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
최은광 지음 / 길벗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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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종이책 및 이북을 구매한 후 주관적으로 남기는 리뷰입니다. (내돈내산)

"작가의, 작가에 의한, 작가를 위한", "작가를 위한 단 하나의 프로그램"



이는 본 서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를 집필한 저자 최은광 작가가 '스크리브너(Scrivener)'를 소개하는 문구이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크리브너'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스크리브너는 작가를 위해 디자인된 글쓰기에 최적화된 전문 프로그램이다. 스크리브너는 MS워드나 한글 등의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워드프로세싱 기능뿐만 아니라 작가가 글의 전체적인 체계를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아웃라이닝 기능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점때문에 스크리브너는 단순한 텍스트 편집기를 넘어선 '글 만들기 프로그램'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가고 있다. 또한, 스크리브너는 텍스트화된 문서와 메모 뿐만 아니라 그림, 소리, 동영상, 웹페이지 등 다양한 형태의 메타데이터를 관리할 수 있는 툴(Tool)도 제공하고 있다. 요약하면 스크리브너는 작가들이 글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관련자료를 수집하고 소주제별 글을 작성하고 대주제에 맞춘 완결된 글을 완성시키기까지 작업과정과 흐름에 맞춘 모든 기능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빈 화면이 한 권의 책이 되기까지 글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라는 책의 표지에 표기되어 있는 문구가 스크리브너가 어떤 프로그램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스크리브너는 궁극의 집필 프로그램, 글쓰기에 최적화된 프로그램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고 스크리브너를 사용하고자 하는 작가들도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스크리브너를 사용하기 위한 진입장벽은 대단히 높은 편에 속한다. 스크리브너 자체가 워낙 많은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만큼 유저들이 처음에 적응하면서 사용 방법을 익히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스크리너에 대한 매뉴얼은 방대한 분량의 영어 버젼만 존재하고 있고, 한글로 된 매뉴얼이나 강의도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스크리브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써보고 싶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입문을 하고 싶어도 지레 겁을 먹고 발걸음을 돌린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스크리브너 공식 포럼이 활성화되어 있지만, 영어로만 소통이 이루어지는 탓에 한글 사용자가 접근하기는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전에 스크리브너 사용하기 위해 몇차례 시도해보다가 발걸음을 돌린 경험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학, 금융, 여행, 동영상 편집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들에게 실전적인 지식을 소개하고 있는 저 유명한 길벗출판사의 '무따기 (무작정 따라하기)' 시리즈의 신간으로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실제로 소식을 듣고 필자는 이북 버젼을 구매하였고, 오프라인 서점에서 종이책 버젼도 추가로 구매하였다.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는 국내 최초의 스크리브너 가이드북으로 그동안 스크리브너에 호기심을 가지고 써보고 싶었지만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던 많은 작가들에게 단비와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는 국내 사용환경에 맞는 윈도우 버전으로 소개하고 있다. 애플 환경에 익숙한 작가라 할지라도 윈도우 사용자 수가 절대적인 국내 환경에서, 맥 유저가 공유나 협업을 하긴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아이폰과 아이패드, 맥북을 쓰고 있는 소위 말하는 '앱등이'지만, 공유나 협업 문제로 윈도우용 PC를 별도로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결국 윈도우 환경에 맞는 글쓰기 프로그램을 쓰고 있다고 알고 있다.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는 입문자도 따라할 수 있는 쉽고 자세한 설명으로 독자들이 스크리브너 기능을 마스터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글이 완성되는 작업과정에 맞춰 기능을 소개하고 있어서 스크리브너의 일부 기능에는 익숙하나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은 작가들이 필요한 기능만 골라 익힐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 최은광 작가는 독자들이 글의 종류와 작업의 방식에 따라 필요한 기능을 바로바로 찾을 수 있도록 했고, 목차 구성대로 학습을 하면서도 흥미로운 개념이나 기능을 즉시 찾아볼 수 있도록 책을 구성하였다.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는 5개의 Chapter로 구성되어 있고, 처음에는 프로그램의 설치와 주요 기능을 설명하여 독자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이어서 아이디어 구상, 글의 구성, 완성 후 출력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글쓰기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의 흐름에 맞추어 목차를 구성하여, 독자들이 쉽게 따라하면서 자연스럽게 한 편의 글이 완성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Chapter 1 시작하기 전에'에서는 스크리브너란 어떤 프로그램이고, 대표적인 기능은 어떤게 있으며, 프로그램 설치와 사용환경은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Chapter 2 기초 기능 익히기'에서는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외관과 기본 메뉴의 구성에 대해 설명하고 문서작성과 편집은 어떻게 하고 글의 조직과 구성, 발행은 어떻게 하는지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Chapter 3 집필의 시작 - 아이디어 정리하기'에서는 아이디어 구상을 거친 후 수집한 자료를 어떻게 정리하고 반영해야 하는지, 개요 작성을 위한 시놉시스 작성방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Chapter 4 집필의 전개 - 체계화하기'에서는 글을 세부적으로 분류하고 전체적인 글의 얼개와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Chapter 5 집필의 마감 - 다음어서 출판하기'에서는 퇴고와 글을 마무리하고 출판을 위한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또한 책에서 언급한 기능들에 대해 작가가 실습 예제, 영상 강의, 심화 학습 자료 등을 제공함으로서 독자들이 실제로 사용해보면서 익힐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실습 예제는 난이도를 고려하여 구성되어 있어서 가장 쉬운 기능부터 차근차근 익히면서도 자연스럽게 심화학습까지 가능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또한, 스크리브너가 보유하고 있는 기능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책에 담지 못한 내용을 추가로 다루기 위해서 작가가 직접 개설한 스크리브너 전용 블로그를 통해 추가적인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블로그에는 동영상 강의도 제공하고 있고, 스크리브너 최신 업데이트 내용과 한글 패치도 직접 작업하여 제공하고 있다. (블로그 :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 -- 최은광 (길벗, 2023) | 독자 지원 블로그 (eunkwangchoi.com) 특히 50개가 넘는 저자 영상 강의가 무료로 제공되어 있어 헷갈리는 부분을 바로바로 해결할 수 있고, 추후에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단축키 모음, 심화 학습 등 독학에 필요한 자료는 물론, 웹소설 집필용 템플릿까지 제공되어 실제 작업에도 활용할 수 있다. 템플릿은 웹소설 작가 커뮤니티에서 공유되어 온 여러 도구와 작가가 직접 제작한 도구를 결합해서 스크리브너 전용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단순히 양식만 모아둔 것이 아니라 스크리브너의 고유 기능을 구석구석 적용한 작가의 노하우와 꿀팁이 녹아있다.




