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받은 식탁 - 세계 뒷골목의 소울푸드 견문록
우에하라 요시히로 지음, 황선종 옮김 / 어크로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1. 당신이 먹는 것을 말해달라

 

"Dis-moi ce que tu manges, je te dirai ce que tu es."

(Tell me what you eat and I will tell you what you are.)

본 직업인 법률가보다 미식가로 더 유명한 브리야 사바랭(Anthelme Brillat-Savarin)이 자신의 책 〈맛의 생리학 Physiologie du Gout〉에서 한 말이다.(1825) 그로부터 몇 십년 후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는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관하여 Concerning Spiritualism and Materialism>라는 글에서 "Der Mensch ist, was er ißt."라고 했다.(1863) 구글 번역기로 돌리면 '사람은 자기가 먹는 무엇'이라는 뜻이 나온다. 바로 "man is what he eats."라는 명제다.

이런 말들보다 더 유명한 "you are what you eat."은 미국의 영양학자 빅터 린드라(Victor Lindlahr)의 말이다.(1923)

셋 다 특별히 심오한 뜻은 없어 보인다. '철학자' 포이어바흐가 끼어 있어 뭔가 다른 심오한 뜻이 있을 것만 같지만 물질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이 나온다고 생각했던 유물론자 포이어바흐의 말 역시 글자 그대로가 아닐까. '내가 먹은 것이 나를 형성한다'는 소리. 여기서 '취향'을 찾든 '음식의 인문학'을 찾든 '다이어트'를 찾든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겠다.

셋 중에 어떤 말이 가장 '정치적'인가?

 

 

2. 그들만의 식탁

이 책은 '차별'이라는 주제로 음식에 접근한다. 저자는 '음식'이라고 했을 때 보통은 떠올리기 힘든 '차별'이라는 정치적인 주제로 '낮은 곳'들을 취재했다. 저자는 이런 관점을 후천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태생부터 이런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저자 우에하라 요시히로는 전근대 일본의 최하층 신분이 살던 '부락' 출신이다.

 

1873년 일본의 부락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소개하는 음식들은 케이블TV의 '복불복쇼'에 나왔던 혐오식품(혹은 건강식품)이나 디스커버리채널의 'MAN VS. WILD'에서 주인공 베어그릴스가 먹는 날것들과는 다른 차원이다.

하지만 결코 무거운 책은 아니다. 에필로그에 나와있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에는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게 되는 부락 문제를 넓은 범위에서 다루면, 재미있는 글이 되고 많은 사람이 과심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자칫 무겁고 심각하게 빠질 수 있었던 주제를 '음식'이라는 소재로 접근한 발상이 놀랍다.

 

저자는 그들의 식탁에 찾아가 함께 식사를 한다. 취재 중 만난 미국 흑인이 "우리 집의 소울푸드가 가장 맛있다."고 한 것처럼, 사실 이방인이 '소울푸드'의 맛을 제대로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사실은 소울푸드가 단순히 음식, 맛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저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들의 식탁에 앉아 함께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서술 방식은 건조하고, 맛에 대한 현란한 표현도 없다. 그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담담하게 풀어낼 뿐이다. <지식e>처럼 고민거리를 한아름 안겨주는 것도 아니고, 읽으면서 약간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로버트 설리번의 <쥐들>이라는 책보다는 훨씬 흥미롭다.(사실 아마추어가 찍은 흑백 사진과 취재라는 형식 외에 비슷한 점은 거의 없다. 절판되어 구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쥐에 관심이 있지 않거들랑 읽지 말길. 나도 읽고는 버려버렸으니까.)

 

미국 흑인들의 프라이드치킨이라는 '익숙함'으로 시작해서, 각종 차별의 역사가 녹아있는 음식들로 '놀라움'과 '씁쓸함'을 선사하다가, 저자의 고향 일본 부락으로 돌아가 부락음식을 먹으며 추억을 회상하는 '따뜻함'으로 마무리한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소울푸드' 중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역시 '고슴도치 요리'였다. 이방인인 저자가 물어보자 '전혀 먹지 않는다'고 능청을 떠는 집시들의 태도, 식재료로는 듣보잡인 고슴도치를 먹는다는 사실, 고슴도치를 잡는 방법 등 모두 흥미로웠다.

가장 흥미를 끌었던 고슴도치 요리 이미지를 얻고 싶어 열심히 구글링을 해보았지만 이 정도.

