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페미니즘 선언
낸시 프레이저.친지아 아루짜.티티 바타차리야 지음, 박지니 옮김 / 움직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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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정말 육아휴직 갈꺼니?"

세상에 태어난 딸에 대한 축하인사 다음으로 회사의 경영지원부문 임원이 내게 건넨 말이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위해 회사는 남성육아휴직을 일정기간 의무화하기로 하였지만 아직 안정적으로 정착이 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의 인사와 복지정책을 총괄하는 경영지원부문 임원의 농담인 듯 진담인 듯 건넨 말 한마디는 내게 항거할 수 없는 압박이었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 약속,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는 걸 일상에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이는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평범한 남자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는 것의 고충을 느끼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이는 내가 ‘페미니즘‘이라는 화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가시화되고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선의로 포장된 무례가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Feminism is for Everybody)>에서 벨 훅스는 페미니즘을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한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같은 정의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의 주체에 대해 주목할 뿐 그것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즉 페미니스트가 반대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다.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남성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또 여성도 때론 성차별주의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주장이다. 벨 훅스는 페미니즘을 궁극적으로 모든 형태의 성차별을 지양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자유와 평등, 해방을 위한 운동으로 정의하며 페미니즘을 한단계 진화시켰다고 생각한다.

<99%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 궁금했던 것은 “99%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의 의미였다. 사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에는 관점에 따라 수많은 편견과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따라서, 페미니즘이 대중화되고 보편화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페미니즘 운동이 어떤 것이고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지 분명히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브레히트의 말처럼 구체적이지 않은 진리는 인간을 모호한 주관적 확신으로 이끌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어야 한다. 영화배우 메릴 스트립은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요?’라는 질문에 ‘저는 휴머니스트입니다. 균형을 추구하죠.’라고 대답하였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연기하고 영화판 밖에서도 성차별 문제를 끊임 없이 제기하고 여성 시나리오 작가들을 위한 펀딩을 진행하는 등 여성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명확히 선을 그은 것이다.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면서도 페미니스트임을 부정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비단 메릴 스트립 뿐만이 아니다. 레이디 가가와 켈리 클락슨도 같은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99% 페미니즘“의 지향하고 있는 바는 무엇일까?

“이 페미니즘은 전통적으로 규정된 대로 스스로를 ‘여성의 쟁점women’s issues’에 한정 짓지 않는다. 혹사되고, 지배당하며, 억압받는 모두를 위해 서 있는 인류 전체의 희망이 되기를 목표한다. 우리는 이를 99퍼센트의 페미니즘이라 부른다.“ (p. 57)

“99% 페미니즘“은 젠더 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생태 등 인류 사이에서 상호교차되며 착취와 억압과 갈등을 유발하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99% 페미니즘“은 분리된 운동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협력적인 연대적 움직임이며, 벨 훅스가 제시한 페미니즘 보다 더 광범위하고 더 급진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류 보편적인 고민과 고질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적 공감을 바탕으로 한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해당 이슈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이들만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기 때문에 이슈 자체가 대중의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마이너한 이슈로만 남아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싸우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젠더이슈를 살펴보면,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인류의 지적 전통을 자연스레 전수 받으며 세계를 조망하는 남성에 비해 여성은 끊임 없이 자신을 단속해야 하며 아버지의 어깨 위로 올라가 세상을 조망하지 못한다. 남성 중심의 역사와 세계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혜택을 받아온 남성들은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젠더이슈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이슈 해결에 동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99% 페미니즘“은 특정 이슈 해결에 집중하기 보다 상호교차적인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인류 보편적인 이슈에 의해 피해를 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권리와 기회의 평등을 제공할 수 있도록 미약한 힘을 모아 연대하자는 외침인 것이다.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99% 페미니즘“의 광범위한 사회적 연대는 장점인 동시에 단점으로 작용할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또한 추구하는 방식이 너무나 급진적이라는 측면에서다. “99% 페미니즘“은 폭력은 모든 국가, 계층, 인종, 민족 집단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통틀어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구조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 모든 급진적 움직임이 공동의 반자본주의 혁명에 함께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페미니즘은 지배와 복종, 강압, 억압과 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고 대등한 입장에서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고 상호성장과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다. 더군다나 “99%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광점위한 사회적 연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보다 온건하고 점진적인 접근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가정에서,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페미니즘의 비전을 현실화하는 노력을 충분히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첫 걸음은 페미니즘이 가진 부정적 이미지를 종식시키고 그것이 가진 비전을 제대로 알리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유리 천장을 부수고, 그래서 대다수가 바닥에 쏟아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게끔 만드는 일에 관심이 없다. 전망 좋은 사무실을 차지한 여성 CEO 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게 아니라 CEO와 전망 좋은 사무실이란 것을 없애 버리길 원한다."(p. 48)

