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
닉 혼비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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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찮게도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홀든 콜필드의 유머스러운 성장기는 바로 이 책인 닉 혼비의 『슬램』의 주인공인 샘의 성장기와 겹쳐 보인다. 책의 제목인 ‘slam’은 보드에서 떨어지는 소리를 의미한다. 미국의 코믹스를 보면 떨어져 부딪히는 장면에서 원색의 글씨로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말로 한다면 쿵! 정도가 비슷한 표현일 듯싶다. 인생에서의 슬램은 말할 것도 없이 큰 난관이나 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열여섯 살의 말 그대로의 소년에게 인생의 슬램은 어떤 것일까. 무미건조하게 열여섯을 살아온 한 사람으로 샘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열여섯의 샘 존스는 수학을 싫어하고 미술에 약간 소질이 있지만 여자에 대해서는 숙맥인 지극히 평범한 소년이다. 다만 샘의 어머니는 열여섯에 샘을 낳았고 결국 샘 역시 운명의 나이를 맞이한 것, 에어 조던을 우상으로 삼았던 학창시절 몇몇 친구들처럼 샘은 전설적인 프로 스케이트 보더인 토니 호크가 우상이다. 열여섯의 샘은 자신만은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한다. 대대로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참여하지 못한 가족들과 달리 대학에도 진학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하지만 어디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던가. 어느 날 파티에서 아름다운 앨리시아라는 여자애를 만나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토니 호크 대신 앨리시아가 샘의 마음속에 들어온 것이다. 둘은 연인이 되고 그럭저럭 행복하다고 느껴질 때, 그 행복마저 평범한 것이 되어 앨리시아에게도 싫증이 나려 할 때 임신 소식을 듣게 된다. SLAM!

인생의 슬램은 어느 순간에 예고 없이 찾아온다. 아름답게 허공에 떠 있던 프로 스케이트 보더라도 삐끗하면 바닥에 충돌하게 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바닥과 충돌하는 것. 하지만 보딩도 인생도 그것이 끝이 아니다. 다시 일어나 시합을 계속하고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진부한 이야기지만 슬램을 마주하고 이겨낸다면 그것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토니 호크는 전설이 되기 위해 얼마나 미끄러지고 바닥에 처박혔을까. 샘에게는 앨리시아의 임신과 샘 자신의 역할에 대한 공포가 바로 슬램이었다. 자신의 우상의 사진과 대화하며 희망을 꿈꾸던 열여섯 소년에게 다가온 현실의 아버지와 남편의 역할은 말 그대로 공포였을 터, 헤이스팅스로 도피를 택한 것 역시 충분히 이해가 간다. 결국 샘이 내린 결론은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라는 것이었다. 샘은 이렇게 스케이트보드를 사는 것처럼 넘어지고 처박히고 다시 일어나면서 성장해 간다. 닉 혼비의 『슬램』은 샘의 이야기를  어른스러운 시각 없이 열여섯 그대로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려 냈다. 자칫 한없이 우울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닉 혼비 특유의 유쾌함으로 풀어 낸 것은 그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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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바람난 여자
아니 프랑수아 지음, 이상해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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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죽이 잘 맞는 친구와 엉덩이가 아픈 줄도 모른 채 오랫동안 수다를 떨고 난 것 같다. 서로의 이야기에 열렬히 호응하거나, 아무리 마음이 통해도 의외로 다른 점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그 뜻밖의 모습까지 포용하는 대화 후의 흡족함. 하지만 아니 프랑수아의 『책과 바람난 여자』 마지막 책장마저 덮었다. 아직 엉덩이가 아프지도 않은데!

