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화현상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역사학도로서 우리 사회에서 문화가 승리를 거두며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등장하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즐겁지 않다. 뿐만 아니라 우려를 금할 수 없고, 이런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 또한 많이 있다. 왜일까? 이유는 많을 테지만 가장 비중이 큰 문제점을 지적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문화가 왜곡된 형태의 문화라는 사실이다. 문화가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상품이 될 수 있고 언어마저도 그에 편승하여 자본 증식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문화에 대한 논의는 곧바로 상업화되고 소비화된 문화에 대한 논의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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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점에서 결정론적 유물론자인 니체는 모든 물질과 사건은 ‘힘의 양자들’ 사이의 물리적 관계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단지 힘의 양자들이 배열된 하나의 특별한 배열일 따름이다. 당신의 생일이나 음악에 대한 취미와 같은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양자들은 결합과 재결합을 계속하여 새로운 현실을 형성하는데,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세계의 해체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시간은 무한하기 때문에 양자들은 언젠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로 다시 재배열될 것이다. 사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그것들은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냈던 배열을 ‘그대로’ 반복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역사는 영겁의 과정 속에서 되풀이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지옥이다. 그것이 니체 주장의 진짜 핵심이다. 그는 우리가 인생을 되풀이해서 살아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자극하기 위해 영겁회귀를 주장하였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셈이다. 즉 당신은 ‘노예정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간절히 바란다면’, 당신은 ‘초인’이다.




-‘영겁회귀’ 중...







2.

사실 그는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이다.”와 같은 초기의 견해들을 거의 포기하였다. 대부분의 언어 철학자들처럼, 젊었을 때의 비트겐슈타인은 말을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지칭하는 것 또는 나타내는 것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나중의 비트겐슈타인은 지칭하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였다.

..(중략)..

그의 말에 따르면 언어는 일종의 게임이다. 즉 일련의 규칙들(언어적 협약)에 따라 사용되는 ‘조각들’ 또는 ‘도구’(말)들의 세트라는 것이다.

..(중략)..

여기에 따르면, 지식은 우리의 언어에 상응하는 어떤 ‘실체’를 발견(또는 발명)하는 데에 있지 않고, 오히려 언어가 작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일상 언어야말로 철학의 훌륭한 주제가 된다. ‘존재’나 ‘진리’와 같은 개념과 관계된 전통적인 철학문제들은 단지 용어에서 비롯되는 혼란이거나, 그 말이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실체’를 발견하려는 잘못된 시도에서 발생하는 혼란일 뿐이다.




-“세계는 존재하는 사실 그대로이다.” 중...







3.

우선, 키에르케고르는 선과 악은 객관적 또는 본질적 실체를 가진다는 이상주의적 믿음을 부정하였다. 그것들은 오히려 ‘주관적 진리’로서, 증명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확대 적용할 수는 없지만 개인행동의 유일한 기준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살인이 ‘악’이라고 어떤 객관적이거나 논리적 방법으로도 단언할 수 없다. 살인이 ‘선’으로 여겨지는 상황들이 정말 있다.(자기방어나 전쟁 등에서) 대개의 경우 올바른 행동을 논리적으로 결정하기가 불가능하다. 불의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또는 신을 믿어야 할지 인간의 계산으로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결정이나 믿음을 피할 수 없다.

물론, 객관적 진리도 일부 있긴 있다. 2더하기 2는 4이며,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키에르케고르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진리들은-비록 흥미로울지는 모르지만-우리의 일상적인 존재나 중요한 결정 및 행동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는 우리라는 존재는 바로 우리가 하는 행동이라고 믿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존재한다면,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가진 가치들-순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진리와 믿음들-위에 바탕을 둔다.

자연도 사회도 우리에게 선과 악, 옳음과 그름에 관하여 확실성을 주지 않는다. 우리 행동의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는 언제나 불확실하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러한 불확실성 앞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중..







4.

이 미래는 실제적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無)’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모든 행동은 이 무에서 비롯된다. 만약 당신이 언제나 현재만 생각하며 살도록 조절되어 있고 현실에서 도피할 수 없다면, 당신은 상상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행동도 할 수 없다. 현재는 단지 있는 그대로이며,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어떤 행동도 취할 동기가 없다. 사르트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현재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목표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바탕을 둔 우리의 행동 또한 불필요한 것이다.

