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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맨스 랜드 - 청춘이 머무는 곳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10년 1월
평점 :
공교롭게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가 시간적 배경인 소설 두 편을 연달아 읽었다.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와 에이단 체임버스의 『노 맨스 랜드』. 두 소설을 비교하는 것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독일군이 철수한 직후 이탈리아의 오래된 빌라를 현재로 이야기한다면, 『노 맨스 랜드』에는 독일군이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쟁 속에 살아야 했던 네덜란드 오스테르베크의 이야기가 과거로 포함되어 있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든, 여전히 전쟁으로 과열되어 있는 자리든, 전쟁의 상흔을 현재로 겪어내든, 과거로 추억하든 전쟁은 모든 것을 참혹하고 황폐하게 휩쓸고 ‘사람’을 앗아간다. ‘사람’을 빼앗긴 뼈아픈 자리에 희생을 정당화하는 전쟁의 대의명분은 무의미하다. 그저 전쟁이라는 괴물만 남을 뿐이다.
『노 맨스 랜드』는 그 괴물(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 아른헴 전투)에게 ‘사람’을 잃고 또 지킨 헤르트라위 할머니가 회상하는 과거 1944년과, 열일곱 영국 소년 제이콥 토드가 네덜란드에 방문한 현재가 교차되어 두 개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전쟁 중에 부상을 당한, 제이콥의 할아버지인 제이콥을 돌봐주었다는 고마운 인연 외에는 별다른 연결고리를 갖지 못한 채 별개로 진행되던 이야기 둘은 헤르트라위의 비밀스러운 인연으로 커다란 이야기 하나에 이른다. 헤르트라위의 비밀은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으니, 이 이야기에서 떠오른 몇 가지 단편적인 생각을 기록해 둔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괴물이지만, 그 괴물이 무자비하게 뿜어내는 독기 속에서도 삶은 끈질지게 이어지고 사랑은 새로 싹튼다. 그것은 신의 뜻, 자연의 섭리, 그리고 헤르트라위 할머니가 이야기하는 ‘생명 원리’다. 1944년의 젊은 청년 제이콥은 당시 아른헴 근처에 낙하산 공수부대원으로 투입됐다가 헤르트라위를 만난다. 독일군이 라인 강을 건너는 다리를 격파하지 못하도록 먼저 차지하고 지키기 위해 치렀던 아른헴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군대가 가장 쓸데없이 희생당했던 재앙 가운데 하나로 악명이 높다. 낙하산 공수부대원의 4분의 3을 잃고 나서야 영국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했는데, 이 소설에서 제이콥은 그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곧 독일군이 들이닥칠 사지에 남겨지게 된다. 그때 역시 앳된 여인이었던 헤르트라위가 용감하게 제이콥을 지켜내고 살뜰하게 보살펴준다. 전쟁 중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서로를 의지한 두 청춘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생겨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랑을 꿈꾸지 않는 것이 오히려 억지스러우리만치 부자연스럽다. 제이콥에게 영국에 두고 온 가족이 있었더라도 그들을 누가 비난할까.
이제 헤르트라위는 제이콥과 사랑을 나눈 기억을 가슴에 품은 채 할머니가 되어 안락사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비밀스레 지켜온 제이콥과의 사랑을, 제이콥의 영국 아내인 새라에게 고백하려 한다. 거짓은 영혼을 좀먹으므로. 새라 역시 제이콥과 짧게 함께한 결혼 생활에 환상적인 사랑의 베일을 씌워 지금껏 그를 추억하며 살아온 할머니다. 그런 새라에게 헤르트라위의 진실은 독이지 않을까? 나는 테셀과 같은 입장이다. 헤르트라위가 딸 테셀에게 제 혈통을 제대로 찾아주고 싶었으리라는 마음에는 공감할 수 있지만, 이제 와서 새라에게 이것이 진실이라면서 들이미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헤르트라위는 고백의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비밀을 털어놓아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겠지만,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진실이라면 굳이 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진실의 존재조차 영원히 모를 수만 있다면 거짓도, 배반감도 결코 없다. 새라의 행복한 환상을 지켜줄 책임은 헤르트라위에게 있다. 그러나 헤르트라위는 그 책임을 제이콥의 손자인 제이콥에게 넘겼다.
헤르트라위의 초대에 엉덩이 부상을 핑계로 손자를 대신 보낸 새라는 어쩌면 그 모든 것을 진작에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를 쏙 빼닮은 현재의 제이콥은 새라에게 과거의 제이콥의 분신이다. 새라는 현재의 제이콥을 보내 헤르트라위가 과거의 제이콥과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제이콥을 선물한 것이라고. (새라는 헤르트라위의 위독한 상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분명하므로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놀라운 예감과 혜안이 있지 않은가.) 헤르트라위 할머니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이콥에게 지어 보인 마지막 미소는 어찌나 그립고, 슬프고, 애틋하고, 안타깝게 다가왔는지!
제이콥의 묘사에, 체임버스는 렘브란트 반 라인이 아들 티튀스를 그린 그림인 「수도복을 입은 티튀스」를 가져온다. 제이콥이 티튀스를 닮았다면서(제이콥은 자기 외모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듯하지만 티튀스를 보면 그리 못난 얼굴도 아니다) 헤르트라위의 손자인 단이 이 그림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렘브란트와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현재 제이콥의 이야기에는 이 외에도 도시 암스테르담, 안네 프랑크, 동성애, 양성애, 이성애, 안락사 등을 비교적 비중 있게 다룬다. (사실 현재 제이콥이 암스테르담에서 지낸 짧은 기간의 이야기에는 상당한 주제들이 거의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어 제이콥을 통해 작가가 정확히 무엇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안락사에 관한 문제는 아주 예민해서 짧게 동의한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품위 있게 인간으로 죽을 권리’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는 꼭 안락사가 언급되는데(주로 안락사를 선택하게 되는 불치의, 극한의 아픔 속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체임버스의 소설은 결국 남겨지게 되는 가족의 필연적인 죄책감과 고통까지 묘사하여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화해의 날’. 이 책에서 힐레의 설명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 이날은 “우리를 해방시켜준 군인 자녀들의 날”이었다. 군인의 아이를 낳고 그 사실을 숨겼던 사람들이 처음 공개적으로 자녀들에게 털어놓았던. 참 부럽고도 멋진 날이라고 생각했다. 해방을 시켜줬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혼란스러운 전쟁통에 허락받지 못한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사실 그것이 누구에게 허락받을 일이던가?) 결코 수치스러운 죄가 아니다. 우리도 그런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참으로 부끄럽고, 그들에게 죄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