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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평점 :
중대한 순간은 늘 어려운 법이다. 입학
첫날, 첫눈, 첫 크리스마스, 뭐든 첫 번째가 어렵다. 추악했던 기억들, 무기력했던 감정들이 모두 수면 위로 떠오른다. – p. 470 -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이 내 기억 속에 각인된 이유는 이 사건이 세상에
미치는 크나큰 여파도 있었지만 이 사건이 나의 중대한 순간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1999년 4월 나는 대학 신입생이었다. 자의와 타의가 뒤섞인 고통과 인내로 점철된 고3시절을 지나 꿈에
그리던 대학 캠퍼스의 낭만과 여유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의 내게 이 사건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유난히
싱그럽게 느껴졌던 캠퍼스라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살인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그 대조적인 상황적
간극이 내게 무겁게 다가왔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한 2007년에는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사건이 일어났다. 33명을 죽이고 29명을
다치게 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승희는 자신의 공격을 설명하려고 성명서를 남겼다. 조승희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사람으로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에릭과 딜런을 언급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연구실
문 앞에 놓여진 신문 1면의 조승희의 사진과 사건에 대한 헤드라인을 보고 받은 강렬한 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타인을 향한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 같은 악의 발현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간을 두고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총기난사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사건의 발생원인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커져갔다. "도대체 왜?"
그후 나는 사건에 대한 기사와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등을 찾아보며 나름대로
사건이 발생한 원인을 이해해보고자 하였다. 이 사건이 세상에 미친 파장에 걸맞게 여러 영화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마이클 무어는 도대체 왜 미국에만 이렇게 많은 총기사고가 발생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을 만들었다. 볼링 포 콜럼바인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그것은 범인들에게 영향을 준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된 마를린 맨슨에게 마이클 무어가 던진 질문과 답이었다.
“사건의 당사자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소?”
“말하는 대신 듣겠어요. 듣는 사람도 있어야죠.”
사건의 원인과 결과, 일어난 사실들에
대한 정보에만 갈급했던 내게 마를린 맨슨의 대답은 놀라웠다. 볼링 포 콜럼바인이 사건의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재구성하였다면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는 당사자의 얘기를 듣는 영화에 가까웠다. 마를린 맨슨의
말처럼 사건의 원인은 모두가 궁금해하는데 반해 사건의 당사자들이 왜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관한 그들의 사정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이 사건에
접근한 나에게 영화 엘리펀트는 사건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사나
영화들만으로 나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 책 "콜럼바인 : 비극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보고서"를 만났다. 2만5천페이지가
넘는 문서와 영상들, 취재부터 집필까지 10년이 걸린 저널리즘의
역작이자 여러 차례 최고의 논픽션상을 수상하고 2010년 에드거상
Best Fact Crime 부문을 수상한 이 책 속에서 나는 대중을 위한 설득논리가 아닌 나 자신을 이해시킬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자 데이브 컬런은 책 속에서 사건발생 이전과 이후를 넘나들며 검토 가능한 수많은
자료를 통해 사건의 전개과정과 범인들의 인격과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사건 이후 남겨진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객관화된 자료를 통해 사건을 돌아보며 사건의
원인에 대한 규명이 왜 그토록 어려웠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콜럼바인 사태를 떠올릴 때면, 트렌치코드
마피아 출신의 부적응자 고스족 두명이 오랫동안 이어져온 반목 때문에 고등학교에 난입하여 운동선수를 공격한 사건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고스족도 부적응자도 갑작스러운
감정의 폭발도 아니었다. 반목도 트렌치코트 마피아도 아니었다. 이런
요소들은 원래 콜럼바인에 있던 것들이다. 그래서 소문이 그토록 빠르게 퍼질수 있었다. 그러나 살인자들과는 전혀 무관했다. 마를린 맨슨, 히틀러 생일, 소수민족,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 p. 252 -
이 사건과 얽혀진 이해관계자의 집단은 저마다의 이유로 사건의 원인에 대해 규정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사건의 진실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학살극이
끝나자 범인들의 이름이나 정체가 밝혀지기 전부터 기자들은 이들을 하나의 부류로 단정했다. 사건의 발생장소인
학교라는 공간은 교내 괴롭힘과 따돌림으로 인한 외톨이의 소행이라는 손쉬운 사건의 동기를 제공했다. 그리고
교내 총격자에게 어울리는 가공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그렇게 고스족, 게이, 사회부적응자, 거리의 깡패는 외톨이의 구체화된 이미지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신문은 실제로 그 광경을 보았다는 단 한명의 진술로 가설을 만들어 나갔고, 아예 목격자를 거론하지 않은 신문도 있었다. 로이터는 "많은 목격자들"이 그렇게 주장했다고 했고, USA투데이는 "학생들"이라고
했다. "학생"은 "목격자"와 동의어였다. 그날 일어났던 모든 일을 다 목격했고 살인자의 모든 것을 다 보았다는 것이다.