목표란 우리가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며, 그와 함께 우리 자신의 가치들도 만들어 낸다.(여기에서 사르트르는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원용하고 있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구토’는 선택의 절대적 자유(가능한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인식)로부터 비롯된다. 예를 들면, 어느 순간에 당신은 자살하길 선택할 수도 있다.

바로 이 생각-자아에 큰 균열을 일으키는-이 불안과 구토를 발생시킨다.(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생각 때문에 당신은 실제로 그것을 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자유의 형벌을 받았다는 것은 각각의 상황을 우리 자신의 ‘세계’로 만드는 데에-우리 자신의 목표, 대처 방법, 선태의 불안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선택하는 데에-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선택을 계속하는 것을 최소한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을 견뎌내지 못해 이러한 사실을 지기하기를 거부한다. 많은 비평가들이 우리 시대에 관해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책임 있는 성인으로서 보기보다는 희생자로 보려고 한다.




-“나는 자유의 형벌을 받았다.” 중..







5.

그렇다면 사과에 작용하는 지구의 힘은 지구에 작용하는 사과의 힘과 정확하게 똑같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지구의 운동량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거의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사과의 질량에 비해 지구의 질량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상적인 물리 법칙의 세계에서는 두 물체 중 어떤 물체가 실제로 움직였느냐 하는 것은 관심 밖의 문제이다. 사과가 땅으로 떨어질 때 우리는 흔히 지구의 중력 때문에 사과가 떨어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지구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무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구에 일어나는 반작용을 전혀 알아챌 수 없기 때문이다.




-‘뉴턴의 법칙’ 중..







6.

패러다임의 장점은 연구 활동을 집중시켜 준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패러다임이 없다면, 각각의 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임의적인 자료들을 모아 놓고서 혼란상을 이해하기 위해 각자 다른 이론들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분주하게 애를 써야만 할 것이다. 반면에 패러다임이 지닌 문제점은 일단 자리를 잡으면 당연히 옳은 것으로 인식되어 다른 변화의 여지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진보는 점점 더 소수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전해지게 된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흔히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기 쉽다...(중략)..패러다임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분명히 보게도 하지만, 그 밖의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도 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이동’ 중..







7.

종합하여 말하자면, 한 좌표계에서 시속 500마일의 속도로 보이는 물체의 운동이 다른 좌표계에서 보면 시속 1500마일도 될 수 있고, 시속 -500마일도 될 수 있고, 0도 될 수 있다.다시 말해 ‘절대’ 속도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오로지 상대 속도만이 존재한다...(중략)..이것이 바로 ‘뉴턴식’의 상대론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

다만 뉴턴이 한 가지 깨닫지 못했던 사실은, 우리가 어떤 좌표계 안에 있는 간에 그리고 그것이 다른 좌표계에 대해 어떤 속도로 움직이든 간에, 빛의 속도는 언제나 일정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비행기 옆을 지나가는 빛의 속도는 비행기 안에서 볼 때에도 우주 정거장에서 볼 때에나 지상에서 볼 때에나 모두 똑같이 측정된다. 빛의 속도-초속 약 30만Km-는 관습적으로 c로 나타낸다.

이 문제를 지상으로 가지고와 보자. 지금 우리는 시속 80마일로 달리는 열차를 타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 열차는 투명하다고 가정하자. 열차를 타고 있는 당신이 열차 앞쪽으로 시속 3마일의 속도로 걸ㅇ간다고 하면, 밖에 있는 관찰자에게 당신은 지상에 대해시속 83마일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것은 상식이고 뉴턴의 상대론이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이 관찰자가 열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열차 선로 뒤쪽에서 손전등을 비추었다고 하자. 그러면 손전등의 빛은 열차를 통과해 지나가면서 지상에 평행하게 나아간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이 때 만약 열차의 차장이 열차를 통과해 지나가는 빛의 속도를 측정하면 그 속도는 c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상에 서 있는 관찰자가 그 빛의 속도를 측정하더라도 그 속도는 여시 c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떻게 움직이는 열차에서 측정한 값과 지상에서 측정한 값이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앞의 경우를 다시 돌이켜보자. 열차에 대해 시속 3마일의 속도로 걸어가는 사람은 지상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 빠른 시속 83마일의 속도로 움직인다. 사람의 경우에는 이렇게 상식적인 결과가 나오는데, 빛의 경우에는 이것이 왜 달라진단 말인가?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측정한 빛의 속도는 c에다가 시속 80마일을 더한 것이 되어야 당연하지 않은가?..(중략)..