책의 서두에서 최은광 작가도 언급하고 있지만 '스크리브너(Scrivener)'의 사전적 의미는 '필경사 (筆耕士, scribe)'이다. 필경사는 저 유명한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 등장하는 바로 그 필경사로 '손글씨로 글을 적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또는 전문가'을 의미한다. 타자기가 등장하기 전에는 필경사가 일일이 손 글씨로 작업을 해야 했다. 타자기가 제공하는 수작업이 필요 없는 손쉬운 입출력 기능은 그 자체로 혁명이었고, 당시 개발자들이 목표로 삼았던 것은 두 가지 였다. 바로 '간편한 입력'과 '깨끗한 출력'이었다. 그 이외의 사항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저 두 가지만으로도 세상이 뒤집힐 만한 혁신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PC가 보급되고 타자기의 기능이 워드프로세서로 이식된지 오래되었지만 글쓰기 프로그램은 큰 발전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현대의 작가들에게는 어떤 글쓰기 프로그램이 필요할까? 수많은 글쓰기 프로그램이 저마다의 장점을 어필하고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작가에게 필요한 글쓰기 프로그램은 글을 작성하고 보관하며 재구성하는 기능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크리브너는 단순한 입력과 출력에 그치지 않고 글쓰기의 작업흐름에 따라 아이디어를 수집, 정리, 배치하고 구조화하는 프로그램이다. 감히 말하건대 스크리브너는 디지털 시대의 '필경사'라 생각한다. 아직 스크리브너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는 초보 유저에 불과하지만, 스크리브너의 탄생 배경도 그렇고 하나 하나 기능들을 익혀가면서 이런 나의 생각은 더 굳어져 가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필경사를 마스터하는 그 날까지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와 함께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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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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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찰리 채플린은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남겼다이는 일견 행복으로 충만해 보이는 삶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고통삶에 대한 ‘비의(悲意)’가 내포되어 있다는 삶의 내밀한 속성을 잘 포착해낸 체험적 진리라고 생각한다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제임스 설터도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했다이는 저마다의 방향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잎맥처럼 삶은 다면적이고 정답을 찾기 힘든 것이지만삶에 대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멀리서 숲을 조망하기 보다는 숲 안으로 깊숙이 침잠하여 나뭇잎의 형태와 주위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그 미세한 변화들에 주목해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에는 비록 가난하지만 친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다복한 가정과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노부부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대비되는 두 가정이 등장한다. 멀리서 보면 이 가운데 행복해 보이는 가정을 누구나 쉽게 평가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 설터의 말처럼 삶은 변화무쌍하고 다면적인 것이며,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해서는 숲 안으로 침잠하여 그 미세한 감정의 떨림들을 느끼고 경험해봐야 한다. 클레어 키건은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마다 적확한 단어를 사용하여 분위기를 선명하게 전달하지만 복잡미묘한 삶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라는 번역자의 소설에 대한 평가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약간 어려운 단어 때문에 쩔쩔맸지만 킨셀라 아저씨가 단어를 하나하나 손톱으로 짚으면서 내가 짐작해서 맞추거나 비슷하게 맞출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출발하는 것이 느껴지고, 전에는 갈수 없었던 곳들까지 자유롭게 가게 되었다가 나중엔 정말 쉬워진 것처럼." (p. 83)