비약도 이런 비약이 없었다. – p. 257 –
경관들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대형 폭탄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언론매체에 새로운 충격파를 던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기자들은 발견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형사들은 목표 대상가설을 즉시 버렸다.
처음에는 누군가를 노리고 저지른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를 완전히 잘못 짚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언론매체는 이를 고수했다. 그들은 콜럼바인에서 일어난 비극이 총격사건이며 살인자들은 운동선수를 노린
부적응자들이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그들은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 p. 213 -
경관들은 사건 초기부터 보고서에 범행동기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담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우리는 사실을 다룹니다." "이런 저런
결론을 내리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노력할 겁니다. 여기 사실이 있습니다.
결론은 보고서를 읽는 여러분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언론의 오보와 책임회피, 사건을 해결해야 할 전문가들의 직무유기로 인해 대중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얼치기 전문가가 되어갔다.
조사관들이 안에서 벌어진 상황을 밝혀내는데 수개월이 걸렸다. 살인 동기를 밝히는데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형사
팀이 사건을 설명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 터였다. 대중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 언론매체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추측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 p. 122 -
범죄와 재난상황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는 뭐가 뭔지 혼란스럽다가 점차 명료하게
전모가 밝혀지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다. 사실관계가 파악되고 모호한 면이 걷히면 정확한 그림이 잡힌다. 그리고 대중이 이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려진 그림은
진실과 무관할 때도 많다. 1999년 콜럼바인의 살인과 공포는 현실이었지만 당시에는 사건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이해관계자들이 만들어 낸 허상만 존재했다. 심지어 콜럼바인 사건에 대한 대중들의 오해는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콜럼바인 사건의 첫 희생자 레이첼 조이 스콧을 주인공으로 콜럼바인 사건의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 아임낫어쉐임드는 사건의 범인을 트렌치코트 마피아 출신의 교내 따돌림의 희생양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사건 발생일 4월 20일은 히틀러의 탄생일임을 언급한다.
책속에서 에릭이 학교를 범행의 대상으로 정한 것은 언급한 대목도 흥미로웠다. 학교는 에릭에게 있어 사춘기 시절 자신이 학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곳이자 자신 보다 열등하도고 생각하는 타인들
즉, 로봇을 양성하는 공장이었다. 에릭은 사건이 발생하기
2년전부터 학교 총기사건을 주목하고 수업 과제물에서 그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총알이 장전된 권총을 학교에 가져가는 것은 계산기를 가져가는 것만틈이나 쉬운 일이다." 영어교사는
과제물을 이렇게 평가했다. "빈틈없고 논리적임. 잘했음" – p. 336 -
사회학자 마크 위르겐스마이어는 "테러리즘의
핵심적 특징은 폭력의 상연"이라고 하였다. 에릭이
일지에서 청중이라는 말을 언급하였듯이 에릭에게 있어서 콜럼바인 학살은 공연이었다. 에릭의 의도는 스포츠
경기나 댄스 같은 일회성 사건으로 묻히는 것이 아닌 청중이 평생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 극한의 공포를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건 이후 전국의 학부모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를 두려워한 것과 콜럼바인이 세상에 미친 파장을 생각해볼 때
에릭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에릭이 나름의 이유로 학교에 주목한것처럼 우리는 왜 학교였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은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사건을 보는 시각을 개인의 불행이
아닌, 문제의 발생원인이자 구조적 문제인 사회 시스템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콜럼바인 사건은 사회시스템의 결함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에릭과 같은
사이코패스, 딜런과 같은 우울증 환자를 사회가 잉태하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징후를
발견하고 당사자들이 벌인 콜럼바인과 같은 사건을 제도와 시스템으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학교가 공격 받은 것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결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돈 마르크스하우젠 목사는 사탄 운운하는 말이 영 못마땅했다. 그는 두 아이가 마음속에 증오를 품고 무기를 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일을 어떻게 그리고 왜 했는지 사회가 서둘러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쉽게 빠져나가려는 속셈이었다. 자신들이 책임지고 조사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 p. 204 -
책임전가는 사건을 해결된 것처럼 보이기 위한 손쉬운 방편으로 작용한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문제의 영역으로부터 배제시키고 부조리가 관행으로 자리잡고 하나의 삶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전체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변화시킨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원인을 찾기 위해 탐구해야 한다. 문제를 문제로 두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만 바꾸는 태도로서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고, 악의 연쇄만 되풀이될 뿐이다. 콜럼바인
사건은 사회 구조적 문제였다. 하지만 사회 구조적 문제는 사건을 바라보는 프레임의 변화로 우리 모두의
문제에서 개인의 문제로 종결되어 버렸다. 볼링 포 콜럼바인의 문제제기는 왜 본질적인 원인을
찾지 않고 핀트가 어긋난 부차적인 문제들만 들쑤시느냐는 것이다.
