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사 어렴풋이 그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다만 생존하기 위하여 현실의 부당한 행태와 그로부터 오는 자신의 고통을 참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만다. 때때로 무언가 '부당하다' 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나, 역시 그 자신은 '무력'하며 그것은 시정될 길이 없으므로 그는 곧 머리를 흔들어 그런 건방진 생각을 털어버린다. 인내는 그의 영원한 금과옥조로 된다.

 

2.

세상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에게 '잘난 사람'이 될 것까지는 기대할 수 없어도 최소한 이러한 '약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그뿐인가? 강자들이 판을 치는 모든 사회기구가 한결같이 새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치는 것은 '적응', '타협', '겸손', '순종', '온건' 등등의 '미덕'이다.

적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 당연한 삶의 요결, 전혀 의심할 여지 없는 공리처럼 되어 있다.

..(중략)..

바로 이것이 '적응할 줄 아는 인간'의 정체인 것이다.

사회는 이러한 인간을 여러가지 그럴 듯한 표현을 써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미화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설교는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다.

 

3.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약은' 자들이 참된 현실주의자는 아니다. 체념하고 굴종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일 수는 없다.

 

4.

그 자리에서 전상수 씨는 베갯머리에 앉아 눈물을 닦고 있는 그의 부인을 보고 미안하다는 말 몇 마디를 하고 나서는 베개를 뜯어보라고 하였다. 뜯어보니 그곳에는 꼬깃꼬깃 접어서 뭉친 5백 원짜리 지폐가 대여섯 장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놀란 얼굴로 남편을 보니, 남편의 주름진 두 볼 사이로 굻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태일이가 다달이 주는 돈으로 한동안은 술을 마셨는데 나중에는 그 어린 것이 뼈가 휘게 번 돈을 그렇게 쓰기가 죄스러워 술을 끊고 이렇게 안 쓰고 모아두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부인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남편은 잘못 만났지만 아들 하나는 잘 둔 것 같애, 그놈 하는 일 너무 말리지 마오.."

 

5.

아들은 웃었다. 얘기를 하면서도 내내 어머니에게 신경이 쓰여 가슴을 죄었는데 뜻밖에도 대범하게, 저렇게 농담을 하시니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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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긴 뭐가 아냐. 내가 세광의 터줏귀신이다. 개근 그게 사람잡는 올가미라는거야. 때려치우고 싶어도 3년 다닌 거 아까워 못하고, 다음에는 4년 개근 아까워 못하고, 사천 원 벌려고 아침 거르고 2천원 어치 택시 타게 만드는게 개근이라는 거다. 나도 4년 개근했어. 창립기념일날 은수저 한 벌이야. 아깝겠지만 말야. 종이 조각 하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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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때, 나는 의사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은 비어 있었다.

..(중략)..

나의 이해가 아마도 옳았을 것이다. 뻔한 소리였고, 하나 마나 한 소리였지만, 나는 그때 그의 뻔함이 무서웠다. 그리고 그 무서움은 그저 무덤덤했다. 그의 설명은 뻔할수록 속수무책이었다.

 

2.

아내의 죽음을 몸으로 감당해야 할 사람은 나였지만, 아내의 장례일정 속에서 나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3.

어째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그토록 확실히 존재하는 것인지요.

 

4.

죽음은 가까이 있었지만, 얼마나 가까워야 가까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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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중적 세미오시스가 언어의 세미오시스보다 더 <진실>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또 어느 정도까지 오해 또는 거짓말을 허용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층민들에게는 말 언어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보다 신빙성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연적 세미오시스를 통해 속이거나 또는 속임 당할 때, 그들은 더 많은 상처를 받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적 세미오시스에 대해서는 말 언어에 대해서처럼 체계적인 불신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략)..

하층민들이 말 언어를 불신하는 이유는 그것이 논리적 구문을 부과하기 때문입니다.

 

-'만초니의 거짓 언어' 중..

 

2.

칸트에게 웃음이 탄생하는 순간은, 우리의 기대를 허무하게 만드는 어떤 불합리한 상황이 나타날 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실수>에 대해 웃기 위해서는, 그 실수가 우리를 연루시키지 않고 우리와는 상관없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실수 앞에서 우리(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우리)가 그보다 우월하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헤겔에게 희극에 본질적인 것은, 바로 웃는 자는 우월감과 함께 다른 사람의 모순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진리에 대해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열등한 사람의 불행에 대해 웃도록 만드는 이러한 확신은 물론 악마적입니다.