 

 

<맡겨진 소녀>는 혈육관계로 묶인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일면식도 없는 먼 친척집에 맡겨지는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탕아', '골칫덩이'라는 말을 자식에게 서슴치 않는 부모에게 소녀는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우연한 계기로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 소녀는 자신 보다 먼저 소녀의 신을 신겨주고, 소녀의 걸음에 맞춰 보폭을 줄이는 다정하고 세심한 돌봄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킨셀라 아저씨와 손을 잡은 순간 소녀는 그동안 아빠가 내 손을 한번도 잡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당혹스러운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라리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소녀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혼란스러워한다. 때로는 순수한 의도의 사랑과 다정함 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이에게는 슬픔과 아픔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소녀는 깨닫는다. 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후 소녀는 집에서의 삶과 새로운 곳에서의 삶의 차이를 서서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그 여름 그 곳에서 소녀는 인생 처음으로 짧지만 빛나는 나날들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하지만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삶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서로가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누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오늘밤 너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만 에드나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에드나는. 남한테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p. 72)

 

 

삶은 상실과 결핍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다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상처 받은 인간은 소설 속 킨셀라 부인처럼 악의 없는 실수를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불완전함이야말로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채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매듭이 되는 것 아닐까신뢰와 사랑자발적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구축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은 불완전한 현실을 일정 부분 해소시켜주는 심연의 해독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어주고삶을 살아가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는 것은 일견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인 행위처럼 보이는 사랑우정신뢰와 같은 가치들이다서로를 향해 뻗는 온기 어린 손짓이 결국 메마른 삶에 활기가 되어 내일을 밝히는 희망이 된다.

 

 

소설을 읽으며 삶의 내밀한 영역까지 뜯어보면 인생이란 희극과 비극강자와 약자피해자와 피의자가 뒤섞인 영화와 같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어쩌면 산다는 것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리는 빗속에서도 춤추는 일에 가까운 것이지 않을까? 삶이란 두려움 속에서도 짓눌리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내면서 지속되는 것이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쌓여진 사소하고 다정한 것들이 모여 지리멸렬한 생을 흘러가게 하는 위대한 힘이 생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다정하고 세심한 것들은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처음에는 아프게 다가올 수 있지만, 결국 그 진심이 담긴 호의가 마음을 움직이고, 삶을 비추고, 온기를 불어넣게 될 것이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p. 98)

 

 

가정은 정형화할 수 없는 것이기에 형태와 구성은 제각각이지만 하나의 가정은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이룬다. 가족은 더 이상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지는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구성원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맡겨진 소녀>는 내게 원자화된 개인이 새로운 형태의 분자 가족을 형성하는 것이 가족의 새로운 정의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가족의 틀을 파기하고, 친족 관계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가족은 아니지만, 혈연으로 얽힌 관계보다 정서적 동질감이 빚어낸 마음의 끈이 더 끈끈할 수 있다는 것, 진정한 가족은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맡겨진 소녀>는 가족이 성립되려면 적극적으로 상대방과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 또한 가부장 제도의 안전망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것을 극복할 경우 행복이라는 화학반응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개가 됐구나. 저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p. 75)

 

 

소녀가 킨셀라 아저씨와 산책을 할 때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두 개의 불빛은 어느 순간 그 사이 어딘가에서 또 다른 불빛이 고개를 내밀며 찬란하게 빛나는 세 개의 불빛이 된다. 이는 킨셀라 부부와 소녀가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하였음을 상징한다. 엄마소의 우유 대신 인간이 만든 이유식을 먹으며 성장하는 송아지들처럼 겁에 질린 어린 암소는 우연한 계기로 맺어진 인연을 통해 삶을 개척해나갈 힘을 얻는다. 굴곡진 삶을 견뎌내야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묵묵히 지켜봐 주고 지지해 줄 가족의 따뜻한 관심과 조언 아닐까? 세월의 일렁임을 힘겹게 견뎌내야 할 때 내가 살아 있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 가족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이것 이상의 응원이 있을까? 각자가 가진 삶의 조각들이 가족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완전한 조각으로 완성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행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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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어사 - 지옥에서 온 심판자
설민석.원더스 지음 / 단꿈아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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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컨텐츠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측면에서 보면 저자는 타고난 스토리텔러의 면모를 보이는데, 소설가로서는 어떨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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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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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여기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슈만이 쇼팽을 처음 보고나서 그 경이로움에 대해 남긴 소회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 슈만은 그만의 감성이 담겨 있는 독창적인 음악으로 유명하지만쇼팽멘델스존브람스 등을 발굴해낸 음악 비평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특히자신과 동갑내기인 무명의 작곡가 쇼팽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보고천재의 탄생을 대중에게 알렸던 음악사상 최대의 찬사가 담겨 있는 그의 평론은 쇼팽이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음악 애호가들에게 널리 회자되는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다.