물론 페미니즘으로 가는 길은 하나일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과 삶이 다르므로 각자의 삶에 말을 걸고 삶의 사소한 부분부터 변화에 대한 의지를 불어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의 작은 순간들이 누적되어 한 사람의 일생을 구성하듯 세상의 변화도 생각보다 작은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착취와 억압 없이 삶 그 자체가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이 책을 펴낸 ‘움직씨’라는 다소 생경한 출판사명은 ‘동사’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출판사명에 말글만 앞선 진보, ‘위선’을 경계하며 사회적 차별과 혐오에 맞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출판사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99% 페미니즘“을 읽으며 출판사의 모토와 여러 면에서 잘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행동주의 페미니즘 그 첫걸음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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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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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기사는 시장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주의 극단에 위치해 있다국내 택배시장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업체간 치열한 경쟁으로 택배 단가는 지속적으로 하락중이다이러한 무한경쟁 속에서 회사는 비용절감을 위해택배기사를 비정규직 개인사업자로 고용하고 택배기사들은 줄어가는 본인 몫의 수익을 지키기 위해 비정상적인 근무시간을 소화해내고 있다. 9 to 6 (8시간 근무)라는 정상적인 근무시간의 두배에 달하는 6 to 10 (16시간 근무)를 선택한 건 개인사업자로 등록된 택배기사 본인들의 선택이다하지만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도록 건당수수료가 설정되고 이것이 시스템화되어 버린 현실에서 과연 그것이 그들의 선택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쩐지 인생 같네요.” 청림이의 말에 담배를 비벼 끄며 내가 말했다.

누구에게도 그렇게 간단한 인생은 없지 않을까?” (P. 152)

 

<침입자들>의 화자는 현재 택배일을 하고 있지만이름도 과거의 행적도 베일에 싸인 정체불명의 인물이다다만 그의 예사롭지 않은 칼솜씨와 인내심주위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사랑하는 딸을 잃은 상처 등에서 그가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사람들은 그런 그를 그가 택배 배달을 맡고 있는 동네이름인 행운동으로 부른다. ‘행운동’ 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택배기사들은 비정상적인 수익구조에 대항하여 여가 시간가정을 돌볼 시간심지어는 자신의 허리까지 희생하며 살아간다그렇게 부모 초상이 나도팔다리가 부러져도 그날 택배는 그날 배송하는 노력과 희생의 대가는 근사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현실을 근근이 버티며 삶을 이어나가게 해줄 뿐이다.

 

페테 회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서 이런 문장을 썼다.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반에서 뚱뚱한 남자애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P. 61)

 

하지만 현실의 삶에 지친 이들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행운동은 택배 일을 하면서 어린 나이에 시작한 사회생활에서 상처를 받은 마크스’, 우울증 환자 춘자’, 동네를 누비는 바보 마이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강의를 늘어놓는 경제학 교수를 만난다이들이 현재 살고 있는 표면적인 삶의 단면들은 정상인의 시각으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하지만 이들이 살아온 흔적들을 더듬어가며 이들이 어떤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삶을 살아왔는지 알게되는 순간 이들의 현재의 삶을 이해하고 서로를 위로하게 된다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택배기사저마다의 상처를 안고서 예상치 못하게 조금씩 어긋나고 비뚤어지는 현실의 삶을 바로잡으며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 동일한 입장에 있는 것이니까또한 소설의 화자인 행운동의 말처럼 정말로 간단해 보이는 삶도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인생은 없는 법이니까.

