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정일-(이하 도):

..그래서 요즘의 '행복 이데올로기'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데올로기 앞에서 우울, 고통, 분노, 슬픔 같은 것의 인간학적 중요성을 말한다는 건 소용없는 일 같아 보이죠. "나는 행복해야한다"는 명령이 사람들을 너무도 강하게 지배하고 있어서 다른 이야기를 하기가 민망할 정도예요.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죠. 행복의 욕구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중략)..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오케이, 고약한 자들과 손잡고 악과 동맹을 맺는 것도 오케이라는게 되거든요. 이게 행복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입니다.

 

2.

최재천-(이하 최):

유전자는 단백질을 만들어놓은 후에는 별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화학자 조지 월드는 노벨상 수상자라는 이유로 윌리엄 쇼크리 정자은행으로부터 정액 샘플을 요청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노벨상 수상자를 생산하는 정자를 원한다면 우리 아버지처럼 외국에서 이민 온 가난한 재단사를 만나보시오. 내 정자에서 무엇이 나왔는지 아시오? 두 명의 기타리스트요!" 

 

3.

최:

핑커가 그 책에서 한 말 가운데 정곡을 찌르는게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유전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오로지 환경만이 우리 인간의 본성을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것이 따지고 보면 생물학자들이 얘기하는 인간의 본성은 유전자와 환경의 합작으로 만들어진다는 견해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데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훨씬 더 극단적인 견해는 오히려 중도 성향으로 간주되고 있고 유전자의 역할을 들먹이기만 하면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지독한 극단주의자로 몰아세우는 거죠. 유전자의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살마들을 이 사회는 너무나 쉽게 인종차별주의자나 남녀차별주의자, 전쟁 옹호론자, 또는 허무주의자 등으로 취급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중략)..

유전자의 역할 가능성에 대해 그처럼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보이며 모든게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밀어붙인 까닭이 어쩌면 그래야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을 자기 입맛대로 변화시키고 조정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이들의 '모함'은 아니었을까 하고 저는 가끔 생각해봅니다.

 

4.

도:

정치적 자유가 없거나 제한되는 상황에서도 정치권력이 지원책을 쓰기만 하면 과학은 가능하다는 게 지금의 중국,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사고방식입니다. 사실 전체주의나 독재 아래서도 과학은 가능합니다. 과학자들만 따로 모아놓고 일정 수준의 자유와 특혜를 주어 국가 발전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 전체주의/독재의 통치공학이고 '과학정책'이니까요. 그렇게 되면 과학은 권력이 양성하는 소수 특권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되고 과학이 사회문화적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힘은 극도로 제한되죠.

 

5.

도:

신화는 답이 아니라 질문일 때가 많습니다. ..(중략)..제우스 이야기를 질문으로 바꿔보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세계에 정의가 없다면 인간아, 너희는 그런 세계에 살 수 있겠느냐?" 기원신화도 그렇습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생물학자들에게는 농담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강력한 질문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신 없이도 너희는 생명의 존엄을 알고 서로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겠느냐?" "신 없이도 너는 네 이웃들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창조의 힘을 주었다면 너희는 그 힘으로 무엇을 하겠느냐?" "내 앞에 서지 않고도 인간아, 너는 네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겠느냐?" 이런 것이 신화의 질문입니다.

 

6.

도:

지상에 인간만큼 자기중심적인 동물이 없죠. 사랑의 신이 있다면 그는 만물을 똑같이 평등하게 사랑하는 존재겠죠. 유독 인간만 특별히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가 '휴머니즘'이라고 불러온 것의 밑바닥에는 인간중심주의가 있습니다. 일종의 짝사랑이죠. 과대망상이기도 하고.

..(중략)..

그런데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은 후대 사람들이 앞뒤 문맥을 빼고 사용하는 바람에 인간중심주의적 발언처럼 되고 말았는데, 사실 그 말은 인간이 만사를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신들의 모습까지도 인간의 형상으로 그려내는 걸 비판하는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신화가 신인동형으로 신들을 만들어내는 데 대한 조롱이죠.

..(중략)..

그러나 "신은 세상 만물을 인간을 위해 만들었다"가 되면 짝사랑은 위험천만한 것이 되죠. 거기서부터 '신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를 수 있게 되니까요.

..(중략)..

어쩌면 신은 무한한 이내 그 자체일지 모릅니다.

 

7.

