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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이 글귀는 박사의 낡은 외투에 덕지덕지 기워진 온갖 메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분투하는 문장이다. 17년 전의 교통사고로 기억력을 주관하는 뇌에 문제가 생긴 이후 박사는 무엇도 더 이상 영원히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30년 전인 1975년에 멈춰버린 영원한 기억 위로 그가 날마다 쌓아올리고자 애쓰는 기억의 유효 기간은 잔인하게도 딱 80분뿐이다. 81분부터 그는 그 80분의 기억을 송두리째 망각하고, 또 다른 80분의 기억을 쌓기 시작한다. ‘망각’이라는 수렁이 너무나 자명하게 놓여 있는데도. 박사의 망각은 너무나 치명적이라 그 수렁에 한번 빠져들면 80분의 기억이 어떤 것이든 깡그리 소멸되지만, 영원히 잃어버린 기억의 유일한 단서가 되어주는 메모는 남는다. 그 짧은 메모들로 1975년 이후의 나날들을 아침마다 절망 속에서 재구성한다.
불안정한 기억의 토대 위에 박사가 유일하게 굳건히 기억하는 것은 ‘숫자’에 대한 사랑이다. 박사가 파출부로 처음 온 ‘나’에게 묻는 것도 숫자로 돌아오는 대답을 기대한 질문이다. 신발 사이즈 24, “실로 청결한 숫자 4의 계승”. 전화번호 576-1455, “정말 멋진 수! 1과 1억 사이에 존재하는 소수의 개수”. 박사는 별것 아닌 숫자에도 의미를 부여하여 귀하게 대접한다. 그리고 그 숫자의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박사는 ‘나’와 ‘나’의 아들 루트와의 인연에도 귀한 숫자로 세상에서 하나뿐인 의미를 부여한다.
‘나’의 생일은 2월 20일, 박사의 소중한 손목시계에 새겨진 숫자는 284, 220과 284는 “신의 주선으로 맺어진 우애수”란다. “220의 약수의 합은 284. 284의 약수의 합은 220. 바로 우애수야. 쉬 존재하지 않는 쌍이지. 페르마도 데카르트도 겨우 한 쌍씩밖에 발견하지 못했어. 신의 주선으로 맺어진 숫자지. 아름답지 않은가? 자네 생일과 내 손목시계에 새겨진 숫자가 이렇게 멋진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니.”
루트와는 야구장 좌석번호 714와 715로 맺어진 사이다. “714는 베이브 루스가 작성한 통산 홈런 기록. 행크 아론은 이 기록을 깨는 715호 홈런을 기록했지. 714와 715의 곱은 제일 작은 소수 일곱 개의 곱과 같고, 또 714의 소인수의 합과 715의 소인수의 합은 같아. 이런 성질을 지닌, 연속하는 정수 쌍은 20000 이하에는 스물여섯 쌍밖에 존재하지 않아. 루스-아론 쌍.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7-14고 루트가 7-15에 앉는다는 거야. 그 반대면 절대 안 되지. 옛 기록을 새로이 나타난 자가 깬다. 그것이 세상 사는 이치야. 안 그러니?”
이외에도 박사가 들려주는 수, 혹은 수식의 아름다움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끔찍하게 지루한 숫자가 음악이고, 시이고, 이야기로 그토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다니!
수는 박사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이다. ‘나’와 루트도 박사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운다. 80분짜리 기억력을 가지고 17년 동안 누구와도 온전히 교류하지 못한 채 낡고 살풍경한 별채에서 수학만을 애지중지해 온 박사가 자기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해 파출부 모자와 쌓아가는 인연은 너무나 따뜻해서 내 마음의 온도도 조용히 상승한다. 특히 박사가 루트에게 아낌없이 쏟는 애정은 눈물이 날 정도다. 그 허약한 몸으로 손을 벤 루트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부리나케 내달리고, 루트가 야구공에 맞아 다칠까 봐 온몸으로 루트를 감싸는 박사의 마음을 루트네는 참으로 고맙게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마음을 지키고 소중히 했기에 자기 자신과 1로밖에 나누어지지 않는 소수 같던 그들이 만나 “완전의 의미를 체현하는 귀중한 숫자”, 자신을 뺀 약수를 전부 더하면 자기 자신이 되는 완전수로 동화된다. 과잉수도 부족수도 아닌(“완전수가 아니면 약수의 합이 자신보다 커지든지 작아지지. 크면 과잉수, 작으면 부족수.”). 그것은 가장 완전한 감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