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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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일반적으로 개별 경제주체의 의사결정을 다루는 미시 경제학부터 국가의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을 다루는 거시 경제학, , 환율이나 자유무역협정 등 국가간의 문제를 다루는 국제 경제학에 이루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와 사회현상을 복잡한 이론과 개념정립을 시도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경제학이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대표적인 사회과학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경제학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거나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들을 위해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 나왔다. 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인 장하준 교수의 신작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이다군나르 뮈르달 상 수상, 최연소 바실리 레온티예프 상 수상이 말해주듯 장하준 교수는 세계적인 경제학자이지만, 동시에 지금까지 십여권 이상의 책이 집필하여 45개국 이상의 국가에서 200만부 이상이 판매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특히,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쾌도난마 한국경제, 사다리 걷어차기등 이미 대중에서 익숙한 베스트셀러들로 대중들의 경제학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경제학의 저변 확대에 기여해왔다.

 

 

물론 이전 도서들도 모두 경제학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를 기반으로 사회현상을 쉽게 설명하면서도 깊은 통찰력과 아포리즘이 담겨 있는 훌륭한 도서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번 신작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은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이는 이 책의 부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는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식재료들을 통해서 경제학이 바라보는 현실을 연결하여 설명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사실 작가 장하준 교수도 책에서 맺는말을 통해 밝히고 있지만, 경제학과 음식은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장하준 교수는 이런 경제학과 음식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섭취하는 것처럼 경제학을 어떻게 하면 맛있게 섭취할 수 있을지에 대해 독자들에게 촌철 같은 조언을 하고 있다. 이는 경제학도 음식만큼이나 다양한 관점과 시각에서 평가하고 골고루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또 새로운 이론과 현상을 대할 때 편견과 선입관을 떠나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는 것, 음식을 먹거나 조리할 때와 마찬가지로 경제학을 요리할 때 사용하는 재료의 출처와 기원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생각을 기반으로 저자는 수십가지의 음식과 식재료를 소재 삼아 가난과 부, 성장과 몰락, 공정과 불평등, 민영화와 국영화, 규제 철폐와 제한, 복지 확대와 복지 축소 등 따끈따끈한 경제의 현안들을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경제와 관련한 각종 고정 관념과 편견, 오해를 불식시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경제학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를 높이는 것을 넘어서 함께 더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방법과 비전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권의 책을 통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맛있는 음식과 식재료를 소개하면서 경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더 나아가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니... '이런 책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리뷰를 하면서 괜한 오버나 과장을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당신, 한번만이라도 이 책을 접해보길 진심으로 추천한다. 물론 책을 직접 읽으면서 이 흥미로운 내용을 알아가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만, 책을 접하기 전에 책의 내용에 대해 미심쩍어 하는 분들을 위해 내가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마음 같아서는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18가지 이야기를 모두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 관계상, 또 직접 책을 읽을 독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3개의 에피소드만 소개하는 점 양해 부탁 드린다.

 

 

첫번째 식재료는 '라임'이다. 라임은 괴혈병 치료와 예방에 효과적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 이전에도 이는 비밀이 아니었다. 당시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 중 하나로 군림했던 영국 해군에게 이 '라임'이 없었다면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인류가 항해를 시작한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괴혈병으로 목숨을 잃은 선원은 200만명이 넘는다고 알려졌다. 영국 해군은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이 방법을 효과적으로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발휘하여 선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이 내린 단호한 결정은 항해를 떠나기 전에 선원들이 라임을 챙기도록 맡겨 두는 대신 배급품에 의무적으로 포함시키고, 선원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료에 이를 섞어서 모두가 반드시 비타민C를 섭취하게 조치한 것이다. 작가는 '라임'과 얽힌 역사적 사례를 통해 현재 인류의 화두인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괴혈병''기후변화' 문제의 공통점은 우리 모두 해결책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 해군과 '라임' 사례에서 보았듯이 그 해결책의 실천과정을 시장에서 각 개인이 내리는 선택에 맡겨 둘 수는 없다. 범사회적 행동을 가능케 하는 모든 매커니즘. , 정부, 국제적 협력, 국제협약 등을 총동원해서 해결책들이 실천에 옮겨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라임' 사례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개인 행동의 변화가 단호한 대규모 공적 조치와 함께 이루어질 때 사회 변화는 가장 효과적으로 발현된다는 사실이다.