최:

하지만 프로이트가 세운 가설들은 대부분 검증이 가능한 가설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의 검증 과정도 상당히 문제가 많습니다. 프로이트가 과학적이라고 주장했던 바로 그 방법이 철저히 비과학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도 그의 이론이 여전히 살아남는 것은, 프로이트의 방법론이 어떤 신화의 특성을 갖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해요. 그게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이미 박혀 있고, 그래서 그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또다른 가설을 세우고, 검증 아닌 검증을 거듭하고 있는 모습이 제게는 신화를 만들고, 읽고, 재생산하는 과정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도: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죠...(중략)..다만 인문쟁이들이 생각하는 건, 우리가 어떤 진실에 도달하는 데는 꼭 과학적 귀납의 길만 있는게 아니라 연역의 길도 있다는 거죠. 현대 과학이 명백하게 틀렸다고 증명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인문학자가 옹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에요.

..(중략)..

프로이트가 본 무의식은 '비논리의 왕국'입니다. 그 왕국의 문을 자기 딴에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열어보려 한 거죠. 이건 프로이트의 모순입니다.

 

최:

(중략)..저는 프로이트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에요. 당신은 철저하게 인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했던 인문학자이고 엄청난 구라쟁이니까 더 이상 과학이라고 주장하지 말아달라는 거에요.

..(중략)..

물론 프로이트가 어떤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는 과정 그 자체는 과학적인 방법일 수 있겠죠. 그런데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갖게 되는 가장 큰 반감은 가설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는 신의 존재의 문제와 흡사해요. 일단 종교적으로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면,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설명해보면 그 나름대로 모두 질서정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가설 그 자체가 문제가 되죠. 신의 존재는 검증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이드나 에고의 존재를 설정하는 자체가 신의 존재를 설정하는 것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요.

 

..(중략)..

 

도:

그런데 지금도 서양 지식인들에게는 이런 서양 중심주의가 아주 강합니다. 세련된 자들은 속으로는 서양 중심주의를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용감한 자들은 거침없이 드러내고, 교활한 자들은 서양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안에 버젓이 앉아 있습니다. 프로이트에게도 그런 세 가지 혐의들이 조금씩 있어요

..(중략)..

인간은 이데올로기를 떠나서는 살지 못해요. 과학이 제아무리 이데올로기를 쳐부수려고 해도 안 돼요.

..(중략)..

그런데 프로이트가 이런걸 다 엎어놨어요. 인간은 자기를 알 수 없고 그러므로 확실한 자기 지식이란 건 환상이 되고 맙니다. 이성이 길잡이가 아니라 비이성(무의식)이 인간을 이끌고, 욕망이 인간을 인도한다면 어쩔 것인가?..(중략)..제1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중략)..이 폐허의 초상집을 견디자면 초상난 이유를 설명해줄 안내서가 필요했어요. 프로이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안내서의 하나를 제공한거예요. 유럽의 자존과 오만을 치유하는데 기여한거죠. 이건 인간 전체에도 해당됩니다.

내가 지금 프로이트를 내 나름대로 변호하느라 마음에도 없는 소릴 다하고 있습니다만, 프로이트의 공로가 길게 봐서 공로일지 어떨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프로이트식의 사유는 한 문명이 늙고 지쳤을 때 보이는 말기 증상의 일부라는게 내 생각입니다.

..(중략)..

문명이 맥이 빠져 자빠지기 직전에 일어나는 병적 창조성의 마지막 불꽃같은 거 말입니다. 지금 유럽의 핵심 지역들은 창조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예요. 병든 문명이 자빠지도록 툭 건드려주는 것도 기여가 아닐까요? 프로이트가 성공했다면 그건 장의사의 성공같은 거죠.

 

 

8.

도:

입양이니 헌혈이니 하는 이타적 행동이 결국은 '나'의 액면가치를 높여주는 거니까 한다고 말하면 이타적 행동도 '이기적 계산'에 의한 것이 됩니다.

 

9.