여기에 상대성 이론의 비밀이 숨어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만약 당신이 열차 안에서 시속 3마일의 속도로 걸어간다면, 밖에 있는 관찰자가 볼 때에는 당신이 지상에 대해 시속 83마일의 속도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아주 약간 더 느린 속도로 움직인다. 즉 이 경우에 80+3=83이 아닌 것이다. 이 덧셈이 정확하게 성립하는 경우는 당신이 열차 안에서 정지하고 있을 때뿐이다...(중략)..

0과 c 사이의 어떤 운동에 대해서도 지상에 있는 관찰자에게는 공간의 수추과 시간의 지연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빛의 속도의 절대성에 의해 야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결론이 불가피하다. 열차 속에서의 시간과 공간이 지상의 것과 다르다면, 우리는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속도는 거리를 걸린 시간으로 나눈 값이다. 열차 속에서 측정한 당신의 속도는 시속 3마일인데, 지상에서 측정한 열차에 대한 당신의 속도가 3마일보다 약간 작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열차 속에서 측정한 거리와 시간이 지상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자신의 논문 속에서 발표한 특수 상대성 이론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중략)..

특수 상대성 이론은 일정한 상대 운동을 하는 두 좌표계(예컨대 정지해 있는 지상에 대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열차)에 대해 물리 법칙들은 똑같이 성립한다는 뉴턴의 상대론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자연의 법칙 주에서 가장 완전해 보이는 법칙 중 하나를 버렸다. 그것은 바로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라는 개념이었다...(중략)..

사실, 움직이는 열차 안에서 1마일로 측정되는 거리는 지상에서 볼 때에는 1마일보다 약간 더 짧아 보인다. 도한 움직이는 열차 안에서 측정한 1초는 지상에서 1초보다 약간 더 길어 보인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기묘한 것은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다. 지상에서 1마일로 측정되는 거리는 열차 안에서 볼 때에는 1마일보다 야간 더 짧아 보이고, 지상에서 측정한 1초는 열차 안에서는 1초보다 약간 더 길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움직이는 것은 지상이 아니고 열차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상대성 이론에 어긋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운동하는 물체가 문자 그대로 실제로 수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길이 30cm의 핫도그가 바른 속도로 달리는 열차 속에서 그 기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상대성 이론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은 열차가 아니라, 열차는 정지해 있고 땅이 움직인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어디서도 “봐라, 여기서는 30cm의 핫도그가 절대적으로 30cm이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수축은 겉보기 수축을 말한다. 즉 상대 운동을 하는 당사자들이 누구의 측정이 정확한가를 놓고 논쟁을 벌일 때 나타나는 불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불행한 사실은 그 누구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고, 또 그것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보기 위해서는 빛이 눈의 망막에 들어와야 하는데, 빛이 이동하는 데에 도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그 사건에 대한 정보를 당신이 받을 때-당신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달라진다...(중략)..

일반 상대성 이론

..(중략)..

1916년에 그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더욱 확대시켜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어떤 선택된 좌표점에 대하여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거나 속도가 변하는 어떤 계에 대해서도 성립하는 상대성 이론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가속도는 본질적으로 구별할 수 없음을 증명함으로써 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중략)..

또한 상대적인 것은 시간과 공간만이 아니고, 가속도와 중력도 상대적이며, 따라서 거기서 도출된 모든 다른 양(예컨대 힘과 운동량)도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였다. 따라서 1킬로미터나 1초 또는 1킬로그램의 진정한 값을 정할 수 있는 좌표계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중략)..

더 극단적으로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표시하였다. 이들 개념은 자연의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가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아인슈타인에게는 ‘시공간’)의 모양은 중력에 따라 변한다. 그런데 중력은 물질의 존재에 의해 생겨나므로, 아인슈타인은 물질이 없는 시간과 공간이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였다.




-‘상대성 이론’ 중..







8.

다시 말해서, 고에너지 복사를 사용하면 특정 시점에 전자가 존재하는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있으나, 전자의 최초 속도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얻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또 저에너지 복사를 사용하면 특정 시점에 전자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게 얻을 수 있으나, 전자의 위치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중략)..

다시 말해서, 불확정성은 결코 0으로 줄일 수 없으며, 하나의 양을 더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다른 양은 그만큼 더 불확실해진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측정 도구가 정밀하지 못해서 아원자 입자에 관한 정보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아니다. 기술이 아무리 진보하더라도, 양자 행동에는 본질저인 불확실성이 내재해 있어 결코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원리의 요지이다. 전자들은 실제로는 정확한 속도로 움직이는 정확한 점처럼 행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전자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불확정성의 원리가 의미하는 것은, 입자나 양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물체들과 같이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물체들을 보고, “이것은 여기에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입자의 본질적인 성질들(위치, 속도, 운동량, 에너지)을 동시에 모두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알기 위해 행하는 우리의 관측 행위 자체가 이들 중 최소한 하나 이상의 양을 불가피하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중략)..