 

 

 

3. 우리의 소울푸드

이 책은 열려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 읽고나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긴다. '우리의 소울푸드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개고기, 막창, 곱창, 순대, 족발, 어묵, 부대찌개, 닭똥집, 설렁탕, 각종 국밥 등등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적어보았다. 적다보니 기준이 애매하다. 서민들의 음식이 모두 소울푸드인가? '차별'이라는 정치적 행위가 있어야 원뜻에 충실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진짜 소울푸드는 내가 진짜 듣도보도 못한 음식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차별받은 집단은 대체로 가난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묶어서 생각해도 크게 벗어날 것 같진 않다.

 

일본의, 미국의, 네팔의 소울푸드가 아닌 우리의 소울푸드. 너무 무겁지 않게 않게 딱 이 책처럼만 해서 하나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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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은 기적 알맹이 그림책 17
수지 모건스턴 지음, 최윤정 옮김, 첸 지앙 홍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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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가 분명히 갈리는 책이네요. 어른들 입장에서는 아이들에게 조금 위험한 가치관(?)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이의 말이라기보다는 어른의 말에 가깝지만, 개인적으로는 속이 다 시원했던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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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거북이 지만지 고전선집 433
후안 마요르가 지음, 김재선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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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9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처음 접했던 지만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지만지'는 '지식을 만드는 지식'을 줄인 말로 여기서 설명하는 것보다 그들의 블로그를 한번 훑어보는 게 빠를 것 같다. http://zmanz.blogi.kr/

지만지가 생각하는 고전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2009년에 막스 상을 받은 이 희곡 <다윈의 거북이>가 '세월의 검증'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고전으로 선택되었다면 그만큼 대단한 무엇이 있으리라. 그것이 아니라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이라는 수식 외에 '고전'이라는 말은 빼야할 것 같다. 안타깝게도, 작품을 접하고 난 내 느낌은 현재로서는 부정적인 쪽에 가깝다. 착상의 기발함은 마음에 들지만 헤리엇이라는 한 인물의 입을 통해 문제의식과 주제를 너무나 정직하게 말하고 있는 <다윈의 거북이>가 과연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책의 만듦새부터 보자면 표지의 색부터 상당히 이채롭다. 이 시리즈를 위해서 개발한 고유의 색이라고 한다. 그 느낌은 '컬러차트에도 없는 고유의 색'이라고 자부한만큼 상당히 신선하다. 동시에 '고전'이라는 주제와도 잘 어울리는 것으로, 언뜻 대치될 것 같은 '새로운'과 '오래된'이라는 두 수사를 모두 아우르는 색이다. 판형 역시 마음에 쏙 드는 편이었다. 다음, 번역. 크게 실망스러운 부분은 없었으나 기본적인 어문규정을 지켜줬다면 조금 더 신뢰가 갔을 것 같다. 예를 들면 한국어 체계에서 말줄임표를 쓸 때는 점의 갯수를 여섯 개로 하는 것이 약속이다. 사소해보이지만 어떤 독자에게는 내용의 몰입을 방해하는(비록 순간적이나마) 요소, 출판사와 독자의 신뢰에 작은 금을 내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용에 있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책/eX libris] - 후안 마요르가, <다윈의 거북이> 중에서 여기에 옮겨두었다. 주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모든 것은 가능하다'라는 말에 대한 다윈의 거북이 엘리엇의 회상이었는데, 이 책에서 이 말은 히틀러가 했던 가상의 발언으로 둔갑되어 홀로코스트를 의미하고 있었다. '정말 모든 것은 가능한가?'하고 스스로 물어보게 되는 기막힌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가능해서는 안 될 것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심코 지나쳐버린다. 한편 유럽의 역사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겪은 헤리엇은 교수에게 인간이 무언가 배우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움베르토 에코가 관용에 대해 한 말이 생각났다.


   
  사실, 타자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욕구를 타인들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인류의 천년에 걸친 성장의 결과입니다.
 
   


굳이 유럽의 역사를 목격한 헤리엇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에코가 말하는 그 '결과'가 아직 보편적이지 않다는 건 우리의 역사, 아니 역사가 다 뭐냐, 그냥 현재 주변 사람들만 봐도 안다.