최:

예전에는 병원균도 자기가 들어가서 살고 있는 숙주를 갑자기 죽여버리면 자신에게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숙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죠. 아무도 자기 집을 태우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이 이론이 굉장히 오랫동안 지배적이었어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어요. 어떤 병원균은 잘 옮겨다닐 수 있는 병원균이거든요. 예를 들어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감기에 걸린 인간이 쓰러져서 돌아다닐 수 없으면 다른 숙주로 옮겨갈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감기 바이러스는 항상 인간을 적당히만 아프게 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만들죠. 그래야 돌아다니면서 남들하고 악수하고, 남들 얼굴에 재채기도 하고 해서 자기들을 새로운 숙주로 옮겨주죠. 그러나 말라리아 병원균은 숙주가 다른 사람들 만날 필요가 없어요. 숙주가 쓰러져 있어도 모기가 와서 실컷 문 다음 다른 사람한테 가서 옮기면 되니까요.

 

10.

도:

'하나이고 유일한 신'의 경우에는 다양성이 필요없어 보입니다. 다양하면 이미 유일신이 아니니까 말이죠. 움베르트 에코가 '신의 언어'를 추측해본 게 있어요. 신의 언어는 모음이니 자음이니 하는 식으로 변화무쌍하면 안 되니까 결국 하나의 소리, 필시 하나의 모음만으로 되어 있을 거라고 추측했죠. "아아아아" 또는 "우우우우"식으로 말이죠. 이렇게 되면 그 언어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중략)..내 생각에 신의 언어가 침묵인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11.

도:

(중략)..현자 실레누스가 그 사람인데, 그가 왜 현자냐하면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차선은 일찍 죽는 것이다"이건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한 말로 전해지지만 실은 실레누스가 기원입니다. 자살 권고가 어째서 지혜의 언어냐? 사실 실레누스의 말은 인간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신들에 대한 강력한 항의예요. 불만 폭발이죠. 이 말을 뒤집에 읽으면 인생에서 무슨 의미니 목적이니 하는 거 찾지 마라. 그런 거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신들의 우연한 노리개로 걸려들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뿐이라는 소립니다.

 

12.

최:

남자든 여자든 사는 게 참 힘들어진 세상입니다. 텔레비젼을 틀면 완벽한 남성이 너무 많이 나오잖아요. 잘생겼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했고, 거기다가 자상하기까지 한 주인공 남자 배우. 그 남자를 보다가 배 나오고 일요일에 쿨쿨 잠만 자는 남편을 보면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어요. 예전에는 사회가 아주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경쟁을 하더라도 규모와 강도가 아주 작고 약했죠. 자기 정당화의 근거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어요. 작은 사회에서는 누구나 한가닥할 수 있는 거리가 굉장히 많았다는 거죠. 지금은 모든 사람이 타이거 우즈에게 비교당하고 전지현에게 비교당하게 되어버린 겁니다.

 

도:

발전 이데올로기에 중독된 사회는 삶에 대한 많은 기대를 갖게 하는 사회입니다. 발전이란 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 사회에서는 불안이나 스트레스, 우울증 등등의 발생 빈도가 현저히 낮습니다.

 

 

13.

도:

그런데 인간은 회생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절망적인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는 좀체 반성하지 않고, 더구나 반성의 결과를 사회운영에 적용해서 필요한 변화를 일구어내지 않습니다. 더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절정에 이르거나 죽음이 코앞에 보일 정도로 위기가 닥쳐야 그때서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혜롭지 못한거죠. 지금처럼 풍요의 맛을 본 시대에는 삶의 방식을 바꾸기가 더 어렵고 정치 민주주의 아래서는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야 하니까 본질적 변화를 시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민주주의가 두터운 다양성을 위한 체제인데 그것이 또한 다양성을 어렵게 하는 얇은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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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많은 전문가들이 자신이 아는 정보를 이용해 당신에게 손해를 입힌다고 생각하는가? 불행히도, 당신 생각이 옳다. 전문가들은 그들이 아는 정보를 당신이 모른다는 사실에 기대고 있는 족속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설혹 당신이 정보를 가지고 있더라도 너무나 혼란스러워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고 허둥댈 거라고 가정하며, 당신이 자신들의 전문성에 감탄한 나머지 감히 저항하거나 대들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중략)..

 

정보로 무장한 전문가들은 어마어마한 무언의 지레효과를 활용할 수 있다. 바로 공포심이다. 혈관형성술을 받지 않으면 어느날 아침 당신의 자녀가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어있는 당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싸구려 관을 쓰면 할머니가 저 아래서 편히 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5만 달러까지 자동차라면 그 어떤 외부 압력에도 끄떡없는 강철보호막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감싸 지켜주겠지만 2만 5000달러짜리 자동차는 장난감처럼 산산조각 날지도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2.