이러한 패배주의적인 생각은 많은 유수한 물리학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아인슈타인이었다. 




-‘불확정성 원리’ 중..







9.

크레타인의 거짓말 패러독스를 피하려면, 메타언어를 단순 언어로부터 분리하고 메타언어의 진리와 단순 언어의 진리를 똑같이 취급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와 같은 패러독스는 모두 ‘무의미한 말’의 영역으로 내던져지고 만다. 왜냐하면 이들 진술은 단순 언어와 메타언어를 동일시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지만 단순 언어와 메타언어를 분리하는 것은 생각보다는 무척 까다로운 일이다. “이 앞의 문장은 10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진술은 메타언어의 간단한 예이고, 또한 참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진술의 예를 보자. “이 문단은 8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메타언어 문장이 가진 문제는 스스로를 그러한 문장 중의 하나로 센다는 점이다. 즉 이 문장은 단순 언어들뿐만 아니라 메타언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메타메타언어 문장인가? 그리고 방금 그 진술은 또한 메타메타메타언어 문장인가? 그렇다면 이 문단이 8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메타메타메타메타언어 진술이 되는 셈인가?

..(중략)..

공리에는 항상 크레타인의 거짓말 패러독스가 숨어 있었다.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원리>에 숨어있던 패러독스는 18년 뒤에 한 오스트리아 수하자가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그 수학자는 러셀의 패러독스를 다시 러셀에게 던져 주었다.




-‘러셀의 패러독스(메타언어)’ 중..







10.

괴델이 주장한 것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표준 논리나 산술과 같은 어떤 공식적인 복잡한 사고 체계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다. “유한한 수의 기본 가정(공리)과 규칙이 있을 때, 그 계 안에서 증명할 수 없는 참인 진술이 최소한 하나 이상 존재한다.” 순수 산술과 같은 공식 기호 체계는 자신만의 힘으로 스스로의 완전성이나 비모순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게 요지이다.(완전한 계는 참인 진술만을 만들어낸다. 한편, 비모순적인 계는 모순적인 진술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체계를 보강한다든지 확장한다고 해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체계 밖에서 도움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때에는 밖에서 끌어 온 그 방법들이 과연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를 증명해야 하는데, 그 밖의 체계 내에서는 역시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중..







11.

키란 주관적이고 연속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몇 cm 이하의 키를 가진 사람들은 그 집합에 속하지 않는다고 딱 선을 긋기가 불가능하다. 예컨대, 180cm의 키를 가진 사람은 키가 큰 사람들의 집합에 속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179.999cm의 키를 가진 사람은 어떤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점점 퍼지(fuzzy)해질 것이다.

또 다른 퍼지 집합의 한 예를 든다면, 행복한 사람들의 집합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행복하기 때문이다...(중략)..따라서 “당신은 우리나라 대통령의 직무 수해에 대해 만족합니까?”와 같은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퍼지논리’ 중..







12.

서방세계에서 잠시 유행한 후에, 파블로프의 거창한 주장들은 대부분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구소련에서는 따뜻하게 받아들여졌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파블로프의 이론은 인간의 행동은 본질적으로 물질적 조건과 생활 패턴에 따라 일어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견해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중..







13.

물론 왓슨은 우리가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곡예를 해야 했다. 어떤 난처한 경우에 그는 생각을 일종의 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얼버무리고 넘어갔다.(처음에 그는 말은 단지 조건 행위일 따름이며, 결코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감정 역시 본능적 행동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완고한 행위주의자들이 행위에 관한 자신들의 그림에서 의미를 완전히 제거한 사실이다.

그들은 똑같은 ‘자극’(예컨대 총 소리)이 어떻게 상황이나 시간에 따른 다른 ‘반응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그들의 모형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소리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뿐이고, 의식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중략)..

더군다나 인간은 차치하고라도 동물들이 실제 세계에서(실험실과는 달리) 조건화를 통해 학습하는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분명치 않다.




-‘행위주의’ 중..







14.

