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역사 - 지금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소비하는 인간의 역사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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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역사> 내가 처음 이 책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이 책의 홍보 문구에 대한 약간의 반감(?)이었다.

지금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소비하는 인간의 역사

 

홍보문구의 의미는 저자가 남긴 서문에 더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은 일상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소비의 역사'를 다룬다. 한국 인문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소비와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비는 고전경제학과 경제사에서도 도외시되었고, 특히 생산을 중시했던 근대사회에서는 소비를 생산과 대비시키며 그 의미를 폄하해왔다. 예를 들어 '생산적인 관계'라는 말에 비해 소비적인 논쟁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수평적 대비를 넘어 소비에 열등성과 부정적 함의를 투사한다. 나아가 소비를 사치나 방탕과 연결시키곤 하는 사회적 통념은 결과적으로 소비를 진지한 연구의 대상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p. 4)

 

 

과연 그럴까? 소비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학문적으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경제학도로서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공급은 스스로 자신의 수요를 창출한다(Supply creates its own demand)는 세이의 법칙 (Say’s law)으로 대표되는 고전학파의 주장은 자신들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공황을 맞이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 때 등장한 케인즈는 유효수요론 (Theory of effective demand)으로 고전학파의 주장을 반박하며 대공황의 원인을 설명한다. 케인즈의 주장은 공급은 수요에 의해 한정된다는 것이며, 여기서 등장하는 유효수요란 소비를 의미한다. 거시경제를 바라보는 두 개의 관점, 고전학파와 케인즈학파는 경제학사는 물론 경제학의 발전을 이끈 큰 원동력이었고, 이를 촉진시킨 화두는 유효수요 즉, 소비였다. 그런데 소비가 경제학과 경제사에서 도외시되었고 소비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니…… 저자의 주장이 궁금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저자의 주장의 의미가 어떤 거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저자가 바라보는 '소비'는 단순히 물건을 사거나 쓰는 행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나 상징 등의 비물질 요소를 포함하고,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고 폐기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관계형성 및 이데올로기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저자는 이런 '소비'라는 개념을 살피기 위해 상품, 마케팅, 유통채널, 소비의 주체 등을 총괄적으로 접근한다. 또한 상품에 대한 평가나 불매운동과 같은 행위를 돌아봄으로서 소비의 장구한 역사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진 저항과 해방, 연대의식을 끄집어내고 있다.책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상품 (Procuct) : 굿즈 Goods, 욕망하다

 

근대초 유럽에서 유언장은 당시의 사람들이 어떤 물건들을 소유했고, 어떤 물건들을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아내에게 남긴 셰익스피어 일화가 인상 깊었다. 혁명 후 등장한 양복과 기성복의 등장에는 계층의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결과였다. 신부의 드레스, 신랑의 턱시도와 관련된 논쟁에서는 최근의 화두인 젠데이슈 및 당시 사회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유럽풍으로 변해가는 중국도자기를 보면서 미지의 세계를 소유하려는 유럽의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비누는 서구 중심적인 제국주의로부터 파생된 인종 차별적 최초의 식민주의 상품이었다.

 

 

 

2. 촉진 (Promotion) : 세일즈 Sales, 유혹하다

 

노동 및 생산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여성들은 18~19c 판매자로서 생산의 대열에 합류하게된다. '판매여성 (Saleswoman)과 상품은 하나다.'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은 이러한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18~19c 약장수의 성공을 마케팅 측면으로 분석해 보면 이방인이 가진 신비주의적 요소, 인쇄물을 통한 광고, 정부의 느슨한 규제 등으로 분석한 대목은 참 흥미로웠다. 19c의 재봉틀을 보면 해외판매와 최초의 할부제 도입이 성공요인으로 작용했고, 젠더이슈를 부각시켜 여성적인 물건이라는 광고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이 성공의 큰 요인이었다는게 놀라웠다. 에이본 레이디라 불리는 화장품 방문판매원도 소비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판매원도 소비자도 여성인 면에서 마케팅 포커스가 잘 작용되었고 동시에 방문판매라는 획기적인 채널로 이를 극대화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광고와 홍보 목적에서 유행했던 트레이드 카드가 인쇄기술의 발달로 몰락한 사례를 보면서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느껴지기도 했다.