성별을 불문하고 사이트 사용자들의 키는 전국 평균보다 약 3센티미터가 더 컸다. 몸무게의 경우, 남성은 전국 평균과 비슷했으나 여성이 기재한 수치는 전국 평균보다 약 10킬로그램이나 적었다.

가장 인상적인 사실은 거의 70%에 달하는 여성이 '평균 이상의 외모'를 지니고 있으며, 이 중 24%가 자신을 '아주 아름다운'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남성들 역시 지나치게 외모가 훌륭했다. 67%의 남성이 자신을 '아주 잘생긴'으로 분류했고, 약 30%가 '평범한' 외모를 지녔으며, '평균 이하의 외모'를 지녔다고 말한 남성은 겨우 1%에 지나지 않았다. 즉 온라인 데이트를 즐기는 이들은 다들 끝내주는 미남미녀이거나, 자아도취에 빠져있거나, 아니면 '평균'의 의미에 반항하는 사람들임이 틀림없다.(어쩌면 그들은 진정한 현실주의자일지도 모른다. 부동산 중개업자라면 이해하겠지만, 평범한 집은 '매혹적'이거나 '환상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런 말을 붙이지 않으면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사이트에 가입한 여성들 가운데 28%가 금발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전국 평균을 한참 웃도는 수치다. 따라서 이들은 염색을 했거나 거짓말을 했거나 혹은 둘 다일 가능성이 크다.

 

..(중략)..

 

사실, 온라인 데이트를 원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요소는 남성과 여성에 관한 대부분의 고정관념에 딱 들어맞는다.

예를 들어, 단기간 애인을 찾는 남성보다는 지속적인 관계를 원하는 남성쪽이 훨씬 인기가 좋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에는 단기간 애인을 원하는 쪽이 더 많은 데이트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남성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의 외모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남성의 소득 수준이 가장 중요하다. 남성은 부유할수록 이메일의 수가 늘어나지만, 여성의 경우 소득수준에 따른 선호도는 종 모양의 곡선을 그린다. 남성은 너무 가난한 여성과 데이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나, 지나치게 부유한 여성 역시 꺼리는 경향이 있다. 남성은 학생, 예술가, 음악가, 수의사, 연예인을 선호한다.(반면에 비서,무직, 혹은 법률이나 군 분야의 여성들은 기피한다.) 여성은 군인, 경찰관, 소방관(이는 폴 펠드먼의 베이글 사업과 마찬가지로 9.11 사태의 영향일 수 있다), 변호사, 재정 및 금융 곤계자에게 끌리며, 육체 노동자, 배우, 학생, 요식업과 접재업에 종사하는 남성들을 피한다. 남성에게 키가 작다는 것은 아주 불리한 조건이지만(그래서 그토록 많은 남성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 게다) 몸무게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반면에 여성에게 비만이나 과체중은 치명적이다(그래서 다들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남성의 붉은 머리나 곱슬머리는 점수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며, 대머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삭발은 괜찮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여성은 선호도가 낮지만 금발은 아주 좋다. 온라인 데이트의 세계에서 금발머리는 대학 졸업장과도 같은 지위를 갖는다. 10만 달러의 등록금과 맞먹는 100달러의 역색비용이라니, 정말 싸게 먹히는 일이 아닌가.

 

데이트 사이트는 소득과 교육 수준, 그리고 외모에 관한 모든 정보는 물론, 자신의 인종도 표시할 수 있게 되어있다. 또한 자신이 데이트를 하고 싶은 사람들의 인종란도 채울 수 있는데, 택지는 '나와 동일한' 혹은 '상관없음'이다. 이들은 '위키스트 링크'의 참가자들과 마찬가지로,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 공개적으로 과시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후에 데이트를 하고 싶은 상대에게 개인적으로 이메일을 보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실제 행동을 분석할 수 있다.

사이트에 가입한 절반 정도의 백인 여성과 80%의 백인 남성이 피부색은 상관없다고 기재했다. 그러나 반응 데이터는 그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피부색이 상관없다고 대답한 백인 남성들의 90%가 백인 여성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인종의 차이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기재한 백인 여성들의 97%가 백인 남성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정말로 이 백인 여성과 남성들에게 피부색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단순히 백인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상대가 없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저 비난받고 싶지 않기에 인종은 상관없다고 대답한 건 아닐까? 특히 자신과 같은 피부색을 지닌 미래의 데이트 상대에게 개방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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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히 인터넷과 같은 쌍방향의 분산된 네트워크는 "빅브라더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라는 전통적인 감시를 "당신이 바로 감시하는 빅 브라더이다.(Big Brother is you, watching)"라는 역감시의 기제로 바꾸기가 쉽다.