 


 여러분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거장의 숨결이 느껴지는 새로운 추리소설이 탄생하였습니다. 그것도 시리즈로요.”

 


 다소 낯 간지러운 표현이 될지는 몰라도, M. W. 크레이븐의 <퍼핏 쇼>를 읽고 나서 내가 느낀 소회는 쇼팽의 음악에 대한 순수한 경이와 찬사존경이 담겨 있는 슈만의 표현을 빗댄 위와 같은 문장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물론 나는 슈만 처럼 해당 업계의 전문가거나 엄청난 영향력을 보유한 사람은 아니지만, 오랜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또한 꾸준한 서평가로서 마치 슈만이 쇼팽을 처음 보고서 느낀 흥분 및 경이로움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굳게 믿는 <퍼핏쇼>를 읽고 느낀 내 소회를 이 리뷰를 통해 조심스럽게 독자들에게 전달해보고자 한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디 이 같은 진심이 출판사와 또 다른 독자들에게 전달되어 이미 영국과 일본 등 2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는 시리즈의 다음 권들을 빠른 시일 내에 번역된 책으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추리소설의 애호가라면 익히 알고있겠지만 트릭과 반전은 추리소설의 핵심인만큼 지금까지 나온 추리소설에 대한 서평은 주로 독자들이 해당 작품을 읽었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여 작품의 스토리와 트릭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하지만 이 같은 리뷰방식은 양날의 검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당 소설을 읽은 독자들끼리 전체적인 스토리의 얼개를 평가하고, 트릭이 얼마나 정교했는지, 반전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를 논하는 측면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하지만, 해당 소설을 아직 접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트릭과 반전을 포함하여 리뷰를 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하겠지만 아직 소설을 읽지 못한 독자들이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리뷰에 앞서 나는 이 같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소설이 왜 뛰어난 추리소설인지 논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연히 작품의 얼개와 트릭, 반전을 포함하여 언급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같은 리뷰방식은 이 리뷰를 쓰는 목적과는 맞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대로 추리소설 애호가이자 서평가로서 나는 이 리뷰를 통해 오랜만에 추리소설을 읽으며 느낀 충족감과 기쁨을 또 다른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이로서 워싱턴 포 시리즈의 다음 권들을 만나볼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다. 따라서 나는 대략적인 작품의 줄거리를 소개하면서 스포일러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이 작품이 왜 뛰어나고 재밌는 작품인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언급하는 리뷰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 작품의 트릭이나 반전 보다 작품에 대한 소개와 가이드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으니 본 도서를 아직 읽지 않은 미래의 독자분들도 안심하고 이 리뷰를 보시길 바란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영국 컴브리아 지역을 지켜 온 '환상열석'에서 불에 탄 시신들이 잇달아 발견된다. 수사관으로서 누구 보다 뛰어난 직감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관계에는 다소 서툰 중년 남자 '워싱턴 포'와 천재적인 지능을 가졌으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괴짜 아가씨 '틸리 브래드 쇼'가 거대한 선돌 사이에서 발견된 꺼져버 목숨들의 비밀을 함께 파헤친다. 워싱턴 포 시리즈의 포문을 여는 <퍼핏쇼>는 영국추리작가협회 (CWA)에서 그해 최고의 범죄소설 작품에 주는 '골드 대거상 (Gold Dagger)'을 받았다. 뒤이어 2편과 3편도 후보에 올랐고, 4편은 CWA에서 최고의 스릴러소설에 주는 '이언 플레밍 스틸 대거상 (Ian Fleming Steel Dagger)'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식스턴 올드 피큘리어 올해의 범죄소설상 (Theakston Old Peculier Crime Novel of the year)' 후보에도 올랐다. 현재 시리즈 5편까지 출간되었고, TV 드라마로도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퍼핏쇼>는 작가 M. W. 크레이븐을 스타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존르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등 개인적으로 '골드 대거상'을 수상한 작품들에 대해 높은 선호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를 가지고 <퍼핏쇼>를 읽기 시작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흥미로운 사건들에 푹 빠져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이미 500여 페이지가 모두 넘어간 뒤였다. 오랜만에 소설 본연의 재미를 느끼며 작품에 몰입했던 흡족한 독서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독자들을 열광하게 하는 <퍼핏쇼>의 매력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고민끝에 나름대로 다음의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번째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존재하고, 캐릭터간의 조화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작품 속에 '고전 미스터리'의 우아한 세계와 이익과 탐욕이 동력이 되어 움직이는 '하드 보일드'한 세계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주인공 탐정 듀오에 맞서는 매력적인 악역이 존재하고, 그가 악을 행하게 된 설득력 있는 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로 캐릭터를 살펴보자. <퍼핏쇼>에서 셜록 홈즈의 든든한 동료로 그의 곁에 머물면서 홈즈의 지성을 이끌어내는 왓슨이 연상되기도 하고아이언맨의 인공지능 비서 자비스가 연상되기도 하는 '워싱턴 포' '틸리 브래드쇼'라는 캐릭터는 개인적으로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로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추리소설 속 명탐정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에드가 앨런 포의 오귀스트 뒤팽 시리즈에 서술자이자 추리를 들어주는 파트너가 있었고 이것이 시기적으로는 최초의 탐정과 보조자의 원조라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탐정의 활약상을 듣고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 역시 뚜렷한 캐릭터성을 갖고 탐정의 수사와 모험을 함께하는 파트너라는 점에서는 셜록과 왓슨이 탐정 콤비의 원조라고 일컬어진다. 추리 미스터리 장르에 '왓슨 역' 또는 '왓슨 캐릭터'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다. 지금까지 추리소설 팬으로서 수많은 작품 속에서 탐정 역할을 하는 주인공을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캐릭터를 봐왔다. 그 수많은 캐릭터들 중에서도 '' '브래드쇼'는 각자 독특한 형식과 매력을 가지고 절묘한 케미를 형성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브래드쇼의 순진함과 순수함은 그의 어두운 기질과 날카롭게 대비되었지만, 여러모로 둘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둘 다 강방적이었고, 둘 다 사람들을 거슬리게 했다. (p. 322)