해체의 목적은 그러한 대립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 요소들(글, 기호 표현 등)이 첫 번째 요소들(말, 기호 내용 등)보다 더 좋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이들 용어들을 구별하는 것이 그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이나 동일성을 가려 버린다는 사실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말과 글의 구분을 예로 들어보자. 전통적인 철학적 설명에서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말하는 사람의 ‘존재’와 동일시된다. 말할 때 말하는 사람은 몸 안에 존재하지만, 그의 말은 그의 생각과 느낌을 즉각적으로 나타낸다. 이에 비하여 글은 글쓴이의 잠재적 ‘부재’라는 특징을 지닌다. 비록 루소는 죽었지만 루소의 글들은 읽을 수 있다. 루소의 육체적 부재는 또한 그의 의도를 알아내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그의 문장 가운데 모호하거나 혼돈을 일으키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깨워서 그가 진정으로 뜻한 바가 무엇인지 물어 볼 수가 없다...(중략)..

여기에 대한 데리다의 반박은 부재나 혼돈 또는 실수 등에 대하여 말이 결코 글보다 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말이란 모두 부재에 관한 것이다. 만야 어떤 것이 눈앞이나 마음 앞에 명백하게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것의 의미나 목적이 자명하다면, 거기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기에 없거나 분명하지 않은 것들-물체나 생각이나 태도 등등-을 가리키기 위해 말한다. 그리고 말을 한다고 해서 말이 가리키는 것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말은 단지 그 부재를 강화시킬 따름이다.

..(중략)..

말은 글만큼 텍스트적이며, 똑같은 만큼 쉽게 혼동되고 잘못 해석된다. 누구나 결코 끝나지 않는 논쟁들을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합의가 아니라 더 많은 차이를 새로 만들어 내었을 따름이다. 게다가 말은 사물이나 생각을 완전히 분명하게 존재하게 만들어 다른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말들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중략)..

요컨대 사람들은 영원히 이야기하고 도 이야기할 것이며, 어떠한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존재가 위에서 내려와 그들을 중단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를 실망시키는 사실인 동시에 위안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해체주의’ 중..







15.

예를 들면, 글의 발명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도록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의 발달을 가능케 하였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인쇄 출판물과 책의 발명은 혼자만의 독서와 성찰을 촉진함으로서 17세기 개인주의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글의 ‘메시지(결과, 효과)’는 분석적 사고였고, 인쇄의 메시지는 개인주의였다.




-“매체는 메시지이다.” 중..







16.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예견하였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이상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중략)..

바꿔 말하면, 마르크스는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정치 체제를 일시적인 필요악으로 보았다. 수십 년에 걸친 압제와 부패는 그의 원래 계획 어디에도 없었다...(중략)..사실, 물질적 조건들을 강조하는 분석방법은 거의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러도 좋을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계급투쟁’ 중..







17.

그런데 마르크스는 종교 자체를 비난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종교로 이끄는 사회 상황을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는 영원히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자’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에는 가치와 도덕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중..







18.

만약 당신에게 편지를 쓸 시간이 10분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10분 동안에 마칠 것이다. 그러나 만약 4시간이 있다면 4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것이 ‘파킨슨의 법칙’의 골자인데...(중략)..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일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변하는 것은 자유시간이 아니라 효율성이다...(중략)..파킨슨의 법칙은 사무실에서나 가정에서나 정말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바쁠수록 당신은 더 효율적으로 일한다. 한가한 날일수록 단순한 할 일들이 더 많아진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면 결코 끝낼 수 없는 일-대청소와 같은-은 신이 주신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파킨슨의 법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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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겉과 속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강준만의 주장이 강하게 드러난 책은 아니지만 어떤 방향성만은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인지시키는 그런 책이다.

 

그의 정보수집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비록 주석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수많은 인용들로 가득한 책이지만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다작으로 유명한 강준만이 그랬단다.

자기 책은 빨리 읽고 빨리 버리라고.

 

3권도 나왔던데 아마도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건... 갈수록 길게 쓰기 힘들어지는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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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플라워
스티븐 크보스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더 이상 책을 읽지 못하고 책을 덮어야만 했을 정도로 목이 메이게도 만들었고, 도서관에서 읽다가 소리내어 웃게 만들 정도로 웃음짓게 하는 부분도 많았던. 내 호흡을 갖고 놀았던 책이 아니었나 싶다.

 

대놓고 이거 읽어봐, 이거 들어봐 하고 소개하는 책들과 음악들이 많아서 이 책의 분위기를 아주 일관되게 잡아주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하는 이유가 뭔지는 분명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이 연상될 뿐이지 별개의 이야기라고 부르고 싶다.