 

 

두번째 식재료는 '멸치'이다. 멸치는 19세기 중반 페루가 누린 경제적 번영의 가장 큰 동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페루가 멸치를 수출해서 돈을 번 건 아니었다. 당시 페루는 바닷새의 구아노(마른 새똥)를 수출해서 국가적 번영을 누렸다. 구아노는 질산염과 인이 풍부하고 냄새가 그다지 역겹지 않아서 인기 높은 비료였을 뿐 아니라 화약의 핵심 재료인 질산칼륨이 들어 있어서 화약 제조에도 사용되는 등 활용도가 높은 자원이었다. 페루의 구아노는 태평양 연안의 섬들에 모여 사는 새들인 가마우지와 부비(얼가니새)의 배설물이다. 바로 이 새들의 주요 먹이감이 칠레 남쪽에서부터 페루 북쪽을 잇는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의 영양소 풍부한 훔볼트 해류를 타고 이동하는 '멸치'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이 자원으로서 구아노가 차지하는 위상을 허물어뜨렸다. 1909년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공기 중에서 질소를 분리하고 고압전류를 사용해 암모니아를 만들어 인공비료를 제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또 다른 독일의 과학자 카를 보슈가 인공 비료를 대량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구아노는 비료계의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구아노보다 더 중요한 질산염의 공급원인 초석의 가치도 없어졌다. 이처럼 천연자원을 대체할 인공 물질 제조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경제 체제는 기존 시장(구아노 시장)을 완전히 파괴하고 새로운 시장(화학 비료 시장)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추게 한다. 우리가 '멸치' 사례를 통해 깨닫게 되는 건 고도의 기술력을 갖추면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회와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식재료는 '닭고기'이다. 저자의 인도인 친구는 고국을 방문할 때 항공료가 월등히 싼 러시아 국영 항공인 아에로플로트를 이용했다. 그 친구와 같은 비행기를 탄 다른 인도인 승객이 본인이 채식주의자인 사실을 밝히며 승무원에게 닭고기 말고 다른 식사를 제공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승무원은 아에로플로트가 사회주의 항공사여서 특별 대우는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사례를 소개하며 서로 다른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공평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동한 사회적으로 불평등에 대한 논의가 오랫동안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 개인의 필요와 역량은 무시한 채 결과와 기회에만 초점을 맞춰 논의된 측면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진보주의 진영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결과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 공평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마다 다른 필요와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반대로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기회의 평등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정한 경쟁이 되려면 개인 간의 역량이 어느 정도는 균등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닭고기 사례는 공정한 세상을 위해서는 기회의 평등뿐 아니라 결과의 평등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는 군침 도는 맛있는 음식과 식재료부터 출발하여 이와 연관된 사회현상과 경제이론까지 독자들이 맛있게 섭취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책이다. 이를 위해 경제학의 개념을 실제 생활에 대입해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며 쉽게 풀어내어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경제학이 실제 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아이디어도 제시하고 있다. 이보다 더 맛있는 경제학 레시피가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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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문학동네 청소년 66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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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알 것 같았다. 이 아이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이 내가 겪은 여름 중 가장 찬란하고 벅찬 여름이 될 거라는 걸. 마주하는 순간 마다 그리워하게 되는, 유난히도 더운 여름이 계속 되고 있었다." (p. 187)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지나온 세월 동안의 경험과 기억들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한다즐거웠던 추억과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아픔들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시절과 떠올리는 것조차 두렵고 고통스러운 시절들을 거쳐 오늘의 우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하지만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삶이란 저마다 쌓아 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서로가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누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간은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하다하지만 어쩌면 그런 불완전함 이야말로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채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매듭이 되는 것 아닐까신뢰와 사랑자발적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구축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은 불완전한 현실을 일정 부분 해소시켜주는 심연의 해독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인간을 비로소 인간 답게 만들어주고삶을 살아가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는 것은 일견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인 행위처럼 보이는 사랑우정신뢰와 같은 가치들이다서로를 향해 뻗는 온기 어린 손짓이 결국 메마른 삶에 활기가 되어 내일을 밝히는 희망이 된다.



