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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영화 <007 스카이폴>에는 인상 깊은 하나의 장면이 있다.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나이가 들어 노쇠한 제임스 본드가 한 점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는 장면… 쓸쓸한 뒷모습을 여과 없이 노출하며 그가 바라본 그림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였다. 테메레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에 조국을 구하고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영웅이었다.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flagship) 빅토리호를 구하고 두 척의 배까지 나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 007 스카이폴 (SKYFALL), 2012 ]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은퇴의 기로에 선 스파이는 그림 속 범선을 보며 세월의 무게와 시대의 변화를 읽었던 것일까? 인간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처절하고 애잔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새삼 놀라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있다.
[ The Fighting Temeraire, J. M. William Turner, 1838 ]
본 도서의 저자 서명숙이 <영초언니>를 출판하게 된 계기도 뉴스에서 본 하나의 충격적 장면 때문이었다. 최순실은 특검에 출두하면서 "여기는 더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라고 외쳤다. 법과 제도를 비롯해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것들을 유린한 국정논단 주범의 이 모순적 외침은 저자에게 영초언니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40여년전 영초언니도 법정에 출두하면서 "독재정권 물러가라. 민주주의 쟁취하자."고 외쳤었기 때문이다. 40여년의 세월을 넘어 똑같이 수의를 입은, 하지만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온 천영초와 최순실이 동시에 외친 "민주주의"라는 단어에는 얼마나 큰 간극 (間隙)이 존재하는 것일까?
[ 국정논단 피의자 최순실, 2017/01/25 ]
저자 서명숙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이 박정희 키드였음을 밝히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반공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타고 국민교육헌장 암기왕 출신의 소녀는 중학교때 라디오에서 박정희 당선확정이 발표되자 "박정희 대통령 각하, 축하드립니다."라고 일기에 쓰고 잠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생들이 쓸데없이 데모를 해서 입시를 방해한다고 불평하던 소녀는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시대의 수상한 공기를 감지하기 시작한다.
얼마전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는 여러 문화매체를 통해 다뤄진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하고 있다. (5월 18일은 본 도서 영초언니의 출간일이기도 하다.) 익숙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1,000만이 넘는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의 구도와 그를 기반으로 한 전개과정이 신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시민을 상징하는 택시운전사가 광주시민이 아니 외지인의 관점에서 80년 광주의 부조리를 겪으며 뜨겁게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많은 관객들이 공감했을 것이다.
[ 영초언니, 서명숙 著, 문학동네, 2017/05/18 ]
영초언니를 읽으면서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제주도 출신의 박정희 키드가 민주화의 봄을 꿈꾸는 대학생이 되기까지, 그리고 세월이 흘러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그 시절 실존인물들의 이야기는 내게 흡인력 있게 다가왔다. 20여년의 세월의 간격을 두고 저자 그리고 영초언니와 한 공간을 공유했다는 점도 이 책에 흥미를 느낀 결정적 요소 중 하나였다는 것도 밝혀야겠다. 내가 <영초언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여러 저명인사들의 추천사가 아닌 내게 너무도 익숙한 장소에 서 있는 한 여자를 그린 이 책의 표지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9.14 고려대 시위의 동선, 저자가 엄주웅과 진심을 확인한 경양식집 하얀집 등 추억의 장소를 떠올리며 책에 대한 몰입도를 높일 수 있었다.
[ 영초언니, 서명숙 著, 문학동네, 2017/05/18 ]
통제와 검열을 거친 관제뉴스에 길들여진 제주도 비바리(처녀)가 대학에 진학해 조금씩 세상에 눈을 떠가는 과정은 시작부터 운명적이었다. 고대극회와 고대신문사 중 운명에 맡긴 선택을 통해 시작된 저자의 대학시절 그 과정에 영초언니가 있었다. 영초언니는 저자에게 사회적 스승이었고 지식인의 모델이었다. 저자는 영초언니를 통해 스스로 존중하는 법을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여자들끼리의 수다도 얼마든지 진지한 토론이 될 수 있음을 배우기 시작했다. (p. 63) 야학교사를 하던 저자가 신분상승을 위한 검정고시 공부와 모순된 현실을 일깨워주는 것 중에서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자 영초언니는 너무 욕심내지 말라고, 네가 그들을 하루아침에 구할 수는 없다고, 시간이 흐르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구하는 방법을 알게 될거라고 조언하고 다독인다. (P. 70)
영초언니는 본인 스스로에게는 엄격했지만 후배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한 선배였고 역사의식과 대의명분을 앞세워 후배들에게 선택을 강제하고 희생을 요구하는 선배가 아니었다. (p. 182) 저자가 그토록 가슴 아파했던 노동자들의 삶 보다 한치도 더 나을게 없는 부모의 신산한 삶을 떠올리며 비겁해지리라 결심했을 때도 영초언니는 배신감이 아닌 이해와 포용 그리고 미안함을 내보였다. 영초언니의 법정 최후진술은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노리는 철저한 1인 독재정권이고 유신헌법은 그런 목적을 위해 꼼수로 만들어진 초법적인 법이기 때문에 그런 법에 의거하여 우리를 가둔 것이야말로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P. 206)
윌리엄 터너와 그의 대표작 <전함 테메레르>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를 대신하여 2020년부터 영국 20파운드 지폐의 새로운 모델이 될 예정이다. <전함 테메레르>는 BBC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영국 그림으로 꼽히기도 했다. 터너와 그의 작품 <전함 테메레르>가 영국인들에게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 "굿바이 스미스, 하이 터너" 英 20파운드 지폐 새 모델 발표, 2016/04/23 ]
트라팔가 해전 승리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의 중앙에는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기함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1838년 영국 해군은 테메레르호를 런던의 운수업자에게 팔아넘겼고 배를 산 운수업자는 배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템즈 강가로 산책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다.
[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 Trafalgar Square, London ]
[ 포츠머스 해군기지의 빅토리호, HMS Victory, Portsmouth ]
"이 책은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한 여성에게 바치는 사랑노래입니다."
저자 서명숙은 프롤로그를 통해 이 책은 엄혹한 시절을 함께 견뎌낸 영초언니, 천영초에게 보내는 헌사임을 밝히며 이 노래를 통해 사고로 잃어버린 그녀의 기억이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길 소망한다고 하였다. 이 책에는 국회의원, 장관, 시민운동가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실존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영초언니와 함께 민주화 운동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이제 세상 사람들이 다 알만한 인물이 되었다. 역사는 영초언니를 어떻게 기억할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녀의 몫도 있을까?
트라팔가에서 테메레르는 넬슨 제독의 생명을 구하진 못했지만 조국 영국을 구했다. 테메레르의 빅토리호 구원이 없었다면 19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아닌 저물어가는 일몰이었을지도 모른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르도 있었다고… 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그를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영초언니>는 서명숙이 그린 <전함 테메레르>다. 저자 서명숙은 천영초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영초언니 천영초를 기억해야 한다. 영초언니는 혼자서 행복해지는 것 자체가 마음의 죄가 되는 시절,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이름 없는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천영초가 목놓아 외친 민주주의와 박근혜, 최순실이 외친 민주주의의 간극을 좁히는 길이며,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모독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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