 

 

이제 스물하고도 일곱해나 더 살았는데, 여전히 성장소설은 날 흥분케 하고 몰입하게 만든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와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그리고 <월플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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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만사 그 어느 것도 전혀 다른 두 분야의 전문지식으로 확연히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독립되어 있는 것은 없다.




-지은이의 말 중..




2.

보호막 역할을 하는 털도 없고, 땀을 흘려 체온조절도 할 수 없는 까닭에, 돼지는 외부의 습기를 이용하여 피부를 습하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돼지는 깨끗한 진흙 속에 뒹굴어 체온을 조절한다. 그러나 깨끗한 진흙이 없을 경우 자기의 배설물로라도 피부를 습하게 하려 한다. 섭씨 29도 이하일 경우, 돼지는 우리 안의 잠자리와 식사자리에는 배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온이 섭씨 29도를 넘어가면 어디나 가리지 않고 배설을 한다. 기온이 올라갈수록 돼지는 더욱 ‘더러워지게’ 된다. 그러므로 돼지가 종교적으로 불결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실제 몸이 더럽기 때문이라는 이론에도 어느 정도의 일리가 있다. 그러나 돼지의 본성이 자리를 가리지 않고 더러운 것을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다.




-‘돼지 숭배자와 돼지 혐오자’ 중..




3.

사회가 인간을 야수화하는 데에는 두 가지 전통적인 계략이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한 계략은, 가장 야수적인 이난에게 음식이나 위안이나 신체적 건강을 상으로 주어, 인간의 야수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계략은, 가장 야수적인 인간에게 가장 큰 성적인 보상이나 성적인 특권을 주어 야수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계략 가운데 후자가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음식이나 위안이나 건강 등을 박탈할 경우 군사적으로는 비생산적이기 때문이다...(중략)..성은 인간을 야수화하는 데 좋은 보강제이다. 성의 박탈은 투쟁력을 감퇴시키기보다는 고취시키기 때문이다.




4.

우리는 경찰력과 군사력을 배제한다는 의미가 육체적인 힘에 의존하는 전투술을 배제하고 보다 개선된 전투술을 개발해내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되고, 경찰력과 군사력 그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나기를 희망하자. 순수한 성혁명의 결과가 핵미사일 부대장이나 핵 부대 사령관직을 남성 아닌 여성이 장악하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원시 야노마모족의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 별로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3,4 ‘미개족의 남성’ 중..




5.

형제의 우애가 친구간의 우정관계 속에서 양쪽 중 어느 한편이 자기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다 해서 그로 인해 형제간의 우애나 친구간의 우정에 금이 갈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중략)..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한쪽이 주는 것 없이 계속 받기만 한다면, 시혜자는 무언가 빼앗기고만 있다고 느끼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누구나 관대하다는 말을 듣기는 좋아하지만 속기를 잘하는 호인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6.

우리가 사실 그대로 호혜성의 원칙이 실제 어떤 식으로 준수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화폐가 없고 매매가 전혀 없는 평등주의적 사회에서 살아봐야 한다. 호혜성이란 정확한 계산이라든지, 누구에게 빚을 졌다는 사고와는 정반대되는 사고이며, 사실 누군가가 실제로 어떤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고이다. 혹자는 사람들이 감사하다고 말하는지 안하는지에 따라서, 생활방식이 호혜성에 기초하고 있는지 혹은 그밖에 어떤 기준에 기초하고 있는지 말할 수 있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 평등주의적 사회에서는 물품이나 용역을 제공받았다 해서 공개적으로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은 무례한 태도로 여겨진다. 중부 말라야의 세마이족들 사이에서는 사냥물을 균등하게 분배하여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냥꾼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마이족과 같이 살아온 로버트 덴탄은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은 받는 사람이 자기가 받은 고기의 크기를 분명히 계산하고 있거나, 받는 사람이 주는 사냥꾼의 성공이나 관대함에 놀라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주 무례한 태도로 간주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7.

모든 사람이 먹고도 남을 충분한 고기와 기름을 지닌 소였다. 리 교수는 부시멘 친구들에게 다가가 이소가 이 정도면 살찐 소가 아니냐고 물었다. “좋소, 물론 우리는 이 수소가 굉장히 좋은 고기를 제공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소. 그러나 한 젊은이가 많은 사냥감을 잡게 될 때에 자신을 마치 대인이나 추장같이 여기게 되죠. 그리고 우리 나머지 사람들은 마치 자기의 종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오.”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자랑하고 다니는 놈들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만심이 언젠가 그로 하여금 누군가를 죽이게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가 잡아온 고기가 별 쓸모없다고 해주지요. 그래야만 그의 심장은 식게 되고, 겸손해지게 되지요.”