 

 

 

3. 소비주체 (Consuming subjects) : 컨슈머 Consumer, 소비하다

 

소비평활화를 위한 노동계급의 계모임과 과시적 소비 사례에서는 근대식 금융제도가 등장하기 이전 계모임이란 관행적 제도가 언제 어떻게 등장하고 발전되어 왔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수집은 과연 소비 행위인가라는 논점과 관련해서는 수집행위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인 소비행위라는 경제학자 제이콥 바이너의 발언이 흥미로웠다. 근대초 의학서의 비밀스런 소비라는 테마에서는 소비의 대상으로서의 ''을 고찰하는 대목이 재미있었다. 책의 독자는 본질적으로 텍스트의 세계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여행객이며 저항성을 내포한다는 것은 독자들이 자신만이 독특한 내면세계에 비추어 책을 소화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성형소비의 내셔널리티와 관련된 주제에서는 국가별 문화차이에 따른 소비성향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4. 유통 (Place) : 마켓 Market, 확장하다

 

순례지에서 의료 서비스 시장으로 변화한 바스 (Bath) 사례를 보며 유통채널의 진화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거대한 수정궁으로 지어진 영국의 만국박람회는 산업혁명의 성과와 신기한 상품들로 구성되어 소비자들의 이목을 끄는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자 유통 채널이었다. 또한 카탈로그와 홈쇼핑의 등장은 소비의 역사에서 욕망을 평준화시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쇼핑몰은 19c 미국의 소비문화를 주도한 백화점에서 시공간을 재구성하고 인구구성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 만들어진 소비공간의 혁명이자 진화였다.

 

 

이 책은 소비라는 하나의 테마를 통해서 본 역사의 발전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E.H. Carr의 말처럼 이 책은 과거를 다루고 있지만 결코 오늘날 직면한 문제들과 동 떨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소비라는 주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조망함으로써 역사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이 스며 있는지 느끼게 해준다. 또한 소비자 운동의 발생이나 바이 아메리칸 캠페인의 역사, 윤리적 소비의 기원 등을 살펴봄으로서 소비의 역사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진 저항과 해방 연대의 주제도 다루고 있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은 홍보문구에 대한 오해와 반발로부터 시작했지만 소비의 역사에 대한 공감과 설득으로 마무리되었다.역사라는 테마를 새로운 방식으로 살펴보길 원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소비의역사, #설혜심,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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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의 맛! - 우리 문화유산 무엇을 볼 것인가
홍지석 지음 / 모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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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답사의 맛'은 표지에 등장하는 질문 "우리 문화유산 무엇을 볼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고민의 결과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문화유산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저자가 고민 끝에 이 책에 담아내고자 한 우리 문화유산 답사의 방향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산해진미가 아닌 정갈하게 차려진 한 그릇의 김치찌개와 같은 답사이다. 저자는 본 도서를 통해 느린 호흡의 여유로운 답사 형식, 차분한 호흡의 사색과 치유의 시간을 누리는 답사여행을 지향한다. 거창한 답사가 아닌 작품 한 두 점을 보아도 수십 점의 작품을 보는 것 못지 않은 충만감을 느끼는 산해진미로 풍성한 밥상이 아닌 매콤한 김치찌개 한 그릇과 같은 답사기… 매력적이지 않은가?

 

 

둘째, 현장에서 만나는 유물들을 하나의 미술작품으로서 향유가 가능한 답사이다. 우리가 지역 답사에서 만나는 문화유산들은 역사의 발전, 선인들의 기억과 경험, 지혜를 반영하는 유물이자 사료이며 동시에 인간의 감성과 지성에 호소하는 '예술작품'이다. 따라서 저자는 본 도서를 통해 오직 답사를 다녀본 사람만이 알고 있는 각별한 즐거움을 제공하고자 한다. 작품의 실제 규모, 미세한 색감, 재료의 질감, 광택이 주는 자극, 작품이 주변환경과 어울려 자아내는 미묘하고 독특한 분위기 등은 오로지 답사 현장에서만 체감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각별한 즐거움을 오롯이 아우른 감각적인 답사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큰 방향성을 두고 저자는 세부 기준을 정함으로써 구체적 답사지를 선정하였다. 구체적인 세부기준은 다음과 같다.