 


작가 M. W. 크레이븐은 10년 간 군에서 복무하고 16년 간 보호관찰관으로 일하며 경찰과 사회복지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삶이 투영된 '워싱턴 포'라는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그는 뛰어난 수사관이지만 관계에 서툴고, 자신만이 가진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좀처럼 타협하지 않는다. 어둡고 냉소적이며 현실적인 캐릭터다. 이런 그와 전설의 콤비를 이루는 '틸리 브래드쇼'는 열여섯의 나이에 옥스퍼드에서 첫 학위를 따고 박사학위 두개를 추가로 취득할 만큼 천재적인 지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세상 물정에 어둡고 지나치게 순수하다. 틸리는 포를 만나 사무실 밖 진정한 세상 속으로 나오게 된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며 서로가 바라보는 상대의 모습은 세상을 경험하며 당황하고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었지만, 차츰 서로를 알아가고, 세상에 적응하면서 최고의 파트너로 거듭나게 된다. 포를 통해 변해가는 틸리의 모습을 보며 포 조차도 놀라는 모습은 이를 잘 표현해주는 재밌는 에피소드이다.

 


받아요. 문제 생기면 안되니까.”

틸리는 휴대전화를 무음모드로 바꾸더니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신호가 안잡히네요.”

포가 흠칫했다. ‘내가 뭘 만들어버린거지?’ (p. 213)

 


나는 포와 틸리의 모습이 빛과 그림자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와 삶을 이룬다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면서 빛이 되고그림자를 만든다그림자는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 속에서 불완전한 형태와 빛깔을 띠지만 나와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필연적으로 나를 구성하는 일부분이다. 삶을 탐구하는 여정에서 우리는 모르고 지나쳤던혹은 애써 외면했던 우리 자신의 내면, 또 다른 나와 대면한다. 우리의 삶이 행복의 빛을 향해서 나아갈 수록 그림자는 빛을 따라 묵묵히 우리의 삶을 지지해준다. 삶이 빛나는 순간에도,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서로의 곁에서 서로의 삶을 지지하며 진실을 탐구하는 포와 틸리의 모습이 빛과 그림자 같았다. 현실적이며 냉혹한 포와 이상적이며 순수한 틸리는 빛과 어둠처럼 상반된 성격을 가졌지만 그들 각자는 서로에게 최고의 파트너다. 빛의 세기가 더해갈수록 옅었던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면서 꼬리를 끌며 빛을 따라오듯이... 

 


두 번째로 '고전 미스터리'의 우아한 세계와 하드 보일드한 '현대 미스터리'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에 존재하는 탐정은 두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얘기한다. 한쪽은 고전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셜록 홈즈의 후예들이고, 다른 한 쪽은 하드 보일드를 대표하는 필립 말로의 후예들이다. (윤영천의 미스터리 가이드북에서 일부 인용) 전자인 고전 미스터리 속 탐정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존경 받는 상류층의 인사들이다. 반면 하드보일드 속의 탐정들은 거친 남자의 세계를 대변하는 노동자나 개인사업자들이다. <퍼핏쇼>에는 코난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고전 미스터리'의 우아한 세계와 피와 땀으로 점철된 어두운 뒷골목정의가 아닌 이익과 탐욕이 동력이 되어 움직이는 '하드 보일드'한 거친 악의 세계가 공존한다. 고전 미스터리에 향수를 느끼는 팬들과 현대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스타일의 이야기를 원하는 팬들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동일한 속성을 공유하면서도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주인공 '''브래드쇼'의 캐릭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묘한 케미스트리를 빚어내며 자신들이 직면한 현재의 사건과 관련있는 과거의 사건까지 파헤치며 해결해나가는 소설의 스토리와 관련되어 있다.