피란델로는 이미 노년에 접어든 어느 노파가 온통 루주를 칠하고, 아가씨처럼 차려입고, 머리를 염색하고 다니는 예를 듭니다.

..(중략)..

바로 여기에서 사건, 일상적인 기대들의 단절, 내가 (다른 사람의 실수를 깨닫는) 웃을 수 있는 우월감이 나타납니다.

..(중략)..

하지만 여기에서 피란델로는 대립의 느낌은 <대랍의 감정>으로 바뀔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성찰이 새로운 과정을 수행합니다.

..(중략)..

그럼으로써 그 등장인물은 이제 더 이상 나와 분리되지 않게 되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나의 우월감을 상실합니다. 나도 역시 그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나의 웃음은 연민과 뒤섞이고, 미소로 변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희극에서 우모리스모로 이행하게 됩니다.

..(중략)..

가장 멋진 예는 바로 세르반테스입니다. 돈키호테가 하는 모든 짓은 희극입니다.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풍차를 거인으로 혼동하는 미치광이를 보고 웃는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세르반테스는 자기 자신도 역시 돈키호테가 될 수 있다는 것ㅡ아니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깨닫도록 내버려 두지요.

 

3.

그리고 만약 우리가 웃고, 미소를 짓고, 농담을 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에 대한 고상한 전력들을 세운다면ㅡ우리는 그렇게 할 줄 아는 유일한 종입니다. 동물들과 천사들은 그런 운명에서 제외되었으니까요ㅡ그것은 바로 우리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면서, 그것을 아는 유일한 종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다른 개들이 죽는 것을 보지만,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ㅡ최소한 삼단논법을 통해 알지는 못합니다.

 

4.

캄파닐레가 위대한 희극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죽음을 우울하게 바라보는 작가이기 때문이며, 무덤과 장례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길모퉁이의 자장가]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어 봅시다.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더라도......그런데도 모두들 그런 현상에 대해 놀라곤 한다. ..(중략)..여러분은 혹시, 초상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아직 집 안에 있는 가족을 방문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깜짝 놀라 있다. 마치 이 세상이 창조된 이후로 생전 처럼으로 발생한 아주 이상한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모두들 동요하고, 모두들 그런 사건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친척들이건 친구들이건 마찬가지이다. ..(중략).. <죽지 않았어야 해> <누가 그걸 상상이라도 했겠어?> 또는 죽음이라는 현상이 이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나타났을 경우에나 허용될 법한 말들을 한다.

놀라운 일인가? 사람들이 미쳤는가? ..(중략).. 만약에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 대신에, 그 친구가 절대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ㅡ 벌건 대낮의 번개처럼 ㅡ 들었다면, 아마도 그런 놀라움은 논리적일 것이다.  

..(중략)..

하지만 저 아기를 좀 보라, 저렇게 조그마한데 벌써 죽었다니. 저 나이에는 정말로 경찬할 만하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놀라운 조숙함의 경우이다. 하지만 우리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그토록 조그마한 아기가 도대체 어떻게 죽은 자들의 범주 안에 허용되었을까? 죽는다는 것은 절대로 농담할 만한 일이 아니다. 죽는다는 것은 아주 정말로 아주 진지한 일이며, 거기에 이르기 전에 수많은 빵들을 먹어야 한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수염이 있어야 하며, 수많은 시련들을 겪었어야 한다. 그런데 저 아이는 천국의 문 앞에 가서 말한다. <알겠어요? 나는 죽었어요>

..(중략)..

그 아이는 죽은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나이를 먹었을까? 자신이 해내려고 준비하고 있던 걸음마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용모는 갖추었을까? 몸무게는? 키는? 목소리는?

..(중략)..

그러니까, 그러니까, 부탁하건대, 다음번에는 최대한 엄격하게, 최대한 엄격하게!

..(중략)..

우리가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워있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예외없이 우리는 우리 옷들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을 것이다. 집 안은 친구들로 가득 찰 것이고, 이웃 사람들은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비명을 지를 것이고, 놀랄 것이고, 울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허둥댈 것이며, 모두들 쓸모없는 일들을 할 것이다. 걱정스러운 태도를 갖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우리 안에 갇힌 사자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오로지 우리만이 아주 평온할 것이다.

..(중략)..

우리는 어떤 종류의 생각도, 아주 조그마한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것이다. 맨 처음 침대 위에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몹시도 울었는데, 이제 마지막이 될 때 우리는 입가에, 비록 최상의 미소는 아닐지라도, 분명 우리의 미소들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모호하고, 아이러니컬한 미소를 띨 것이다.