 

 

 

 

이 세가지 세부 기준 중 저자는 2번째 기준을 주요하게 검토한 듯 하다. 저자가 언급하는 두 번째 세부기준, 독특한 매력을 지닌 빼어난 작품이란 한국 미술사에서 갑자기 익숙한 미의 표준이나 관습적 형식을 벗어난 파격적인 작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준에 의해 선택된 작품들은 4등신의 강렬한 외양을 지닌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 성덕대왕 신종으로 대표되는 한국 종의 위대한 전통에서 벗어난 보신각종 등이 있다. 구체적인 각각의 답사의 소제목은 다음과 같다.

 

 

 

 

결론적으로 이 책 '답사의 맛'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한국의 규범적 걸작들에서 벗어난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작품 몇 가지에 주목하고 이를 여유로운 호흡의 느린 답사, 그리고 그러한 답사를 수행하는데 있어 현장에서만 체감할 수 있는 맛을 느끼게 해주는 가이드와 같은 답사기이다.

 

 

본 도서를 읽으며 미(美)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미(美)의 세계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까?'하는 생각… 단순하게 생각해보아도 미(美)의 기준은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절대적이지 않다. 미의 기준은 본 도서에 등장하는 '종'이나 '불상', '석탑'의 사례처럼 시대에 변화에 따라 발전하기도 혹은 퇴보하기도 하며, 때로는 빅뱅 방식처럼 파격적인 형태로 갑자기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문화권의 차이에 따라 미의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문명의 교류에 의해 그 격차는 많이 좁혀졌지만 동양과 서양의 미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또한, 시대와 문화권이 동일하더라도 미의 기준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서로 다른 예술관, 가치관, 미적 취향 속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 우열관계가 성립될 수 있을까? 여기에 본 도서의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예술작품들을 통해 독자들은 가치의 교차로, 취향의 갈림길에 서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저자가 제시하는 작품들은 한국미술사의 규범적 걸작들이 아닌 오히려 그 규범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맛보기로 도서에서 언급한 가치의 교차로, 취향의 갈림길의 사례를 든다면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함께 언급된 작품이 이탈리아 로렌초 베르니니의 <아폴로와 다프네>이다. 베르니니라는 최고의 조각가의 최고 걸작에 속하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은 어디에서 작품을 찍을지 몰라 당황하게 된다. 이 작품은 작품을 대표할만한 결정적인 지점, 이미지를 찾기 힘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람객들은 어느 쪽에서 봐도 극적이고 아름다운 이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손쉽게 확보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품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이 있다. 부분과 전체의 균형과 비례, 안정감을 중시하는 고전주의자들이다. 힐데브란트는 조각가들에게 '환조 (3차원의 입체조각)를 만들 때는 부조 (평면상에 입체적으로 조각하는 것)처럼 만들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환조를 만들 때 입체성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억눌러 전체성을 확보하라는 것이다. 이는 환조의 360도 방향 모두를 존중하기보다 부조처럼 어느 한면에 에너지를 집중해 전체를 제시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균형과 안정감이 예술이 중시해야 할 가치인가? 아니면 다양성과 역동성을 더 추구해야 하는가? 다양한 불상과 탑들이 일정한 규칙 없이 존재하는, 부분과 전체간의 균형과 통일성이 없는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평가절하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와 같이 이 책에는 미적 가치를 탐구하는 질문과 사색들이 역사적 사실과 맞물려 흥미로운 지점이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최초의 근대 조각가 김복진의 거대 불상 도전기, 최초의 전형석탑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왕년의 답사광들의 경주 순례기, 1942년 옛것을 좋아하는 호고(好古) 일당의 조선백자 유람기를 현 시점에서 추적하는 이야기 등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우리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당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저자의 가이드에 따라 답사를 진행하며 당신이 추구하는 미적 가치와 취향을 토대로 TV 오디션 프로그램의 평가위원처럼 평가를 해보는 건 어떨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당신의 점수는 몇점인가?