 

2.

사회학자 보인은 최근 사회학 연구에 기반해서 사회적 질서가 감시에서 유혹으로 옮아갔을 뿐만 아니라, 파놉티콘이라는 외형 자체가 불필요하게 되었고, 감시보다는 대비와 예방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쌍방향 감시가 가능하고, 잘못된 정보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파놉티콘이라는 메타포가 적절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포스트 파놉티시즘이라고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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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증법이란, 갈등을 헤겔식의 골격으로 환원시켜 버림으로써 언제나 미지수이고 위험스러운 갈등의 진정한 모습을 회피해가며, 기호학은 갈등을 언어와 대화라는 고요한 플라톤식의 형태로 환원시킴으로써 광포하고 피에 물들어 있으며 치명적인 성격을 띠는 갈등의 참모습을 역시 외면하고 있습니다.


2.

대담자 : ..(중략)..지금까지의 역사는 이와 같은 두 가지 개념 안에서 이해되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가지 개념은 역사의 의미를 어떤 것을 정상으로 규정하는 일, 성의 구별, 권력이라는 현상 등으로 환원시켜 왔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개념이 분명히 사용되어 왔는지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동안 맑스로부터 유래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이드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발전시켜 온 억압의 개념에 부딪쳐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즉, 이러한 개념 뒤에, 그리고 옳든 그르게든 그러한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일종의 향수같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라는 개념 뒤에는 오류와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지식의 완벽한 모습을 동경하는 향수가 있는 반면, 억압이라는 개념 뒤에는 오든 억압과 훈련과 정상화의 메커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권력의 모습을 찾아보려는 향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곤봉을 들지 않은 권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기만이 개입되지 않은 지식이라는 말로써 향수라는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다시 한번 요약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중략)


푸코 : 나로서는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사용하기 곤란하독 봅니다. 첫째는, 이데올로기는 마치 진실이라는 것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에 그 진실에 반대되는 지식은 모두 이데올로기라고 몰아부치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과학성과 진실을 어떻게 선을 그어 구분할 것인가가 아니고, 진실도 거짓도 아닌 담화 안에서 진실의 효과가 어떻게 생산되느냐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데올로기가 갖는 용어상의 난점은 그것이 주체, 또는 주관이라는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이데올로기는 하부구조나 물질성 또는 경제적 결정 요인에 비하면 부차적인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와 같이 권력을 부정적이고 협소하며 개략적으로 보는 시각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추세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권력이 항상 부정적인 기능만으로 움직이며, 그저 "그것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식으로 금지의 명령만을 되풀이 한다면 과연 사람들이 권력에 대하여 그렇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 권력이 효과를 발휘하고 사람들이 권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권력이 단순히 금지의 기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인가 사물을 관통하고, 생산하며 쾌락을 유도하고, 지식을 형성하며, 담화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권력은 억압이라는 부정적인 기능을 넘어서 사회적 육체를 가로지르는 일종의 생산적 그물망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3.

..그런데 최근에 전문적 지식인은 묘한 장애물, 또는 위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은 국면적 투쟁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투쟁적 욕구를 제한된 영역으로 한정하려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면 지역화된 투쟁을 조정하고 있는 정치정당이나 노동조합에 의해서 자기자신도 모르게 조정당하는 위험, 총체적인 전략이나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지여고하된 투쟁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마는 위험, 지역화된 투쟁이 소수집단에게서만 호응을 받거나 아예 호응조차 받지 못하는 위험 따위가 그것입니다.

프랑스에서 우리는 이런 위험의 양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감옥이나 형벌제도, 또는 경찰이나 사법제도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투쟁들은 애당초 복지정책 담당자나 감옥에 갇혀본 경험이 있는 범죄자의 경험과는 무관하게 일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투쟁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사회의 제반세력과 점차로 유리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고독하게’ 진행된 투쟁은 범죄자를 죄없이 당한 사회의 희생양으로 표현하고, 미래에 있을 혁명의 야생마처럼 부각시키는 순진하고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에 젖어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투쟁 양상이 19세기 후반에 있었던 무정부주의적 색채를 띠게 된 까닭은 현재의 투쟁의 전략을 통합하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투쟁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잃고, 그저 단조로운 구호가락이나 외치는 캠페인이 되어버렸으며 대중은 눈 앞에 벌어지는 투쟁의 못브에 식상하여 왜 투쟁이 필요한지조차 망각해 버린 채 억압적인 경찰기구와 사법체제를 용인하거나 때로는 더욱 강화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중략)..