8.

호혜성 경제란 초과생산을 향해 집중적인 노력을 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오히려 한 집단의 생존에 역효과를 나타내는 자연조건에 우선적으로 적응하려는 교환경제 형태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조건들은 서식지내의 동식물의 자연적 고동체가 얼마만큼 생동력이 있는가 하는 그 한계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생존해나가고 있는 에스키모족이나 세마이족, 부시멘족과 같은 사냥과 채집을 주로 생계수단으로 하는 부족 가운데서 발견되어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냥꾼들이 어느 한 시기에 모든 노력을 집약하여 더 많은 동물과 식물들을 남획하게 되면, 그들의 서식지 내의 식량공급능력은 영원히 상실될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9.

자본주의 초기단계에서는 가장 많은 부를 소유하면서도 가장 검소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명예가 수여되었다. 자기들의 재산이 보다 안전하게 되자 자본주의 상류계급들은 흥청망청 무절제한 소비와 낭비를 하여 경쟁자들의 기를 꺾었다...(중략).. 그동안 중하류 계급들은 아직도 가장 열심히 일하고 가장 절약적인 사람들에게 최고의 명예를 돌렸고, 모든 형태의 흥청망청 소비하는 낭비형태에 냉엄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산업발달로 소비시장이 확대되자 중하류층들도 검소한 습관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광고와 매스 미디어가 결탁하여 중하류 계층을 현혹하여 저축을 그만두고, 사고, 소비하고, 낭비하고 파괴하라고 권장했다...(중략)..그래서 중하류의 계층내 신분추구자들간에는 이제 가장 잘 써대는 소비자에게 최고의 명예가 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부자들은 재산의 재분배를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세금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흥청망청 헤프게 써대는 소비행위가 위험스러운 행위가 되어, 다시 최고의 명예는 최대 소유, 최소 과시자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상류계급의 최고 명예 소유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을 이제는 더 이상 자랑을 않게 되자, 흥청망청 소비하도록 중하류 계층을 강요했던 압력도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중류계층의 젊은이들이 해진 청바지를 입고 흥청망청 써대는 소비주의에 저항을 하는 것은 이른바 문화혁명의 일종이라고 보기보다는 상류계급의 경향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까지 기술해온 바와 같이 호혜성 경제체제가 경쟁적인 지위추구의 형태로 해체됨으로써, 늘어난 인구가 기존의 토지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번영할 수 있게 되었다. 에스키모인들이나 부시멘족과 같은 종족들이 향유했던 물질적 복지와 실제 전혀 다를 바 없는 수준 혹은 이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늘어난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인류가 기만당하고 착취당해 더 고된 노동을 해야만 했던 전과정이 건강한 것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의문에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이러하다.  즉 수많은 원시사회 사람들은 ‘노동을 덜어주는’ 새로운 생산기술은 실제에서는 생활수준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든 노동을 강요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생산을 늘리려는 노력을 거부했고 인구밀도를 높이지 않았다.




-5,6,7,8,9 ‘포트래취’ 중..




10.

인간의 행위가 아주 작은 단편들로 찢기어 역사라는 화폭과 무관한 것이 될 때, 그 행위는 이해하기 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11.

서양인들은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의 경제적 종교적 생활양식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 재미있는 인상을 받았다. 그건 언제나 원주민들이 너무 미개하고 어리석고 미신에 사로잡혀 문화의 원리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런 인상이었다. 이런 인상 때문에 분명히 얄리의 사례에 나타난 사실들이 왜곡 전달되고 있다. 얄리는 그런 문화의 원리들을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얄리는 그 원리들을 자기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그의 후견인들은 현대적 공장들의 공정을 시찰하고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 여전히 화물신화를 믿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얄리가 유럽인들이 재화를 생산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 될수록, 그는 더욱 자신과 자신의 종족들이 그 재화들을 나누어가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유럽인들의 설명을 인정할 마음가짐을 갖지 않게 되었다...(중략)..그러나 얄리는 부자가 되는 길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는 표준적인 유럽인들의 말이 계산된 기만이라고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상식을 갖고 있었다. 유럽의 대인들이 - 원주민들에게 요구하는 자기들의 모범적 인물상과는 달리 -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을 보지 않는 원주민들은 없었다.