 

 

'제 점수는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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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보이 2017-08-29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준이 확실한 답사기이군요. 규범적 걸작들에게서 벗어난 독특한 미에 대한 주목을 하는 ㅎㅎ 관심이 갑니다. 저도 읽고 제 나름의 미적 기준을 가지고 평가해보고 싶어지네요^^

잭와일드 2017-08-30 09:21   좋아요 0 | URL
네 독특한 관점이 돋보이는 흥미로운 책입니다. 시간 나실때 읽어보세요. 강추^^
 
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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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007 스카이폴>에는 인상 깊은 하나의 장면이 있다.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나이가 들어 노쇠한 제임스 본드가 한 점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는 장면쓸쓸한 뒷모습을 여과 없이 노출하며 그가 바라본 그림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였다. 테메레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에 조국을 구하고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영웅이었다.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flagship) 빅토리호를 구하고 두 척의 배까지 나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 007 스카이폴 (SKYFALL), 2012 ]​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은퇴의 기로에 선 스파이는 그림 속 범선을 보며 세월의 무게와 시대의 변화를 읽었던 것일까? 인간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처절하고 애잔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새삼 놀라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있다.

 

 

 

 [ The Fighting Temeraire, J. M. William Turner, 1838 ]

 

본 도서의 저자 서명숙이 <영초언니>를 출판하게 된 계기도 뉴스에서 본 하나의 충격적 장면 때문이었다. 최순실은 특검에 출두하면서 "여기는 더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라고 외쳤다. 법과 제도를 비롯해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것들을 유린한 국정논단 주범의 이 모순적 외침은 저자에게 영초언니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40여년전 영초언니도 법정에 출두하면서 "독재정권 물러가라. 민주주의 쟁취하자."고 외쳤었기 때문이다. 40여년의 세월을 넘어 똑같이 수의를 입은, 하지만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온 천영초와 최순실이 동시에 외친 "민주주의"라는 단어에는 얼마나 큰 간극 (間隙)이 존재하는 것일까?

 

 

 

 

[ 국정논단 피의자 최순실, 2017/01/25 ] 

 

 

저자 서명숙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이 박정희 키드였음을 밝히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반공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타고 국민교육헌장 암기왕 출신의 소녀는 중학교때 라디오에서 박정희 당선확정이 발표되자 "박정희 대통령 각하, 축하드립니다."라고 일기에 쓰고 잠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생들이 쓸데없이 데모를 해서 입시를 방해한다고 불평하던 소녀는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시대의 수상한 공기를 감지하기 시작한다.

 

얼마전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는 여러 문화매체를 통해 다뤄진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하고 있다. (5월 18일은 본 도서 영초언니의 출간일이기도 하다.) 익숙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1,000만이 넘는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의 구도와 그를 기반으로 한 전개과정이 신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시민을 상징하는 택시운전사가 광주시민이 아니 외지인의 관점에서 80년 광주의 부조리를 겪으며 뜨겁게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많은 관객들이 공감했을 것이다.


 

 [ 영초언니, 서명숙 著, 문학동네, 2017/05/18 ]

 


영초언니를 읽으면서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제주도 출신의 박정희 키드가 민주화의 봄을 꿈꾸는 대학생이 되기까지, 그리고 세월이 흘러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그 시절 실존인물들의 이야기는 내게 흡인력 있게 다가왔다. 20여년의 세월의 간격을 두고 저자 그리고 영초언니와 한 공간을 공유했다는 점도 이 책에 흥미를 느낀 결정적 요소 중 하나였다는 것도 밝혀야겠다. 내가 <영초언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여러 저명인사들의 추천사가 아닌 내게 너무도 익숙한 장소에 서 있는 한 여자를 그린 이 책의 표지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9.14 고려대 시위의 동선, 저자가 엄주웅과 진심을 확인한 경양식집 하얀집 등 추억의 장소를 떠올리며 책에 대한 몰입도를 높일 수 있었다.