이 책의 원제는 ‘Bouquiner’로, 이 단어는 ‘책과 교미하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책과의 섹스’ 정도의 관능적인 의미일까 싶어서 심장이 콩닥거렸는데 불영사전에는 ‘familiar to read’로 무난하게 뜻풀이되어 있다. 어쨌든 아니 프랑수아는 책 자체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참 좋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책의 내용에 집중하기보다 책과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따라붙기 마련인, 혹은 집착하게 되기 마련인 소소한 것들과 사소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이 바로 이 사랑스러운 책의 매력이다. 번역본의 부제에는 ‘부작용’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책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그조차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증표’다. 대놓고 그에 대한 불평을(하지만 조금은 뿌듯함도 느껴지는) 늘어놓는다고 해도 말이다. 적어도 그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정혜윤의 『침대와 책』이라는 책도 있지만, 침대와 책은 정말 불가분의 관계인가 보다. 그녀도 침대에서, 그것도 누워서 책을 읽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나도 집에서 책을 읽을 때는 침대부터 찾는다. 커다란 베개를 등 뒤에 받치고 상체만 살짝 세운 채 이불을 끌어당기고 배와 가슴 사이에 쿠션 하나를 올려 책을 받친다. 이런 자세는 너무나 편안하고 따뜻해서 시간을 가리지 않고 금세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그녀는 ‘잠의 열차’를 고의적으로 놓친다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빠져드는 달콤한 잠도 독서의 고물이다. 책 읽을 시간을 그만큼 앗아가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들다 보니 뒷목과 어깨가 수시로 결린다. 그녀는 ‘독서광 일반 병리학’이라는 제목 아래 책 때문에 유발되는 병명들을 늘어놓는다. 척추 변형(무거운 책이 든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니느라), 경부 관절통(책을 들여다보느라), 팔꿈치의 못이나 접촉성 피부병(책을 읽으려면 팔꿈치를 어딘가에 괴게 마련이므로), 청력 저하, 혹은 일시적 후각상실증(책에 정신 팔려서), 시력 저하(두말하면 잔소리!), 변덕(이 책에서 저 책으로 옮겨 갈 때 도무지 맥락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요즘은 맥락을 가지고 독서하는 사람이 많지만 내 경우에는 딱!), 그리고 기억상실증! 다른 병들을 이야기할 때는 사실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억상실증’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아무리 몰두했더라도 다음 책으로 넘어가 열중하고 있으면 바로 전에 읽은 책도 가물가물하다. 인물의 이름은 물론 자세한 줄거리, 심지어 가끔은 제목까지! 뭔가를 읽기는 했다는 기억만 남아 있을 뿐.

그리고 그녀처럼 책에 관해서라면 팔랑귀가 되어버리고 만다. 누가 책 이야기를 하면 귀를 활짝 열고 본능적으로 기억해 둔다. 그가 그 책에 대해 열정적으로 극찬하면 나는 그 미끼를 덥석 물고 일단 그 책을 구해 놔야 안심이 된다. ‘(책) 빌리기’와 ‘공공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사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읽는(혹은 읽을) 책은 모두 내 소유로 들인다. 그녀도 동의하는, 빌린 책의 불편한 신성함으로 인해 내 마음이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도 돈과 공간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책은 내 물욕의 극치다. 아무리 책을 사들여도 여전히 사고 싶은 책은 넘치고 돈은 턱없이 모자란다. 책값은 물론 책을 보관할 공간을 마련할 비용도. 당연히 집안 곳곳에 쌓여가는 책 더미들 때문에 깨끗한 인테리어는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그녀는 말한다. “점점 더 넓은, 하지만 점점 더 가난한 동네에 있는, 나중에는 교외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슬프지만, 그럼에도 책을 향한 물욕은 언제나 허기진다.

이 물욕 때문에 나는 결코 그와 결별하지 못할 것이다. ‘중복’에서 그녀가 지금은 아무리 사랑해도 언제 남편과 헤어질지 모르므로 “헤어질 경우 책을 나누는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일이 없도록” 두 권씩 샀다는 이야기를 할 때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이 문제로 그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만약 우리가 헤어진다면 책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하지만 그도 나도 단 한 권도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우리는 결국 최대한 함께 살기로 결론지었다. 책 덕분에.