전문적 지식인은 대중과 밀접히 연결되지 않은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유에서건, 그들이 국가의 이익이나 자본의 자기증식에 기능적으로 봉사하고 있다는 이유에서건, 또는 그들이 과학적인 이데올로기만을 전파시킨다는 이유, 또는 그들이 행사하는 권력의 효과가 부분적이고 단편적이라는 이유로 전문적 지식인을 정치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오류일 것입니다...(중략)..진실은 자유로운 정신의 보상도 아니고, 오랜 고독 속에서 나오는 뼈아픈 인고의 결과물도 아니며, 해탈의 경지로 들어간 초인만이 누리는 특권도 아닙니다. 진실은 이 세상에 널려있는 것입니다...(중략)..진실은 일정한 권력의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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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나는 닫힌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행인의 이상한 걸음걸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같군요.

그 사람은 바깥에 폭풍이 불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폭풍때문에 행인이 땅에 발을 붙이기도 힘겨워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죠."

 

그때 나는 그의 내면이 어떤 상태인지 깨달았다. 

 

2.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저술활동을 한 오스트리아의 논리학자 알렉시우스 마이농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을 제시했다. 마이농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황금 산을 지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떤 방식으로든 외부 세계에 황금 산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물리적인 견지에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견지에서 그렇다는 얘기이다. 일각수, 부활절 토끼, 동화 속 요정, 유령, 도깨비, 네스 호의 괴물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산타 할아버지는 없다"라든가 "네스 호의 괴물은 큰 송어에 지나지 않는다"라든가 하는 진술을 이해할 수 있다. 논리의 세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그것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러셀은 매우 꼼꼼하고 질서 정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마이농이 지어낸 세계의 그림은 러셀이 보기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난잡하고 무질서한 것이었다.

 

3.

대부분의 말에는 단 하나의 용법이 아니라 다수의 용법이 있게 마련인데, 이 다수의 용법들이 반드시 어떤 공통점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게임"이라는 말을 예로 들었다. 온갖 종류의 게임이 있다. 페이션스, 체스, 배드민턴, 오스트레일리아식 축구, 캐치볼 등등. 그 특성도 가지가지이다. 경쟁하는 게임, 협력하는 게임, 팀을 이루어 하는 게임, 개인이 하는 게임, 기술이 필요한 게임, 운에 달린 게임, 공을 이용한 게임, 카드를 이용한 게임, 그렇다면 이 모든 게임을 한데 묶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답은 간단하다. "그런것은 없다" "게임"의 본질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단어들을 "가족 유사성" 개념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마치 가족과 같다. 가족 중 일부는 목선이 특징적이고, 일부는 꿰둟는 듯한 파란 눈을 가지고 있으며, 일부는 머리가 일찍 세고, 일부는 귀가 이상할 정도로 크다. 하지만 가족 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단일한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을 게임으로 만드는 것은 이처럼 중첩되는 일련의 유사성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유사성들의 교차관계가 개념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개념을 이런 점에서 실과도 같다. "실의 강도는 처음부터 끔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올이 중첩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일상 언어가 그 저변에 깔린 논리적 구조를 잘 보이지 않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라는 명제는 표면적으로 보아서는 그 논리적 구조를 잘 알 수 없다. 옷이 몸을 가리듯이 언어는 논리를 가린다. 헐렁한 점퍼는 진짜 몸매를 감출 것이다. 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견해를 버리고 언어가 완벽하게 적동하는 질서에 따른다고 보았다. 언어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

 

4.

언어는 규칙에 지배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공적인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실천과 "삶의 형식"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규칙은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허용되는 것과 허용될 수 없는 것을 정하는 기준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개인의 언어, 즉 단 한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는 관념은 부조리한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생각이 옳다면 자기 내부에서 논박의 여지가 없는 지식을 찾으려 한 데카르트는 확실성이라는 성배의 탐색을 잘못된 방향에서 시작한 셈이다. "나는 생각한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의미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을 생각이라고 하는지, "생각"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가 먼저 확정되어야 한다. 그럴때에만 언어가 언어로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가운데 최초의 자리에 놓일 수는 없는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통찰로 수백년 동안 이어져온 철학적 전통을 뒤집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단단한 확실성의 토대를 발굴하는 고된 노역에서 해방되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는 철학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덮어씌운 혼란의 그물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다.