 


'하드 보일드' "원래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을 내포한 형용사이지만계란을 완숙하면 더 단단해진다는 점에서 전의(轉義)하여 ‘비정 ·냉혹이란 뜻의 문학용어가 되었다개괄적으로 자연주의적인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수법을 의미한다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이 기법은 특히 추리소설에서 추리보다는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으로서 ‘하드보일드파를 낳게 하였고셜록홈즈를 창조한 코넌 도일 류의 고전파의 계획된 것과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소설 속 워싱턴 포는 하드보일드류 탐정에 가깝다. 정직된 경찰 출신의 포는 체계적인 계획을 가지고 사건에 세심하게 접근하기 보다는 본능과 영감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를 시도하는 과정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 이는 천재적인 두뇌와 데이터 분석능력, 최신 IT 장비 활용을 기반으로 포의 직감에 근거를 제시하거나,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브래드쇼와 환상의 케미를 이룬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연쇄살인사건을 분석하고, 현재의 사건이 과거의 어떤 사건과 관계 있다는 것을 밝히며 진실에 다가서는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고전 미스터리물과 현대의 하드보일드한 세계의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포는 생각했다. 물론, 오늘 벌어진 일이 내일의 역사가 되는 법이라고 (p. 47)

 


고전 미스터리와 하드보일드를 대표하는 추리소설들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나의 관심은 오직 진실을 아는 것이라는 에도가와 란포가 창조해 낸 아케치 고고로의 말처럼 과거와 현재, 이상과 현실 속에서 진실을 찾아 방황하는 범시대적인 고뇌를 다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작품이 탄생한 시대적 환경은 다르지만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핵심은 특정 시대의 산물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근원으로 반복되는 삶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 벌어진 일이 내일의 역사가 되는 법'이라는 포의 대사를 보면서 나는 먼훗날 '워싱턴 포 시리즈'가 추리소설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상상을 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주인공 탐정 콤비에 맞서는 매력적인 악역이 존재하고, 그가 악을 행하게 된 설득력 있는 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악역이 누구인지, 그가 왜 이런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는 이 리뷰에서는 밝힐 수 없다. 어떠한 스포일러도 없이 리뷰를 하겠다는 앞서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악역에 대한 구체적 언급 없이도 이 악역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존재감을 지녔는지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번 언급했듯이 이 소설의 제목은 <퍼핏쇼 (Puppet Show)>이다. 퍼핏쇼 즉, 꼭두각시 놀음이란 뜻이다. 앞에서 나는 뛰어난 수사관인 포와 천재적인 분석가인 포의 강력한 케미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언급했었다. 하지만 이제껏 존재해왔던 그 어떤 탐정 콤비에 버금가는 전설적인 이들 콤비 마저 꼭두각시 놀음에 놀아나도록 판을 만든 것이 바로 이 소설의 악역이다. 또한, 이 악역은 포와 브래드쇼가 수사과정에서 아포페니아 (서로 연관성이 없는 현상들 사이에서 의미, 규칙, 연관성을 찾아내서 믿는 현상)에 빠져 있을 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까지 한다.

 


역자가 옮긴이의 말에서 밝혔듯이 <퍼핏쇼>'누가 했느냐 (Who done it)''어떻게 했느냐 (How done it)' 보다는 '왜 했느냐 (Why done it)'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범인이 누군지 찾고, 그가 어떤 방식으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탐구하는 일반적인 추리 미스터리와는 달리 사건의 동기에 해당하는 '왜 이런 일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퍼핏쇼>에 담긴 미스터리의 핵심이다. 이야기의 구조상 필연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자와 그가 그러한 행동을 한 이유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앞서와 마찬가지 이유로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지만 책에서도 언급한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것은 좋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뿐이다. (All that is necessary for the triumph of evil is that good men do nothing.)" 라는 에드먼드 버크의 말이 힌트가 될 수 있다. 극중에서도 에드먼드 버크의 이 말은 워싱턴 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데 결졍적 역할을 한다. 이런 매력적인 악역을 후속되는 시리즈에서 계속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쉽기까지 하다.

 


정의 때문에 하는 게 아냐, . 정의를 위한 일이었던 적은 한순간도 없어. 이건 복수야.” (p. 421)

 


나는 고전 미스터리 뿐만 아니라 하드 보일드의 팬이다. 영미권 하드 보일드에 레이먼드 챈들러가 있다면 일본에는 하라 료가 있다하라 료는 데뷔작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를 통해 챈들러의 ‘필립 말로에 비견되며 이후 작가의 분신이 되는 사립탐정 ‘사와자키를 창조해내었다이후 하라 료는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물인 <내가 죽인 소녀>로 나오키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 하드보일드 문학의 대표 기수로 떠올랐다하라 료는 여러 면에서 챈들러와 유사하다본업을 따로 가지고 있다가 40대의 다소 늦은 나이에 작가로 데뷔했다는 점하드 보일드의 거장으로 불리지만 그 명성에 비해 그리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대표적인 과작 작가라는 점에서 그렇다이같은 점은 <퍼핏쇼>의 작가 M. W. 크레이븐도 마찬가지다. (워싱턴 포시리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리즈까지 런칭한 그는 다행히도 그렇게 과작 작가는 아닌 듯하다.)