 

소설 속 행운동처럼 나도 영화 하나를 인용하며 서평을 마칠까 한다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살인마는 안톤 시거는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을 살인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동전 던지기를 통해 살인 여부를 결정한다이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삶의 우연성을 상징하는 것이다동시에 '전부를 걸어야만 전부를 얻을 수 있다.'는 안톤 시거의 말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한 번씩 주어진 삶에 임하는 진지한 탐구 자세와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 모범답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많은 사람들이 삶이 던지는 시험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각자가 다른 시험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한 채 타인의 답을 모방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모범답안을 찾다가 실패하게 된다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되고 스스로 계발한 재능을 토대로 세상이 던지는 질문에 각자의 답안을 작성하면 되는 것일 뿐이다내가 그랬듯이 다른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현실의 삶을 견디는데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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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구술사 - 현대 한식의 변화와 함께한 5인의 이야기
주영하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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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구술사‘라는 신선한 제목처럼 참 흥미로운 책입니다. 인문학, 식품학, 인류학, 민속학 등 다양한 전공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는 조리사, 식품학자, 외식업계 종사자들이 모여 현대 한식의 역사를 논한다는 것만으로 관심이 가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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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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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는 제도권에 편입되지 못한 채 어느 누구에게도 주목 받지 못하고 어느 누구의 수호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히즈라안줌이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에서 희망의 불씨를 살리며 작은 잔나트 (파라다이스)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이야기다. '위로받지 못한 이들에게' 헌정된 이 책은 현실의 그림자로 살다가 역사의 얼룩으로 스러지는 가장 비속하고 성스러운 이들에게 바치는 찬가. 도저히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희망은 없는 듯 하지만, 희망에 차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자신들이 가진 유일한 품위p. 356라 말하며 불굴의 의지로 절망을 헤쳐나간다. ‘히즈라는 인도에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적인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히즈라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느 쪽에도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해결 가능한 외적인 문제를 고민할 때, 이들은 해결 자체가 불가능한 내부 문제로 고통 받는다.

 

전부 우리 내부에 있어.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그것들은 절대로 해결이 안 돼. 해결될 수가 없으니까.” (p. 39)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모든 사람이기도 하다. 정상성을 가지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확실성으로 인해 축소되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모호성으로 인해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늘 옳다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늘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확실성으로 인해 축소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호성으로 인해 확대되었다. p. 166

 

이러한 모든 사람과 아무도 아닌 사람,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p. 14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속성을 가진 히즈라는 역설적으로 화해와 포용, 희망의 상징이 된다. 기득권들의 질서, 상식, 규범, 문화와 관습에 속하지 못하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손에서 새로운 씨앗이 피어난다는 것은 큰 감동을 준다. 역설적으로 하키라트 (현실)에 속하지 못한 이들이야말로 현실의 높은 장벽을 뛰어넘어 세상에 정의와 평등, 사랑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지복의 성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이들의 존재는 양극단의 이분법적인 프레임에 내포한 폭력성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은 구자라트 폭동,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립, 카슈미르 분쟁,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종교 갈등, 카스트제도의 폐해, 자본주의의 추악한 민낯 등 인도사회의 어두운 역사를 빠짐없이 조명하고 있다. 이러한 분쟁과 갈등은 성별과 인종, 국가, 종교, 신분 등 이분법적인 가치관의 충돌에 기인한다. 따라서, 소설 속 등장인물인 안줌이 세상에서 외면 받은 묘지 위에 게스트 하우스인 '잔나트 (파라다이스)'를 건설한 것은 큰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모든 곳에 죽음이 있었고, 죽음은 모든 것이었다. 죽음은 또 다른 방식의 삶이 되었다.” p. 415는 표현이나 죽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척하는 죽은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 p. 452이라는 표현처럼 삶과 죽음, 남과 여, 빛과 어둠을 포용하면서 더 큰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검은 마차 셋, 흰 수레 셋

우리를 한데 모으는 것은 우리를 갈라놓는 것.

떠나간 우리 형제, 떠나간 우리 사랑.“ p. 355

 

또한, 소설은 여전히 마이너리티로서 피해자로 살아가는 여성에 관한 서사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거다 러너는 남성은 새로 시작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인류의 지적 전통을 자연스레 전수 받으며 세계를 조망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는 세계는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호명되고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은 세계를 잘 익히기만 하면 되는 반면, 여성은 끊임없이 자신을 단속해야 하며 아버지의 어깨 위로 올라가 세상을 조망하는 것이 어렵다는 의미이다.