이외에도 출판사에서 30년을 일한 베테랑 편집자답게 띠지(“성가시긴 하지만 버리기가 영 찜찜하다.” 예전에는 띠지를 가차 없이 벗겨냈지만, 이젠 편집자가 그 띠지의 자극적인 문구를 쓰느라 얼마나 골머리를 앓는지 잘 알고, 게다가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면 엄청나게 촌스러워서 코미디가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다시 띠지를 둘러둔다.), 바코드(“책은 결코 상품이 될 수 없다. 관리 시스템의 승리를 과시하는 그 우스꽝스러운 쇠스랑 자국을 보면 나는 분통부터 터진다. 그 창살들 뒤에서 보기 흉한 음모가 펼쳐진다. 향수나 기저귀에도 바코드는 있지만 그것은 포장지에 있다. 그런데 책에는 직접 새겨져 있다. 생살에, 낙인처럼.”)같이 책의 외형에 관한 이야기도 풍부하다. 충분히 공감할 만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앞에서 ‘소소한 것들과 사소한 일들’이라는 말을 했지만, 아니 프랑수아가 쏟아놓는 이야기들은 책을 탐닉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소소하지도, 사소하지도 않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다른 무엇보다 중대한 문제라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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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즌 트릭
엔도 다케후미 지음, 김소영 옮김 / 살림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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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일본을 보면 부럽기 그지 없다. 서양의 여러 작품들을 읽었다 싶어 눈을 돌려보면 결국 일본의 작품들이 볼 수 있을 것이다. 홈즈와 포와로, 엘러리 퀸을 만나고 난 후 긴다이치 코스케를 만나게 되고 에드거 앨런 포를 본 후 에도가와 란포를 보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서양의 영향을 받은 정통적인 작품들은 물론 자신들의 정서를 결합시킨 독특한 작품들도 오래전부터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오랜 시간 쌓아온 추리소설에 대한 호감은 일본을 추리소설의 천국인 동시에 독특하게 변화된 추리소설의 갈라파고스로 만들었다. 엔도 다케후미의 『프리즌 트릭』은 신본격파 추리소설이다. 추리와 트릭 등이 주가 되는 본격파 추리소설에 반발해 등장한 사회파 추리소설은 전통적인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그 속의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뤄 현실과 사회의 비판이 주가 되었다. 이런 사회파의 득세로 추리소설 자체의 재미가 반감되었다는 반발로 다시 사회파의 장점을 끌어 안고 전통으로 회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 신본격파 추리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사회파 보다 본격계열의 미스터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움직임은 매우 반갑다. 추리소설 하면 역시 트릭과 그것을 파해하는 탐정이 등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엔도 다케후미의 『프리즌 트릭』의 경우 탐정은 등장하지 않지만 꽤나 골치 아픈 트릭이 등장한다.