 

바로 그 미소를 갖고 캄파닐레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우리를 속였고 또 위로했습니다.

 

-이상, '캄파닐레: 낯설게 하기로서의 희극'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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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면서부터 지구는 공 모양이다.

 

2.

그러나 바로 가장 간단한 일이 언제나 가장 힘든 법이다.

 

3.

그는 지금 아흔 살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중국까지 가기 전에 그것을 깨닫고 자기의 여행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때때로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면 나는 서쪽을 바라본다. 어느 날인가 그가 지쳐서 천천히,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숲속에서 걸어 나온다면, 그리하여 내게로 와서 '이제야 나는 믿게 되었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하고 말한다면 나는 참으로 기뻐할 것이다.

 

-이상 '지구는 둥글다' 중..

 

4.

주지육림에 묻혀 살든, 가난하게 살든,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에 살든, 다른 곳에 살든, 결국 매일같이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권태롭게 되고 만다. 그래서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바르셀로나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바르셀로나에 사는 사람들은 어딘가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왕처럼 사는 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왕이 믿는 것을 괴로와한다.

..(중략)..

그의 침대는 호화찬란하지만 그래봤자 그 속에서 잠자는 것 밖에는 별로 할 일이 없다. 

 

5.

누군가 "덤벼라, 콜롬빈, 나와 한번 싸워보자"라고 말하면, 콜롬빈은 "나는 너보다 약해"하고 말했다.

누군가 "둘에다 일곱을 곱하면 얼마가 되지?"하고 말하면, 콜롬빈은 "나는 너보다 머리가 나빠"하고 말했다.

누군가 "너는 저 냇물을 건너 뛸 자신이 있니?"하고 말하면, 콜롬빈은 "아니, 나는 그럴 자신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왕이 "콜롬빈, 너는 뭐가 되고 싶으냐?"하고 물으면, 콜롬빈은 "나는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벌써 무엇인가 되어 있어요. 나는 콜롬빈이니까요"라고 대답했다.

 

-이상 '아메리카는 없다' 중..

 

6.

사람이 생각없이 걸으면 박자에 맞추어 걷게 된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 박자에 어긋난다.

 

-'칼' 중..

 

7.

"주여, 나에게 술 주정꾼과 창녀와 도둑을 보내시어 내가 저들을 당신께 인도하도록 하옵소서" 이것이 신학교에서의 기도였었다. 이제 그의 기도는 "주여" 뿐이었다. 청중 가운데 그보다 덜 경건한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여러분들은 참으로 경건합니다. 정말 경건한 선남선녀들이십니다"하고 말하기 위하여 거기 있었던 것이다.

 

-'기곤씨' 중..

 

8.

그 까닭은 우리가 언제나 어떤 사람의 개인적 의사표현을 개인적 의사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는 언제나 민족성과 결부시켜 본다. 친절한 독일인들을 만나면 우리는 "그들은 전형적 독일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또 불쾌한 불란서인들을 만나면 우리는 "그들은 전형적 불란서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중략)..

스위스인의 모든 행동을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전형적 또는 비전형적으로 분류한다.

이런 이유로 어중간한 사람은 스위스인이 아니다.(신병훈련소가 스위스인에게는 훌륜한 역할을 하니까)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은 스위스인이 아니다.(그런 사람들은 이곳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동구 공산진영으로 가서 살면 되니까) 병역 복무를 거부하는 사람은 스위스인이 아니다. 일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스위스인이 아니다. "나는 스위스인이다."하고 언제나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는 사람은 스위스인이 아니다. 그리고 '진짜' 스위스인들은 이 모든 스위스인답지 못한 스위스인들이 시민권을 갖고 있고 전형적 스위스의 존속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한다.

..(중략)..

비전형적으로 될까봐 우리는 불안해 한다. 

..(중략)..

20년 뒤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보이는 스위스 속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소름이 끼친다.

..(중략)..

이리하여 그들은 국민들을 설득시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온건한 사회주의 정책은 중산층 스위스인을 유산계급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산계급이 된 중산층은 자기의 꽃밭을 지키기 위해서 토지 투기업자를 옹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것을 사람들은 관용이라고 부른다.

..(중략)..

우리의 언론기관은 이미 토론의 광장이 아니다. 토론이 없는 민주주의는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스위스인의 스위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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