오늘 10월 9일부터 11월 1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 프로그램 중 서울시극단이 <다윈의 거북이>를 무대에 올리는데 한번 보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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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탐욕스러운 사람을 조종하기란 인형 극장의 어린 관객들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제때에 간파한 저 선택된 사람들에 대해 나는 진정으로 경탄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라고 썼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고등 사기꾼과 익살꾼은 거의 같은 직업이라고 볼 수 있다.

 




2.

그들이 자신의 손이나 아니면 발로 만들어 낸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술작품 옆에 서 있을 때, 그들의 눈에 빛나는 메시아적 사명 의식에는 우리도 덩달아 감명을 받게 마련이다.

 




3.

그러나 이제 우리는 거장 중의 거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이다. 세기적인 작품, <브릴로 상자들>을 최초로 창조한 사람에게는 무릎을 꿇는 것 말고는 달리 경의를 표할 방법이 없다. 이 ‘브릴로 상자들’은 한 만능 천재가 이웃 약국에서 손수 구입한 것인데, 그가 바로 미국의 위대한 구매자이자 화가인 앤디 워홀이다.

…(중략)…

허나 명명백백한 사실은, ‘존재의 예정된 조화’와 같은 표현들이나, 아니면 휘황찬란한 카탈로그 속에 인쇄된 이 명작들에 대한 모든 것은 순전히 유머로만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겁에 질린 관람객들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고, 그렇게 되면 어리둥절해진 관객은 아예 침묵하거나 아니면 다른 멍청한 사람들처럼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러한 작품들이 지닌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오락적 가치를 인식한다면, 그 작품들을 진정으로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4.

누구 한 사람이라도 그 작품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던가? 나는 그런 웃음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5.

그러나 여기에는 작지만 아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동네 슈퍼에서 할인 가격으로 살 수 있는 토마토 깡통을 전시한 게 아니라, 시각적인 정확성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필치와 기법을 개발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법을 쓰면서도 그들은 동시에 진실이나 아니면 인간 및 자연의 본질적인 것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6.

그렇지만 이와 같은 장난이 음반을 통한 현대음악에서 제대로 관철될 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분명 음악은 단지 그것이 재현되는 동안만 음악으로서 존재하지, 투자 가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소위 현대예술이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더욱더 서먹서먹하게 만든다. 현대예술은 대부분의 사람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사유재산처럼 애지중지하는 이른바 진보적 엘리트에게는 일종의 특권이다.

우리가 꼭 레닌의 열렬한 추종자는 아니더라도 ‘예술작품은 본래 다수의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라는 레닌의 말에는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레닌 말의 강조점은 바로 ‘다수’에 있다. 적어도 나는 지금까지 자신의 피아노 조율사를 위해 교향곡을 지었다는 작곡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오직 자신의 이발사 한 사람만을 위해 자서전을 썼다는 작가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현대미술 작품은 전적으로 두 종류의 사람들, 즉 미술 비평가와 미술 장사꾼들을 위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7.

현대미술에 대한 나의 경멸감에 분명히 동조하는 비평가들의 평론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고, 또 그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예술에 관한 진실에 대해 써주기를 학수고대했지만 그 기다림은 헛된 것이었다. 행간 사이에서는 못마땅하다는 투의 목소리를 읽을 수 있었지만, 큰소리가 판을 치는 우리 시대에 과연 누가 그런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사가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나는 어네스트 H. 곰브리치를 들겠다. 나는 만족감과 존경심을 가지고 그의 저서를 읽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너무 점잖고 너무 배려하는 것이 많다. 쿠르트 슈비터스와 같은 영리한 모더니즘 화가가 “나는 예술가이다. 그러므로 내가 침을 뱉기만 해도, 그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선언했을 때, 85세의 이 노학자는 그러한 발언에 차분히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예술이 단지 인간 개성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는 공감하지 않는다.”

만약 곰브리치 교수에게 끝내 그의 솔직한 견해를 피력하도록 압력이 가해진다면, 기껏해야 그는 요셉 보이스와 그의 익살을 두고 이렇게는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평가하지 않는다.”

 




8.

그렇다.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면서 미적인 만족을 느낄 수 있었던 그러한 시대는 완전히 지나가 버렸다.

그 사이 그림은 그것에 딸린 부수적인 텍스트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미리 20여 쪽에 이르는 팸플릿을 공부하지 않고는 전시회의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 이제는 그림 자체가 사이비 철학을 설명하는 삽화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유명한 작가이자 미술 연구가이기도 한 탐 울프가 이제부터는 그림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는 해설을 확대해서 걸자는 제안을 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니면-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제안이지만-벽에 단지 가격표만을 걸어 놓는 게 어떨는지.