이치하라 형무소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피해자는 강산성 용액으로 얼굴이 녹아내려 정체를 알 수 없게 되고 범인으로 의심되는 인물은 도주했다. 피해자는 이시즈카, 살해하고 도망친 사람은 미야자키로 판명된다. 이름 기초로 교도관들과 경찰들이 나서고 의외의 사실이 밝혀진다. 처음 범인으로 알려진 미야자키가 살해된 것이고 도주한 것은 이시즈카였다. 얼굴을 알 수 없게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경찰은 심상치 않은 사건임을 알게 되고 수사를 해 가면서 범인인 이시즈카 역시 교도소에 들어올 때부터 다른 사람으로 뒤바뀐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진짜 이시즈카는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시즈카를 사칭한 인물은 누구인가. 경찰은 미야자키와 이시즈카가 형무소에 들어오게 된 사건을 추적하는 가운데 토마토 팜이라는 기업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의 원제는 ‘39조의 과실’이다. 일본 헌법 39조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말하는 것으로 동일한 범죄에 대해 이중의 처벌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트릭은 살인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치어 죽였다고 해도 음주운전으로 그 범죄에 대해 처벌을 받았다면 살인죄는 묻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다만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을 연상케 하는 트릭을 이용해 그에 관련된 사람들의 큰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은 좋았지만 그 속에 일본법의 헛점, 매스컴의 악의적 보도 행태 같은 사회파의 사회고발적인 부분까지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해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한 두 번의 반전으로는 성이 차지 않은 독자들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야기를 뒤엎는 알 수 없는 마지막의 문장 덕분에 영 뒤가 찝찝한 느낌이었다. 이에 대한 작가의 어떤 코멘트도 없는 것이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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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선이 남작 뮌히하우젠
고트프리드 뷔르거 지음, 염정용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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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거짓말’과는 다르다.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술 한잔 기울이며 하게 되는 악의 없는 과장된 거짓말 정도가 허풍이라고 하면 맞을까? 허풍이라는 단어를 발음해 본다면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고트프리트 A. 뷔르거의 『허풍선이 남작 뮌히하우젠』은 제목이 주는 느낌도 그렇거니와 내용을 보면 그 허풍에 놀래 자빠질 정도다. 뮌히하우젠은 1720년 독일에서 태어난 실존 인물로 러시아군의 장교이자 뛰어난 사냥꾼이며 최고의 말솜씨와 허풍으로 유명했다. 이 책은 그가 술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을 묶은 책으로 출간 당시 독일과 영국에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을 웃기고 싶을 때도 자신이 먼저 웃어 버리면 재미가 반감되는 것처럼 허풍을 더욱 허풍스럽게 하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뮌히하우젠은 자신의 말도 안 되는 허풍을 진실임을 여러 번 강조했지만 다른 사람의 허풍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뮌히하우젠의 허풍은 대략 이런 식이다. 남작의 사냥개인 그레이하운드가 새끼를 밴 상태에서 유난히 살쪄 보이는 토끼를 뒤쫓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러 마리의 개 짖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그레이하운드가 토끼를 뒤쫓으면서 새끼를 낳은 것이다. 게다가 더욱 황당한 허풍은 때마침 그 살찐 토끼 역시 새끼를 낳아 그레이하운드의 새끼 강아지들이 토끼 새끼를 잡고 어미 개는 토끼 어미를 잡았다는 이야기다. 어디 그 뿐이랴. 몸통이 잘려 두 토막이 난 말의 앞부분을 타고 다니고 뒷부분은 번식을 하다가 두 토막을 월계수 가지로 꿰매어놓으니 나무가 자라 말 위의 정원이 되었다는 이야기처럼 황당무계하고 어이없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이에 반해 자신이 잡은 악어를 기증한 박물관의 관리인이 악어를 잡는 남작의 무용담을 자신만큼 부풀리는 것을 불쾌하고 뻔뻔하다며 싫어했다.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자신의 선조는 물론 셰익스피어와 영국의 여왕 같은 실존인물을 등장시킨 능첨스러움이야말로 뮌히하우젠의 허풍을 더욱 빛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다. 두 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된 뮌히하우젠의 허풍은 두 번째 이야기인 [뮌히하우젠 남작의 바다 모험 이야기]에서 빛난다. 과거의 동화나 이야기를 차용해 온 뮌히하우젠의 세계를 여행하는 모험 이야기는 지하세계는 물론 달까지 가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며 마무리 역시 허풍으로 끝난다.

아무리 진지하게 허풍을 쳐도, 실존 인물이 등장해도 뮌히하우젠의 모험이 허풍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래도 뻔히 들여다 보이는 뮌히하우젠의 허풍이 밉지 않은 이유는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우주적 허풍이 기분 나쁘지 않을 뿐더러 그 허풍 때문에 웃음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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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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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이 글귀는 박사의 낡은 외투에 덕지덕지 기워진 온갖 메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분투하는 문장이다. 17년 전의 교통사고로 기억력을 주관하는 뇌에 문제가 생긴 이후 박사는 무엇도 더 이상 영원히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30년 전인 1975년에 멈춰버린 영원한 기억 위로 그가 날마다 쌓아올리고자 애쓰는 기억의 유효 기간은 잔인하게도 딱 80분뿐이다. 81분부터 그는 그 80분의 기억을 송두리째 망각하고, 또 다른 80분의 기억을 쌓기 시작한다. ‘망각’이라는 수렁이 너무나 자명하게 놓여 있는데도. 박사의 망각은 너무나 치명적이라 그 수렁에 한번 빠져들면 80분의 기억이 어떤 것이든 깡그리 소멸되지만, 영원히 잃어버린 기억의 유일한 단서가 되어주는 메모는 남는다. 그 짧은 메모들로 1975년 이후의 나날들을 아침마다 절망 속에서 재구성한다.