-10,11 ‘유령화물’ 중..




12.

제자들로서는 메시아가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예수경배가 원한에 찬 전투적 구세주의 숭배가 아닌 평화의 구세주 경배여야 하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중략)..

예수가 외형상 메시아적 권능이 없어 보인 까닭이 무엇인지 이해되기 시작된 것은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진 후부터였다. 많은 제자들이 환상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 환상들을 통해 제자들은 통상의 메시아들과 같은 자격-메시아는 꼭 승리해야 한다는-이 예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환상을 통해 영감을 얻은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 그 자체가 예수가 거짓 메시아라는 점을 말해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혀 새로운 주장은 아니었다. 예수의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유태인들에게 다시 한번의 절정의 기회를 주시어 계약을 이행할 수 있는 백성인가 증명해보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로 여겨졌다. 사람들이 예수를 거짓 예언자라고 의심했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예수는 다시 오실 것이다.




-‘평화의 메시아의 비밀’ 중..




13.

A.D. 1000년에는 그런 날아다니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 그 후 1480년 이후부터는 날아다니는 존재가 없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 A.D. 1000년경 교회는 날아다니는 마녀가 있다는 말은 악마가 조작해낸 환영에 불과하다고 공식 발표했다. 500년 후 교회는 날아다니는 마녀는 환영에 불과하다고 주장을 하는 자들은 악마와 손잡은 사람들이라고 공식 표명했다.




-‘빗자루와 악마의 연회’ 중..




14.

마녀사냥제도의 주된 결과는(숯으로 변한 몸뚱아리들은 차치하고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들은 영주나 교황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단지 자기들이 마녀들이나 악마들의 희생물이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네 집의 지붕은 비가 오면 새는가? 당신네 암소가 낙태했다지? 당신네 밭의 귀리가 잘 크지 않는다면서? 당신네 포도주가 시어졌다면서? 당신의 머리가 아프다고? 당신의 자식이 죽었다면서? 당신네 울타리를 부수고 당신을 빚에 쪼들리게 하고, 당신의 농토를 탐내는 자는 바로 당신의 이웃-마녀로 변한 당신의 이웃-이다. 빵 값이 올랐지? 세금이 치솟았지? 임금이 떨어졌다면서? 이제 극악무도하고 지긋지긋한 마녀들이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군. 백성들의 가공의 적들을 퇴치하자는 힘찬 캠페인을 교회와 국가가 시작했다.

..(중략)..

결국 마녀광이 지닌 실제적인 의미는 마녀광란을 통해 중세 후기 사회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교회와 국가로부터, 인간의 형태를 취한 가상의 괴물들에게 전가시켰다는 데에 있다. 이 괴물들의 환상적인 행위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소외되고 영세화된 대중들은 부패한 성직자들이나 탐욕스러운 귀족들을 저주하는 대신에 미쳐 날뛰는 악마들을 저주하게 되었다. 교회나 국가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대중과 사회에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들이 되었다.




15.

전투적 메시아니즘은 가난한 자들과 무산자들을 단합시켰다. 전투적 메시아니즘은 그들간의 사회상의 거리를 줄일 수 있는 집단 소명감을 주었고 서로 ‘형제와 자매’로 느길 수 있게 했다. 이 사상은 유럽 전역의 대중들을 가동시킴으로써 그들의 에너지를 특정시간과 특정장소로 집중시켜 무산 영세대중과 사회의 정상에 있는 자들과의 대결로 유도해갔다. 이와 반대로 마법광란은 모든 저항할 수 있는 잠재에너지를 분산시켰다. 마법광란은 가난한 자와 무산자들의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서로간의 사회적 거리감을 조장시키며, 서로 의심하게 하고, 이웃끼리 서로 싸우게 하며, 모든 사람들을 소외되게 했고,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으며, 불신을 고조시켰고, 무기력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지배계급에 의존하게 했으며, 단순한 지역적인 문제에 모든 사람들이 분노하고 좌절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마법광란은 부의 재분배와 사회계급 타파를 요구하고 교회제도와 사회제도에 대결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더 가난한 자들로부터 박탈하였다. 마녀광란은 과격한 전투적 메시아니즘을 거꾸로 바꾸어놓은 것이었다.




-14,15 ‘대 마녀광란’ 중..




16.

관념의 유희(head trip)나 일시적인 기분 같은 것으로는 착취와 소외를 야기하는 물질적 근거를 바꿀 수 없다.




-‘결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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