 

콰브가에서는 잘못된 몸에 갖힌 신성한 영혼들이 해방된다. 신성한 영혼이 여성의 몸에 깃든 남성인 경우 어떻게 되는지의 문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p. 78)

 

우리는 모두 삶의 형태는 다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과 그것이 누적되어 이루어지는 역사와 사회구조에 좌우되는 삶을 살고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인종과 국가, 성별, 문화 등에서 기인한 수많은 차별을 마주하게 된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다수자들이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 불편한 진실에 맞서 소수자로서,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살리며 세상을 향해 작지만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를 딪고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것이 우리네 인간이라는 존재 아닐까

 

상실과 결핍, 좋았던 기억, 행복했던 추억들이 모여 하나의 삶을 이루고, 그렇게 쌓아올린 하나하나의 삶들이 모여서 시대와 역사가 되고 하나의 별자리를 이룬 채 조용히 빛난다.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하고 그에 적절히 대응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와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복의 성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에 떠밀리지 말고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아닐까? 그것은 불가능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티끌 같은 희망이라도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었고, 또한 고통과 비탄으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그 세계에 함께 맞서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 , 이해와 관심을 바탕으로 타인을 향해 손을 뻗는, 인간이 지닌 온기에 대한 것이었다.

 

중요한 건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한낱 낄낄거림으로라도 역사에 존재하는 건 부재하는 것, 완전히 누락되는 것과 천지 차이였다. 그 낄낄거림은 결국 미래라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오르는 하나의 발판이 되었으니까.” p. 76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를 읽으며 한 점의 그림이 떠올랐다. 바로 윌리엄 터너의 명화 <전함 테메레르>.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flagship) 빅토리호를 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영광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그림 속에서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트라팔가 해전 승리 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의 중앙에는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기함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1838년 영국 해군은 테메레르호를 런던의 운수업자에게 팔아넘겼고 배를 산 운수업자는 배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템즈 강가로 산책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르도 있었다고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그를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중들, 수많은 안줌틸로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들의 몫도 있을까?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꿔놓은건 그동안 세계와 인류를 위한 진심을 보이고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평범한 개인들이었다. 우리는 윌리엄 터너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들을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정신과 투쟁, 숭고한 희생은 <전함 테메레르>가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며, 그들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이름 없는 수많은 '지복의 성자'들이기 때문이다.

 

너희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가 내기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왕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던 남자들과 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오직 히즈라들만이 꼬박 십사년을 숲가에서 충성스럽게 왕을 기다렸는데, 그건 왕이 그들에 대해 언급하는 걸 잊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우린 잊힌 존재로 기억되고 있는 거네 p. 76)

 

소설 속에서 델리의 잔타르만타르는 정의를 위한 싸움, 악에 대항하는 선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카르발라 (이슬람교 시아파의 성지)” (p. 162)이며, 누군가는 관심을 가져줄 거라는, 누군가는 그들의 말을 들어줄 거라는 믿음 (p. 168)이 존재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이곳에서 안줌틸로가 마주치고, 동시에 새로운 세대와 희망의 상징인 미스 제빈 2가 태어났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삶이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는 것 아닐까? 차별과 질책에 굴하지 않고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작지만 끊이지 않는 목소리들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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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낸시 (스티커 포함)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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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딸아이가 유독 고양이 인형에게 무한의 애정을 보내면서 우연히 길에서 만나는 길고양이에게도 급관심을 보이고 있어 덩달아 고양이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져가고 있는 와중에 엘렌 심 (Ellen Shim) 작가님의 <고양이 낸시 (Nancy the Cat)>를 만나게 되었다. 제목부터 고양이가 언급되고 있고, 살인적인 귀여움으로 천적인 생쥐들까지 무장해제시킨고양이 낸시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어 친근감을 가지고 책에 접근할 수 있었다. 딸아이와 함께 읽으면서 교감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컸었다.