 


하라 료의 '하드 보일드' '사와자키'를 통해 시작되고 완성된다고 생각한다이는 그가 사건에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연적인 것이긴 하지만 사와자키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었더라면그 아무리 빛나는 웰메이드 스토리가 있었다 한들 시리즈의 성공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와자키는 탄생후 수많은 독자들과 세월을 함께 하며 이제 50대의 중년으로 접어들었다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신주쿠의 어두운 뒷골목을 조용히 비춘다오랜 시간 고단한 현실을 겪으며 그를 기다려온 독자들은 그의 건재함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는다. 나는 <퍼핏쇼>를 읽고, '워싱턴 포''틸리 브래드쇼'라는 새로운 친구를 얻었다. 내가 하라 료의 사와자키와 함께 하며 위안을 얻어왔듯이 이제 또 다른 친구와 함께 할 생각에 흥분이 밀려온다. 앞으로도 나는 새로운 친구와 함께 현재를 헤쳐나갈 힘을 얻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 것이다. 포가 자신의 소임을 마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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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5-09 22: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멋진 소개 글 잘 읽었습니다.
고전과 하드보일드의 조화, 와이 던 잇 추리물이라는 점이 매우 끌리네요~

잭와일드 2023-05-09 23:47   좋아요 1 | URL
긴 글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하수 2023-05-20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작품에 관심가지고 꼭 읽어보겠습니다!
 
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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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은 갑자기 닥친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에 앞서 40여 년 전에는 임진왜란을 겪었고, 불과 그 10여 년 전에도 정묘호란을 겪었다.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는 각종 경제적 요구는 물론, 명나라를 치는 데 협조하라며 수시로 조선을 압박했다. 이런 와중에도 인조 정권은 시종일관 국방이나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외면하고 오직 자신들의 권력 팽창에만 열을 올렸다." (p. 5)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국가의 지도층이 자신들의 권력을 확대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파벌을 나누고, 정쟁을 일삼는 행태를 아프고 안타깝게 지켜봐왔다. 또한, 역사도 국민의 진의에 귀 기울이지 않거나 혹은 고의로 묵살하면서 민생을 외면하고, 주변 정세와 국가안보에 조차 신경 쓰지 않음으로서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수많은 리더들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 본서 <인조 1636>에서 다루고 있는 조선의 16대왕 인조도 정권의 안위를 위해 국가안보를 희생시킨 대표적인 그릇된 리더, 혼군 (昏君)으로 거론된다. 지금까지 역사서를 비롯해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수많은 자료들이 인조 집권시기를 다뤘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논쟁을 다루기도 하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삼전도의 굴욕과 조선 왕실 최대의 가족비극사이자 최초의 의문사로도 일컬어지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조명하기도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인조 정권이 주변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좀더 유연하게 대처했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도 있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인조 정권은 임진왜란 이후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지나친 숭명배금과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국방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p. 131)

 


<인조 1636>가 기존의 수많은 자료들과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지금까지 발간된 자료들은 기왕에 알려진 이야기만을 다루거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료에 근거하지 않고 저자의 추정적 판단하에 자료를 만들었다면, 이 책은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만문노당> 등의 조, 청 양국의 1차 사료를 중심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1차 사료라 함은 동시대 또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편지 자서전 사진 유물 등을 말한다. 1차 사료가 중요한 이유는 당시 역사적 현장에 실재했던 증인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1차 사료를 기반으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해석이 들어간 2차 사료는 1차사료에 비해 '사실 (fact)'에의 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저자 유근표는 <인조 1636>을 통해 '자신들만의 권력을 지키고 대국을 섬기기만 하면 백성은 어떻게 되는가?'하는 질문을 던진다. 병자호란은 불가피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인조반정과 뒤를 이은 이괄의 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소현세자의 죽음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을 시간대순으로 면밀하게 분석하고 돌아보면서 무능한 지도자의 그릇된 인식과 판단이 이 모든 비극과 전쟁의 원인이며, 그 결과로 아픔을 견디고 삶을 살아내야 했던 최종 피해자는 백성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이라는 책의 부제에 걸맞게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 인조반정,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등을 다루고 있고, 2부는 병자호란 중 인조를 비롯된 집권세력의 무능과 무책임한 행태들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3부는 병자호란 후 패배로 인해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을 기술하고 있다.