 




9.

납세자들의 돈을 가지고 자신들의 예술 지식을 입증하고자 하는 고등동물의 저 불타는 욕구를 설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모든 관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파킨슨 교수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베스트셀러인 <낭비의 법칙>에서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다.

 

잘 알다시피, 지출이란 항상 수입의 한계선까지 올라간다. 이것이 개인의 가계뿐만 아니라 공공 재정에 있어서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징세 수입이 많더라도, 그 수입을 모두 써버리거나 더 많이 지출을 하고 싶은 간절한 욕구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정부는 개인과 차이가 난다. 즉 정부는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는 경우가 매우 드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세상은, 수억 단위의 돈은 감도 잡지 못하면서 수천 단위의 액수에 대해서는 잘 훈련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의 위원회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수억 단위의 프로젝트는 몇 분 안에 가결하면서 사무실에서 소비하는 커피 값을 두고는 몇 시간 동안이나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10.

편지를 보낸 독자들의 분노는 드디어 볼프 포스텔의 메가톤급 괴물로 집중되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마치 정통 유대인처럼 옷을 입는 이 예술가는 시의 문화담당 장관에게 아주 독창적인 제안을 했다. 이러한 제안은 앞서 다른 세 도시에서도 했던 것으로 두 대의 최신형 캐딜락을 거꾸로 세운 채 서로 기대어 놓고, 그 위에 상당량의 콘크리트를 부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포스텔 씨는 자신의 기막힌 착상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작품 <신화 자동차>는 에로티즘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펴면서 그는 이 두 대의 콘크리트 승용차가 <옷을 벗은 마하(마야)>의 형상을 띠도록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대가는 그의 철학의 테제를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즉 그의 매머드 작품은 ‘황금 송아지를 둘러싸고 벌이는 운전사의 24시간 동안의 춤’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는 배기기 힘든 그런 어처구니없는 난센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한 가지 답이 있다. 즉 논거가 불합리하면 할수록 그 효과는 더 놀랄 만하다는 것이다.

…(중략)…

그 토론에서 청중의 한 사람이 왜 하필이면 포스텔이 그의 콘크리트 괴물을 라팔로 조약을 체결한 장본인이며 1922년 비열한 암살의 희생양이 된 빼어난 정치가 발터 라테나우의 이름을 따서 붙인 광장에다 세웠느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브록 교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 반항적인 질의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천둥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라테나우를 언급하고 그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먼저 라테나우의 저서를 읽어 보도록 권유하고 싶소. 그의 저작은 다시 편집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당신은 당신의 입장과는 반대되는 의견들을 하나하나 발견하게 될 것이오. 라테나우도 그 당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내용의 토론을 했었소. 그의 저술을 읽어 보면 이런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수갈채와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이 반항적인 질의자는 창피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고, 모든 사람들은 그를 모른 체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인상적인 발언이 지닌 트릭을 눈치 챘다. 나는 이 독창적인 발견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러한 트릭을 ‘라테나우 선수 치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그의 트릭은 매우 단순하지만 그 효과는 즉각적이고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뭔가 알지 못하고, 읽지 못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피함을 느낀다는 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뭔가를 좀 알고 있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이길 승산이 전혀 없는 것이다.

브록 교수의 감동적인 연설, 다시 말해 발터 라테나우가 살아 있다면 콘크리트 방공호 에로티시즘을 지닌 포스텔 식의 ‘누워 있는 마하’ 전시회에 열광적으로 찬성했으리라는 그의 연설이, 단지 미학 교수의 넘쳐나는 환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충분히 짐작했으리라 생각된다. 아마 브록 교수가 강연을 하는 동안 고야는 지하에서도 몸을 뒤척였을 것이고 라테나우 역시 현기증에 눈앞이 어질어질했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발터 라테나우는 모더니즘 예술관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예술은 경계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예술의 가장 고귀한 경계는 민중이며 또 민중의 자연스런 취미이다.’