<고양이 낸시>를 읽으며 무엇보다도 이야기 전반에 깔려 있는 삶의 동반자로서 고양이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얼마 전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 떠올랐다. 애묘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하루키는 어린 시절부터 꽤 많은 고양이를 키웠는데, 이 에세이집에서는 그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2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한 고양이 뮤즈의 비밀에 대해 밝히고 있다. 장수 고양이의 이름 뮤즈는 하루키의 아내가 푹 빠져 있던유리의 성이라는 순정만화 속 등장인물 이름을 본따서 지은 것이다. ‘뮤즈는 하루키와 여러 가지 비밀과 추억을 공유한고양이다. 그 비밀 중 하나는 뮤즈가 하루키의 출세작인 노르웨이의 숲탄생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하루키는 에세이집에서 뮤즈는 예쁘고, 영리하고, 튼튼하고, 숱한 수수께끼를 품고 있었던 같이 살기에 매우 이상적인 고양이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와 고양이 사이에는 늘 가벼운 긴장감이 흘렀지만, 그건 그것대로 또 상당히 안정적이었고, 또그러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고양이는 흔치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뮤즈를 만난 것은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는 것이다. 하루키의 사례처럼 <고양이 낸시>도 만화의 모티브가 된 고양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엘렌 심 작가님과LA에서 같이 살고 있는 고양이가 그 주인공은 아닐까? 이 만화는 그 고양이에게 건네는 작가님의 감사의 인사 같은 것 아니었을까?



<고양이 낸시>의 이야기 흐름에 변화를 가져오는 가장 결정적인 장면을 꼽는다면 돌아온 여행자 헥터의 등장일 것이다. 오랜 기간 여행을 하면서 마을에서 떠나 있었던 헥터는 어린 생쥐들이 스스럼없이 고양이 낸시와 어울리는 모습을보면서 엄청난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헥터는 생쥐로서 고양이에 대해 본능적으로 느낄수 밖에 없는 두려움과공포를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위험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다.



밖에 애들이랑 노는 저 커다란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낸시”, “더거씨네 딸...?”, “우리 아들 친구

고양이!!! 고양이라고요 여러분...! 우리들의 천적!!” (p. 159)



하지만 마을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고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낸시를 향한 마을 사람들의 진심을 깨닫고, 종국에는 낸시의 든든한 지지자로 변모하게 된다. 낸시는 고양이이지만, “더거씨의 사랑스러운 막내 딸이었고, “지미의 소중한동생이었으며, “친구들을 배려하는, 모두가 너무나도 아끼는 낸시였던 것이다



제가 틀렸어요... 눈을 가리고 있었던 건 저였어요. 고양이 낸시만 보느라 다른 낸시들은 못 봤어요.” (p. 225)

 

 

평범하게 태어난 대다수처럼 고양이 낸시는 자신이 남들과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의식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고, 일말의 의심도 없이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신이 생쥐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생쥐의 천적인 고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은 낸시에게는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헥터는 낸시가 고양이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런데 말이예요. 저는 고양이인 낸시도 낸시의 한 부분이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낸시한테 낸시가 고양이라고 언제 알릴 거예요?” (p. 231)



어쩌면 우리는 모두 고양이 낸시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왜 여기에 있는가?'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공통된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삶의 형태는 다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과 그것이 누적되어 이루어지는 역사와 사회구조에 좌우되는 삶을 살고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인종과 국가, 성별, 문화 등에서 기인한 수많은 차별을 마주하게 된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다수자들이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 불편한 진실에 맞서 소수자로서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살리며 세상을 향해 작지만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는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양이 낸시>의 이야기처럼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삶이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차별과 질책에 굴하지 않고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작지만 끊이지 않는 목소리들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될 것을 믿어 의침치 않는다.


 

 


딸아이는 고양이 낸시의 살인적인 귀여움에 무한한 열광을 보내고 있다. 거실 곳곳에 제멋대로 붙여져 있는 고양이 낸시의 스티커를 보면서 아이와 또 하나의 추억을 공유했다는 생각에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은 <고양이 낸시>의 이면에존재하는 철학적인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라서 아이가 성장한 후 다시 한번 <고양이 낸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싶다. 지금 보다 진보한 세상에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아빠와 딸은 어떠한 대화를 나누게 될까? 멀지 않아 도래할 그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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