을 열정적으로 기웃거리며 ‘모험’을 즐겼다. 페기가 기꺼이 사들였던 작품들은 당시만 해도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것들이 다수였다. 자족적으로 작품만 수집했을까. 페기는 런던에 ‘구겐하임 죈’ 화랑을, 뉴욕에 ‘금세기 화랑’을 열어, 지금은 그 이름만으로도 주눅 드는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구상해 현대미술을 알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유럽의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경비를 대어 뉴욕이 예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급부상하는 데 일조했으며, 가난한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잭슨 폴록과의 인연은 너무나 유명하다. 페기의 감식안도 남달랐겠지만 그녀는 그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예술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아낌없이 자기 재산을 그야말로 쏟아부었다. 물론 그 재력은 그처럼 탕진하고도 완전히 마르지는 않아 페기는 생전에 늘 부유하긴 했나 보다. 아, 미치도록 부럽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부러운 것은 페기가 일상적으로 교류했던 사람들이다! 현대미술사를 읽다 보면 자주 마주치게 되는 익숙한 이름들이 줄줄이 엮여 나온다. 예술계는 서로 통한다고 문학가들도 즐비하게 등장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조카이자 베르트 모리조의 딸인 줄리 마네의 일기(『인상주의, 빛나는 색채의 나날들』)나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자서전(『파리의 화상 볼라르』)을 읽으면서 느꼈던 질투는 고스란히 페기를 향했다. 마르셀 뒤샹이 현대미술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 주고, 이브 탕기와 알렉산더 콜더가 페기를 위해 귀고리를 만들어주고, 제임스 조이스의 생일 디너파티에 참석하고, 사무엘 베케트와 연인으로 사랑한다. 자신의 작품과 사랑에 빠진 콘스탄틴 브란쿠시의 모습은 인상적이었고, 세 번째 남편이었던 막스 에른스트와의 일화는 무척 재미있었다. 페기와의 결혼 생활 내내 한 번도 생활비를 낸 적이 없다는 에른스트는 이혼 후 페기가 사랑하던 개, 라사 테리어를 데려가버렸다. 물론 에른스트가 너무나 귀여워하여 선물로 주긴 했지만, 그 강아지까지 돈을 받고 페기에게 팔았다는 것은 그가 좀 좀스러워 보인다. 이 부분이 어찌나 웃기던지, 페기는 꽤 섭섭했을 텐데. 원서 표지의 강아지들이 에른스트에게 산 라사 테리어와 그 새끼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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