…(중략)…

방문객으로서 베를린에서 겪었던 나의 모험담을 마치기 전에 베를린의 빌머스도르프 구에 사는 몇몇 대담한 삶들의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보아야만 하겠다. 어느 날 저녁 이들은 그들의 단골 술집에서 도덕론자인 포스텔과 한번 경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그들 스스로 진보적인 조각품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시 차원의 세금 보조는 기대할 수도 없는 처지라 다 낡은 차를 구해다가, 약간의 형이상학적인 부식 효과를 주기 위해, 그것에 콘크리트를 붓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그 작품을 포스텔의 원작 옆에 세워 두었다. 베를린 시의 문화장관은 다음날 그 광경을 보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드디어 그는 그것도 예술작품이라는 결정을 내리고는 그것을 있는 자리에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11.

이 추모전에서 먼저, 보이스가 세상의 혼돈을 퇴치하기 위하여 7일 동안이나 뉴욕의 한 전시장에 가두어 두었던 코요테에 대해 말할 때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흥분에 떨리고 있었다.그러고 나서 그의 몇몇 숭배자들이 화면에 비쳤다. 그들은 예외 없이 보이스를, 모든 시대를 초월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의 하나로 불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어느 누구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요셉 보이스의 전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충성스런 숭배자들은 이렇게 덧붙였다. “보이스의 보편적인 작업 행위를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의 독창적인 작품 모두를 간략하게 평가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니까요…….”

“앞으로도 수세대에 걸쳐 그의 엄청난 예술적 유산은 연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외에도 많은 언급이 있었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그 누구도 자세히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12.

예술가이자 교수였던 보이스는 유아 욕조에다 다 낡은 반창고와 가제, 바셀린 크림을 붙여서 <수집자 오브제>라는 작품을 만들어 뮌헨의 한 예술 전문가에게 팔았다. 그는 그것을 1973년 다시 부퍼탈 미술관에 임대했다. 이 ‘욕실 오브제’는 또다시 다른 오브제와 함께 레버쿠젠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이곳 미술관의 책임자들은 이 ‘예술작품’이 전시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욕조는 창고에 놓이는 신세가 되었다.

바로 이즈음 사민당의 레버쿠젠 지부가 이 미술관에서 어떤 축제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다. 당원들이 의자를 찾던 도중 예의 그 창고에서 문제의 욕조를 발견하고는 맥주를 차게 하는 데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서 그 욕조를 가져가 버렸다. 결벽증이 있는 몇몇 당원들은 그 욕조가 너무 지저분하다고 생각해서 욕조에 붙어 있던 반창고와 가제, 바셀린을 조심스럽게 긁어내었고,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 명작은 망가지고 말았다. 전문가들의 감정에 의하면 그 손상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대가 보이스의 말을 직접 인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나서서 이것이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나는 그 대상이 ‘나는 완성되었습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분명 앞에서 말한 유아 욕조는 너무 어려서 이 대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말하기 싫어하는 내향적인 욕조였을 것이다. 보이스 스스로도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열린 화법 또는 부서지기 쉬운 화법이라 부르는 것은 만약 우리가 열려 있는 상태나 구멍이 나 있는 상태를 원할 때는 꼭 필요하다. 그래야 만들어질 작품이 말하려는 의도와 관련하여 생명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모더니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지만, 돌처럼 굳어 있는 대상들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13.

세상 사람이 그들의 작품을 곧이곧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가장 놀란 것은 아마도 예술가 그들 자신이었을 것이다.




 

14.

자신의 작품이나 자신의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에 대한 사랑 없이 진정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배려나 애정이 빠지게 되면 이기주의나 오만, 허영심, 아니면 효과만을 노리는 마음만이 중요하게 된다. 예술은 관객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호소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예술은 그림을 보는 관객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현대예술이 저지르고 있는 최대의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객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경멸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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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것에 대한 선망'에 대해 말하자면, 그런 동경보다도, 저는 오히려 그런 거대한 것의 비극성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거대한 육체가 덧없이 스러지고, 고래가 해체되어가고, 아까 제가 여학생 얘기도 했지만 거대한 육체 안에 깃든 비극성에 저는 더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생명체가 크다는 것은 굉장히 비극적인 거죠. <원령공주>라는 일본 만화영화에 보면 무시무시하게 큰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그건 매우 아름답지만 그래서 더 비극적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상상력도 실은 매우 좁아지면서 세밀해지고 있는데 전 그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현대사회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질서 속에서 거대한 정신과 그 아름다움이 스러져가는 데에 대한 애절함, 이 속엔 그런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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