 


'반정'이라 함은 실정을 하는 왕을 폐위시키고 새로 왕을 세우는 일을 말한다. , 왕이 무능하거나 포악하여 백성이 곤경에 빠졌을 때 행하는 무력적인 정치변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은 500여년의 역사 동안 두 번의 반정이 있었다. 바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이 그것인데, 바르게 되돌린다는 반정의 의미를 생각해볼 때, 이 두번의 반정이 역사를 바르게 되돌렸는지, 아니면 역사의 수레바퀴 자체를 거꾸로 되돌려 퇴보시켰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난정(亂政)과 패륜을 바로잡는다는 분명한 명분이 있었고, 후에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이 반정의 주역도 아니었다. 하지만, 인조반정은 후에 인조가 되는 능양군이 반정이 주역이었고, 폐모살제(廢母殺弟), 배명금친, 과도한 궁궐공사로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는 세가지 명분도 되돌아 생각해보면 석연치 않은 것이었다.

 


폐모살제를 내세우며 반정을 일으킨 인조는 후에 정권유지를 위해 자식인 소현세자 살해의혹과 세자빈을 살해하고 3명의 손자들 귀양을 보냈다. 또한, 배명금친을 이유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숭명반청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출범당시 명나라에게조차 정권을 인정받지 못했고, 이렇게 정권의 명분을 찾기 위한 행위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발발시켜 나라의 존폐에까지 몰아넣는 사태에 이르게 했다. 또한, 인조정권이 반정의 명분으로 과도한 궁궐공사로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은 생각할 수록 기가 찰 노릇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지 10개월 만에 반정 2등 공신이었던 이괄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는 이인거, 유효립, 이충경, 심기원 등으로 이어졌다. 이런 내분에도 모자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까지 겪은 민중들의 삶은 단지 과도한 궁궐공사에 따른 피폐한 정도에 비할 수 있을까? 하물며 인조는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떠났다.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면서 울부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p. 224)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이는 대부분의 전쟁사가 승리자의 입장에서 생략과 왜곡을 포함한 것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개연성 있는 말이다. 승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명분을 만들고 선행을 열거하며 찬양하는 한편 패자의 잘못을 드러내어 꾸짖고, 패자의 선행과 행동의 명분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는 수많은 역사서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은 조금 더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이는 '승자''승리'의 기준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승자'는 앞서 언급한 대로 전쟁이나 정쟁에서 승리한 일방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당대의 최고 권력층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근현대 이전 과거의 역사는 권력자의 역사였다. 이는 역사서술의 중심이 최고 지도층 등의 권력자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권력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절대 다수에 해당하는 민중들을 배제시킨 것은 진정한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조 1636>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주목 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과 사건들을 재조명하고 있다는 점도 있다역사의 주역은 왕이나 최대 권력층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족과 국가를 위한 진심을 보이고 이름 없이 사라져간 민중들의 삶까지 총체적으로 고려할 때 역사적 진실의 조각을 맞춰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조 1636>1차 사료를 중심으로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근왕령 발동으로 죽어간 수많은 근왕병들, 삼남에서 몰려온 군사들, 의병들, 지휘관들의 삶을 조명한다. , 전쟁에서 패배한 후 청으로 잡혀간 피로인들의 절절한 삶과 고향을 잊지 못하고 탈출한 안추원과 안단의 사례를 빼놓지 않고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근왕군으로 참전한 윤충우가 쌍령전투를 앞두고 부안에게 남긴 편지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며 읽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적의 세력이 시각을 다툴 만큼 급박하니, 내가 살아서 돌아간다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구려! 비록 살아서는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시신이 나뒹구는 산야에서 어떻게 나의 시신을 찾을 수 있겠소. 이 편지 띄운 날을 내가 죽은 날로 삼으시오만, 다만 어린 아들이 마음에 걸리는구려. 어미와 아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살 곳을 잃는 슬픔만 겪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소. 편지를 써 놓고 보니 슬프고도 망연하구려!” (163711일 쌍령에서) (p. 167)

 


이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힘은 민중에게 있으며이는 핍박과 분열갈등이 빚어낸 시대의 소음들을 꿋꿋이 버텨내며 역사는 계속된다는 사실을 후손들에게 일깨워준다. 역사는 지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서 떠오르는 하나의 그림이 있었다바로 윌리엄 터너의 명화 <전함 테메레르>.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빅토리호를 구하는 전적을 올린다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그림 속에서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트라팔가 해전 승리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광장 중앙에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넬슨이 승선했던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반면 테메레르호는 운수업자에게 넘겨져 해체되는 운명을 맞는다템즈 강가로 산책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다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르도 있었다고 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이들을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중들수많은 윤충우와 안추원, 안단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들의 몫도 있을까우리는 윌리엄 터너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그들을 다시 역사의 테두리 안쪽으로 끌어들이고 기억해주어야 한다그들의 정신과 투쟁숭고한 희생은 <전함 테메레르>가 되기 충분하다그들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또한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수많은 '우리'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인조1636리뷰대회, #인조1636, #유근표, #북루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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