 

5.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홀리는 언어의 마법과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일상 언어, 즉 우리가 집에서 쓰는 말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의 당혹감은 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될 때, "언어가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 생겨난다. 어떤 것이 온통 붉으면서 동시에 푸를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심오한 형이상학적 진리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법 규칙을 뿐이다. 아마 세계의 오지, 머나먼 정글의 어느 구석에는 관목이나 딸기 혹은 솥을 "온통 붉은 동시에 온통 푸르다"라고 묘사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부족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철학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은 문제라기보다는 수수께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수수께끼를 풀면서 우리는 러셀과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발굴한 것과 같은 숨은 논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 즉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을 다시 상기할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알"수 있을까? 일상적 어법에 따를 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을 타나내는 표현은 - "나는 빈이 오스트리아의 수도라는 것을 안다"처럼 - 의심의 가능성이 있어야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고통은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태양은 지금 몇 시인가?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답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태양에서의 시간이라는 개념이 우리 언어 속에 차지할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념의 적용을 규제할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6.

포퍼는 아마도 가장 유력한 마르크스주의 비판가였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내세우는 과학성은 포퍼에 의해 분쇄되었다. 포퍼에 따르면 유효한 과학은 자기 자신을 검증의 대상으로 만들며 그 진위를 시험해볼 수 있는 예측을 제시한다. 예측은 대담할 수록 좋다. 반면 사이비과학(포퍼는 네오마르크스주의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이 범주에 집어넣는다)은 반증될 위험이 있는 분명한 예측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검증 자체를 회피하거나 예측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그 예측에 명백히 어긋나는 증거를 어떻게든 다른 식으로 설명해버리려 한다. 마르크스의 예측과 달리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형성이 가장 많이 진전된 국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 그건 말이지, 왜 그러냐 하면.." 자본주의는 부가 점점 더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다." "아 그건 말이지, 왜냐하면.."네오마르크스주의가들의 이론은 이런 "아 그건말이지, 왜냐하면.."으로 가득 차 있다.(그러나 마르크스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예측을 제시했다. 초처는 비록 마르크스의 예측이 반증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높이 평가했다)

 

7.

진보가 시행착오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포퍼의 생각은 20세기가 낳은 진정으로 위대한 사상들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진정으로 위대한 사상이 대개 그렇듯이 그것은 극도로 단순하다...(중략)...포퍼는 민주주의를 한 나라가 어느정도 발전단계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사치품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점을 통찰했다. 민주주의는 오히려 진보를 위한 필수 전제이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내가 틀리고 네가 옳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공동의 노력을 통해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라는 식의 합리적 태도를 요구한다.

그런데 국민이 지배자를 선출할 수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진 것은 아니다. 포퍼는 "누가 통치할 것인가"라는 플라톤의 질문이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합법성의 문제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히틀러도 합법적으로 권좌에 올랐다. 그의 자의적 통치를 가능케 한 수권법은 의회에서 다수결로 통과되었던 것이다.

 

나는 [열린 사회]에서 "누가 통치할 것인가"라는 플라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문제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피를 흘리지 않고 기존의 정부를 물러나게 할 수 있는 헌법을 만들 것인가" 여기서 강조점은 정부를 선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부를 제거하는 가능성에 놓여 있다.

 

8.

포퍼가 제기한 비판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만일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것이 온통 빨간 색이면서 동시에 온통 푸른 색일 수 있는가"라는 식의 질문을 배제하고 싶다면 그렇게 배제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허용될 수 있는 진술과 그렇지 않은 진술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의 이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의 이론은 수수께끼가 아니라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포퍼는 주장한다. 오직 수수께끼만이 존재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철학적 주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물론 옳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말이 옳다는 것을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증명해야한다. 그런데 증명을 시도하다보면 그는 필연적으로 진짜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의미와 무의미를 가르는 경계선의 정확한 위치를 어떻게 정학 것인가. 그러한 경계선이 정당한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그러므로 설사 대부분의 철학이 문제보다는 수수께끼를 다루는 것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한가지 문제는 존재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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