 

 [ 영초언니, 서명숙 著, 문학동네, 2017/05/18 ]

 

통제와 검열을 거친 관제뉴스에 길들여진 제주도 비바리(처녀)가 대학에 진학해 조금씩 세상에 눈을 떠가는 과정은 시작부터 운명적이었다. 고대극회와 고대신문사 중 운명에 맡긴 선택을 통해 시작된 저자의 대학시절 그 과정에 영초언니가 있었다. 영초언니는 저자에게 사회적 스승이었고 지식인의 모델이었다. 저자는 영초언니를 통해 스스로 존중하는 법을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여자들끼리의 수다도 얼마든지 진지한 토론이 될 수 있음을 배우기 시작했다. (p. 63) 야학교사를 하던 저자가 신분상승을 위한 검정고시 공부와 모순된 현실을 일깨워주는 것 중에서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자 영초언니는 너무 욕심내지 말라고, 네가 그들을 하루아침에 구할 수는 없다고, 시간이 흐르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구하는 방법을 알게 될거라고 조언하고 다독인다. (P. 70)

 

영초언니는 본인 스스로에게는 엄격했지만 후배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한 선배였고 역사의식과 대의명분을 앞세워 후배들에게 선택을 강제하고 희생을 요구하는 선배가 아니었다. (p. 182) 저자가 그토록 가슴 아파했던 노동자들의 삶 보다 한치도 더 나을게 없는 부모의 신산한 삶을 떠올리며 비겁해지리라 결심했을 때도 영초언니는 배신감이 아닌 이해와 포용 그리고 미안함을 내보였다. 영초언니의 법정 최후진술은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노리는 철저한 1인 독재정권이고 유신헌법은 그런 목적을 위해 꼼수로 만들어진 초법적인 법이기 때문에 그런 법에 의거하여 우리를 가둔 것이야말로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P. 206)

 


윌리엄 터너와 그의 대표작 <전함 테메레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를 대신하여 2020년부터 영국 20파운드 지폐의 새로운 모델이 될 예정이다. <전함 테메레르> BBC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영국 그림으로 꼽히기도 했다. 터너와 그의 작품 <전함 테메레르>가 영국인들에게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 "굿바이 스미스, 하이 터너" 英 20파운드 지폐 새 모델 발표, 2016/04/23 ]

 

트라팔가 해전 승리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의 중앙에는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기함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1838년 영국 해군은 테메레르호를 런던의 운수업자에게 팔아넘겼고 배를 산 운수업자는 배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템즈 강가로 산책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다.

 

 

[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 Trafalgar Square, London ] 

 

 

 [ 포츠머스 해군기지의 빅토리호, HMS Victory, Portsmouth ]



"이 책은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한 여성에게 바치는 사랑노래입니다."

 

저자 서명숙은 프롤로그를 통해 이 책은 엄혹한 시절을 함께 견뎌낸 영초언니, 천영초에게 보내는 헌사임을 밝히며 이 노래를 통해 사고로 잃어버린 그녀의 기억이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길 소망한다고 하였다. 이 책에는 국회의원, 장관, 시민운동가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실존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영초언니와 함께 민주화 운동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이제 세상 사람들이 다 알만한 인물이 되었다. 역사는 영초언니를 어떻게 기억할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녀의 몫도 있을까?

 

 

트라팔가에서 테메레르는 넬슨 제독의 생명을 구하진 못했지만 조국 영국을 구했다. 테메레르의 빅토리호 구원이 없었다면 19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아닌 저물어가는 일몰이었을지도 모른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르도 있었다고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그를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영초언니>는 서명숙이 그린 <전함 테메레르>. 저자 서명숙은 천영초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영초언니 천영초를 기억해야 한다. 영초언니는 혼자서 행복해지는 것 자체가 마음의 죄가 되는 시절,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이름 없는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천영초가 목놓아 외친 민주주의와 박근혜, 최순실이 외친 민주주의의 간극을 좁히는 길이며,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모독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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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시모쓰키 아오이 지음, 김은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완전공략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몇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 크리스티라는 추리소설 거장의 모든 작품을 읽고 평을 정리했다는 점

 

두번째, 크리스티의 작품을 고전으로서 아닌 현시대의 관점에서 평가했다는 점

 

세번째, 스토리를 소개하면서 추리소설 핵심트릭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다는 점

 

 

 

 

첫번째, 크리스티라는 추리소설 거장의 모든 작품을 읽고 평을 정리했다는 점

 