콜럼바인 사건에 접근해갈수록 어쩔 수 없이 세월호가 떠올랐다.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는 대표적인 프레임은 신자유주의이다. 세월호는
우연하게 발생한 단순한 해양사고가 아니라 사회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이 집약된 예견된 사고라는 것이다. 이윤
극대화를 위한 증축과 개축, 과적과 평형수 부족이 그렇고, 선원들
대부분이 비정규직이었다는 점이 그렇다. 또한,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안전을 담보하고 관리해야할 국가기관이 구조적 유착으로 탈규제에 이르게 된 정황이 그렇다. 세월호는
국가와 사회의 부재 속에 약육강식의 원초적 본능과 무질서만이 존재하는 정글에서 잉태되었다. 또한 이는
원자화된 개인의 처절한 몸부림만 남아있는 2000년대 대한민국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라는 쇠로 만든 새장 (The
Iron Cage)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은 시스템의 부속품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시스템의
부속품에서 이탈한 순간, 파편화된 개인은 사회에서 고립되어 무력감 속에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se)’라는 용어가 있다. ‘사덴’은 상처를 주는것, ‘프로이데’는 환희라는 뜻으로 ‘샤덴프로이데’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줌으로서 느끼는 환희를 의미한다. 우리 중 누구도 에릭처럼 세상의 멸망을 꿈꾸거나
딜런처럼 자살충동을 느끼는 등 부정적 파괴욕망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나의 행위로
인해 타인이 처하게 되는 고난적 상황을 기뻐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적 기제는 어떠한 상황하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너무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 나라는 자기정체성이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만이 깃든 상태에서 악은 발현될 수 있다.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공허하고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악이 구체화되는 것이다. 불평등한 격차가 역전의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사회, 개선의
가능성, 그 여지 조차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불안과 허무를 느낀다. 그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 고통과 고뇌의 원인 조차
규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사회구조의 거대한 힘을 느끼게 되는 순간, 개인이 세계와 단절되고 사회와 유리되었을 때 악은 발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은 여러 이점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자체에서 악을 잉태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개인을 사회에서 고립시키고 공허함을 느끼게 하고 고통과 번뇌를 느끼게 함으로서 결국 악을 발현시킨다. 시스템
내부에 이미 내정되어 있어 악은 시스템에 기생하며 악이 연쇄적으로 발현된다.
물론 완벽한 이념은 없다. 이데올로기는
적절한 방법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지나친 경쟁 속에서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할 것은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인간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가 저 악마의 맷돌의 수레바퀴 아래로 빨려 들어가기 전에…
악이 매력적인 이유는 악은 오로지 자기자신과 자신의 방식을 믿는 확고한 신뢰가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만 옳고 나만 믿을 수 있다라는 생각은 나 이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점차 파편화되고 원자화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 속에서 악은 번성한다. 악을 극복하는 방법은 신뢰와 연대를 통해서 가능하다.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공존하며 살아 갈 수 있다.
패트릭은 세상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도서관 바닥에 쓰러져 있으면서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해 동안 찬찬히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것은 믿음이었다. 제가 창문에서 뛰어내렸을 때 누군가가 잘 잡아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사랑스러운 세상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p. 504 -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계에 절망하며 무릎 꿇지 않고 같이 신뢰, 공감, 연대하며 상호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사소한 변화와 미약한 성공이라고 하더라도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생존자들은 걱정을 잊으려고 평범한 일상에 집중했고 이런 승리를 통해 위기를 헤쳐갔다. – p. 1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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