불안정한 기억의 토대 위에 박사가 유일하게 굳건히 기억하는 것은 ‘숫자’에 대한 사랑이다. 박사가 파출부로 처음 온 ‘나’에게 묻는 것도 숫자로 돌아오는 대답을 기대한 질문이다. 신발 사이즈 24, “실로 청결한 숫자 4의 계승”. 전화번호 576-1455, “정말 멋진 수! 1과 1억 사이에 존재하는 소수의 개수”. 박사는 별것 아닌 숫자에도 의미를 부여하여 귀하게 대접한다. 그리고 그 숫자의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박사는 ‘나’와 ‘나’의 아들 루트와의 인연에도 귀한 숫자로 세상에서 하나뿐인 의미를 부여한다.

‘나’의 생일은 2월 20일, 박사의 소중한 손목시계에 새겨진 숫자는 284, 220과 284는 “신의 주선으로 맺어진 우애수”란다. “220의 약수의 합은 284. 284의 약수의 합은 220. 바로 우애수야. 쉬 존재하지 않는 쌍이지. 페르마도 데카르트도 겨우 한 쌍씩밖에 발견하지 못했어. 신의 주선으로 맺어진 숫자지. 아름답지 않은가? 자네 생일과 내 손목시계에 새겨진 숫자가 이렇게 멋진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니.”

루트와는 야구장 좌석번호 714와 715로 맺어진 사이다. “714는 베이브 루스가 작성한 통산 홈런 기록. 행크 아론은 이 기록을 깨는 715호 홈런을 기록했지. 714와 715의 곱은 제일 작은 소수 일곱 개의 곱과 같고, 또 714의 소인수의 합과 715의 소인수의 합은 같아. 이런 성질을 지닌, 연속하는 정수 쌍은 20000 이하에는 스물여섯 쌍밖에 존재하지 않아. 루스-아론 쌍.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7-14고 루트가 7-15에 앉는다는 거야. 그 반대면 절대 안 되지. 옛 기록을 새로이 나타난 자가 깬다. 그것이 세상 사는 이치야. 안 그러니?”

이외에도 박사가 들려주는 수, 혹은 수식의 아름다움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끔찍하게 지루한 숫자가 음악이고, 시이고, 이야기로 그토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다니!

수는 박사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이다. ‘나’와 루트도 박사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운다. 80분짜리 기억력을 가지고 17년 동안 누구와도 온전히 교류하지 못한 채 낡고 살풍경한 별채에서 수학만을 애지중지해 온 박사가 자기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해 파출부 모자와 쌓아가는 인연은 너무나 따뜻해서 내 마음의 온도도 조용히 상승한다. 특히 박사가 루트에게 아낌없이 쏟는 애정은 눈물이 날 정도다. 그 허약한 몸으로 손을 벤 루트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부리나케 내달리고, 루트가 야구공에 맞아 다칠까 봐 온몸으로 루트를 감싸는 박사의 마음을 루트네는 참으로 고맙게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마음을 지키고 소중히 했기에 자기 자신과 1로밖에 나누어지지 않는 소수 같던 그들이 만나 “완전의 의미를 체현하는 귀중한 숫자”, 자신을 뺀 약수를 전부 더하면 자기 자신이 되는 완전수로 동화된다. 과잉수도 부족수도 아닌(“완전수가 아니면 약수의 합이 자신보다 커지든지 작아지지. 크면 과잉수, 작으면 부족수.”). 그것은 가장 완전한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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