저자인 시모쓰키 아오이는 미스터리 전문 평론가로서 애거사 크리스티가 발표한 장단편 소설 전작을 읽고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공략>이라는 제목의 한권의 책으로 정리하였다. 사실 애거사 크리스티는 명실상부한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그녀의 소설은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추리소설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같은 그녀의 대표작은 한번쯤은 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뿐만 아니라 추리소설 전문 평론가들조차 그녀의 전 작품을 집대성하려는 시도는 현재까지 없었다. 한발 더 나아가 저자는 발표순서대로 작품을 읽어나가며 크리스티 작품의 변화의 지점들을 포착하고 그녀가 작가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에까지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크리스티 작품에 대한 완전공략집이자 작가에 대한 작가론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본 도서를 통해 그녀가 우리에게 선물한 트릭과 수수께끼뿐만 아니라 '애거사 크리스티'라는 작가에 대해 알게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크리스티의 작품을 고전으로서 아닌 현시대의 관점에서 평가했다는 점

 

본 도서의 가장 특징 중 하나는 크리스티 작품을 고전으로서가 아닌 현시대에 출판된 신작 추리소설과 동일선상에서 읽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대 추리소설을 읽어온 미스터리 전문 평론가로서 중립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평가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현대의 독자들이 고전 추리소설을 읽고 즐거움을 느낄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고민의 결과물이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작가로서 데뷔한지도 거의 100년 가까이 지난 만큼 저자는 우리가 그렇게도 추앙하며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은 소설상의 트릭과 미스 디렉션, 구성이 발전된 현대 추리소설에 비해 부족해보일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점을 염려한 듯하다. 하지만, 저자가 언급한바와 같이 크리스티의 작품은 트릭에만 의존하여 작품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트릭을 섬세하고 치밀하게 드라마속에 구성함으로서 소설 전체가 트릭을 위해 유기적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서평을 읽다보면 추리소설이 있기 이전에 추리소설이란 장르 자체를 규정한 크리스티의 저력에 대해 느낄 수 있다. 또한 저자는 활발히 활동하는 추리소설 평론가답게 크리스티의 각각의 작품의 연관선상에 있는 현대의 작품을 독자들에게 제시해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세번째, 스토리를 소개하면서 추리소설 핵심트릭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다는 점

 

 

 

 

알다시피 트릭은 추리소설의 핵심인만큼 지금까지 나온 추리소설에 대한 서평은 독자들이 해당 작품을 읽었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여 작품의 스토리와 트릭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책은 크리스티 전 작품의 줄거리를 소개하면서도 본문상에서 스포일러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처 작품을 읽지 못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앗아가지 않는다. 이 보다는 오히려 작품에 대한 소개와 가이드 역할에 충실히 임하고 있다. 따라서, 본 도서의 독자들은 아직 읽지 않은 작품에 대한 평도 안심하고 읽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저자의 작품에 대한 평가 중 신선하다고 느꼈던 점이 한가지가 있다. 저자는 크리스티의 각각의 작품마다 한줄평을 남기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3-4페이지로 녹여내고 있는데, 이 한줄평이 독특하면서 재미있었다. 본격적으로 서평을 읽기전에 작품의 분위기와 작품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을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시사/교양 예능을 표방하는 '썰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사안을 종합하는 패널들의 품평을 듣는 느낌이랄까?

 

 

 

 

결론적으로 본 도서는 갓 추리소설에 입문한 초심자부터 웬만한 추리소설계의 명작들을 섭렵한 매니아층에 이르기까지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크리스티와 그의 작품들에 대한 친절한 가이드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주관적인 평가가 들어간 면도 있지만 크리스티의 모든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면서 추리소설의 역사에서 그녀와 그녀의 작품들이 위치하는 지점을 설명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시도해보지 못한 영역이고 높이 평가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애거사크리스티, #한겨레출판, #시모쓰키아오이, #오리엔트특급살인, #애크로이드살인사건, #백주의악마, #그리고아무도없었다, #ABC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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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보이 2017-08-17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세한 리뷰 감사합니다. 완전공략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책이네요. 책 내용이 기대가 됩니다^^

2017-08-19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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