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가 자네에게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먼저 하품을 하게나. 지금 내 꼴이 그렇긴 하지만.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

 

2.

믿기지 않는다면 믿지 않아도 좋아, 듣는 자리에서 당장 믿을 만한 얘기만을 골라서 내뱉는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3.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에 기록되는 게 아니야.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몸에 기록되는 거야. 그것만이 진짜야. 떨리는 몸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말해주는 게 바로 역사야.

 

4.

나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 얼마나 사랑하는가? 죽을 만큼 사랑한다. 당장 그녀를 안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애원하듯이 대답했어.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군. 죽음이 도처에 널린 이런 곳에서 인간의 목숨 따위는 필요없다. 목숨 따위는 정의에나 바쳐라. 아무리 피를 뽑아서 수혈해도 되살릴 수 없었던 병사들로 가득한 지평리에나 던져버려라. 숨이 턱 막히더군. 목숨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게 세상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으니까. 국가는 내게 목숨 정도만 원했지. 그러나 그녀는 내게 그 이상의 것을 원했어.

 

5.

왜 사람들은 책에 씌어진 것이라면 온갖 거짓말을 다 늘어놓다도 믿으면서 사람이 말하는 것이라면 때로 믿지 못하는 것일까?

..(중략)..

몸소 역사를 겪어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뿌넝숴라고 말해도, 역사를 만드는 자들은 거기에다가 논리를 적용해 앞뒤를 대충 짜맞추고는 한 편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사람들은 기념관에 가서 구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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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것은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아니었으며 누구를 원망할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말 그대로 수(數)였던 것이다. 말수가 줄어든 대신 나는 열심히 알바를 하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야, 세상은 한 방이야. 어울리던 친구들이 안쓰럽단 투로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이들도, 같은 산수를 할 수밖에 없단 사실을. 넌 뭘 할 건데? 나? 글쎄 요샌 연예계가 어떨까 싶어.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수학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 즉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듯-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다. 디 엔드다. 어쩌면 그날 나는 <아버지의 산수>를 목격했거나, 그 연산의 답을 보았거나, 혹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그런 셈이었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는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 산수를 받았다. 그리고 느낌만으로 <아버지 돈 좀 줘>와 같은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2.

처음 열차가 들어오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열차라기보다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거대한 동물이 파아, 하아, 플랫폼에 기어와 마치 구토물을 쏟아내듯 옆구리를 찢고 사람들을 토해냈다. 아아,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뭔가 댐 같은 것이 무너지는 광경이었고, 눈과 귀와 코를 통해 머리 속 가득 구토물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야! 코치 형이 고함을 질러주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놈의 먹이가 되었을테지. 정신이 들고 보니, 놈의 옆구리가 흥건히 고여 있던 구토물을 다시금 빨아들이고 있었다.

 

3.

결국 모든 인간은 상습범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상습적으로 전철을 타고, 상습적으로 일을 하고, 상습적으로 밥을 먹고, 상습적으로 돈을 벌고, 상습적으로 놀고, 상습적으로 남을 괴롭히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상습적으로 착각을 하고, 상습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상습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상습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습적인 교육을 받고, 상습적으로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이 아프고, 상습적으로 외롭고, 상습적으로 섹스를 하고, 상습적으로 잠을 잔다. 그리고 상습적으로, 죽는다.

 

4.

밀지 마, 그만 밀라니까. 왜 세상은 온통 푸시인가. 왜 세상엔 <푸시맨>만 있고 <풀맨>이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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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사 어렴풋이 그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다만 생존하기 위하여 현실의 부당한 행태와 그로부터 오는 자신의 고통을 참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만다. 때때로 무언가 '부당하다' 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나, 역시 그 자신은 '무력'하며 그것은 시정될 길이 없으므로 그는 곧 머리를 흔들어 그런 건방진 생각을 털어버린다. 인내는 그의 영원한 금과옥조로 된다.

 

2.

세상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에게 '잘난 사람'이 될 것까지는 기대할 수 없어도 최소한 이러한 '약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그뿐인가? 강자들이 판을 치는 모든 사회기구가 한결같이 새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치는 것은 '적응', '타협', '겸손', '순종', '온건' 등등의 '미덕'이다.

적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 당연한 삶의 요결, 전혀 의심할 여지 없는 공리처럼 되어 있다.

..(중략)..

바로 이것이 '적응할 줄 아는 인간'의 정체인 것이다.

사회는 이러한 인간을 여러가지 그럴 듯한 표현을 써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미화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설교는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다.

 

3.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약은' 자들이 참된 현실주의자는 아니다. 체념하고 굴종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일 수는 없다.

 

4.

그 자리에서 전상수 씨는 베갯머리에 앉아 눈물을 닦고 있는 그의 부인을 보고 미안하다는 말 몇 마디를 하고 나서는 베개를 뜯어보라고 하였다. 뜯어보니 그곳에는 꼬깃꼬깃 접어서 뭉친 5백 원짜리 지폐가 대여섯 장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놀란 얼굴로 남편을 보니, 남편의 주름진 두 볼 사이로 굻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태일이가 다달이 주는 돈으로 한동안은 술을 마셨는데 나중에는 그 어린 것이 뼈가 휘게 번 돈을 그렇게 쓰기가 죄스러워 술을 끊고 이렇게 안 쓰고 모아두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부인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남편은 잘못 만났지만 아들 하나는 잘 둔 것 같애, 그놈 하는 일 너무 말리지 마오.."

 

5.

아들은 웃었다. 얘기를 하면서도 내내 어머니에게 신경이 쓰여 가슴을 죄었는데 뜻밖에도 대범하게, 저렇게 농담을 하시니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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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긴 뭐가 아냐. 내가 세광의 터줏귀신이다. 개근 그게 사람잡는 올가미라는거야. 때려치우고 싶어도 3년 다닌 거 아까워 못하고, 다음에는 4년 개근 아까워 못하고, 사천 원 벌려고 아침 거르고 2천원 어치 택시 타게 만드는게 개근이라는 거다. 나도 4년 개근했어. 창립기념일날 은수저 한 벌이야. 아깝겠지만 말야. 종이 조각 하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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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때, 나는 의사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은 비어 있었다.

..(중략)..

나의 이해가 아마도 옳았을 것이다. 뻔한 소리였고, 하나 마나 한 소리였지만, 나는 그때 그의 뻔함이 무서웠다. 그리고 그 무서움은 그저 무덤덤했다. 그의 설명은 뻔할수록 속수무책이었다.

 

2.

아내의 죽음을 몸으로 감당해야 할 사람은 나였지만, 아내의 장례일정 속에서 나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3.

어째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그토록 확실히 존재하는 것인지요.

 

4.

죽음은 가까이 있었지만, 얼마나 가까워야 가까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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