이꽃님 작가의 신작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는 사랑, 우정, 신뢰에 대한 이야기 즉, 우리네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화재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찬'과 스스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라고 생각하는 '지오', 저마다의 아픔과 상처를 지닌 열일곱의 두 아이가 어느 해 여름 우연히 서로를 만나게 되면서 굳게 닫았던 세상을 향한 마음을 조금씩 열고, 함께 하는 삶으로 한걸음 씩 다가간다. 그러는 과정에서 덥고 습한 고통스러운 여름의 나날들은 시원한 바람이 불고 형형색색의 눈부신 푸르름이 아로새겨진 둘만의 새로운 계절이 된다. 젊은 날의 순수한 날것의 감정들과 첫사랑의 열정과 떨림의 순간들이 여름날을 청량감 있는 빛나는 순간들로 채운다. 지오, 유찬 두 아이의 시선을 대변하여 번갈아 교차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의 구조는 이를 한층 더 극대화하고 현장감을 높이면서 독자들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나뭇잎이 초록색 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어떤 잎은 아주 연한 연두색이었고 어떤 잎은 짙은 초록색이었다. 또 어떤 잎은 쨍한 초록색이었고 어떤 잎은 연둣빛이 사라져 가고 있었고 어떤 잎은 눈이 부시게 푸르렀다. 그 모든 잎들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그 순간 유찬의 머리 위로 그토록 다양한 초록 잎들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p. 85)



유찬이네 가족은 서울에서 살다가 할머니의 고향이자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한 '정주(定住)'라는 도시에 정착하게 된다. 일과 후 집에 돌아와도 계속 떠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서울의 삶에 비해 '자리를 잡고 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아버지의 고향 '정주'에서 유찬이의 가족은 안정감을 얻는다. 하지만 떠돌이의 삶에서 '정주(定住)'하는 삶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찰나에 유찬이는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게 된다. 지오 또한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투병생활을 하는 엄마를 지키고 또 의지하면서 불안정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 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혹은 도무지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절로 떠오르는 곳을 고향이라 부른다면 유찬이와 지오에게 고향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상황과 입장 차이로 서로를 오해하고 미워했던 시기를 지나 새로운 만남과 관계정립을 거치며 유찬이와 지오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며, 함께 세상으로, '정주(定住)'하는 삶으로 다시 나아가게 된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상실과 결핍의 과정을 겪으며 천천히 소멸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개개인이 켜켜이 쌓아 올린 저마다의 사연들은 상실과 결핍의 기억을 머금은 채 조용히 빛난다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이해 받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이해라는 것은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와 타인의 배려에 대한 무시와 거부를 넘어서야 하고또한 어떻게든 살아 보기 위해 세상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이해를 이용하는 위선을 극복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그것은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의 고통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진정한 위로의 경험을 얻는다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도 치유 받을  없는 오직 사람에게서만 구할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다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곳이  보이지 않지만인간은 서로 간에 존재하는 적당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과 온기로 서로를 알아볼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니도 안다 아이가.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데 유도가 필요한 게 아이고 마음이 필요하다는 거. 삐뚤어진 마음을 제자리로 돌리는 건 이런 온기가 아닐까? 누군가를 지키는데 필요한 건 마음이라는 그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었다." (p. 162)



우리는 동시대를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또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를 응시한다동시대를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또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를 향하는 것은 인간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Kronos)' 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 (Kairos)'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꿈꾸고 호흡하게 하는 두 번째 심장이 된다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어쩌면 과거에만 얽매여서, 또 편견과 집착, 아집에 파묻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거나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 속 지오의 말처럼 정말로 놀라운 사실은 세상에 대해 절망하고 있던 아이들이 '온 마음을 다하는 순간부터 세상은 변하기 시작한다는 사실 (p. 171)'을 새롭게 깨달은 것이라고 생각한다서로에 대한 관심과 공감진심이 담긴 위로가 진실을 가능하게 하고아주 미약한 부분이나마 세상을 진보 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 아닐까?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는 아픔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빛을 향해 함께 손을 뻗는 청춘의 이야기다. 유난히 무더웠던 2023년의 여름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청량감 있는 소설을 만나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 방금 내가 네 여름 먹었잖아.”

“뭐?”

“네 가슴에서 자꾸만 널 괴롭히는 그 못되고 뜨거운 여름을 내가 콱 먹었다고. 이제 안 뜨거울 거야. 괴롭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을 거야. 두고 봐.” (p.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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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공부가 재미있어지는 순간 (50만 부 기념 우리들 에디션) - 공부에 지친 청소년들을 위한 힐링 에세이
박성혁 지음 / 다산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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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의 신 오시리스도 조각조각 부서질 수 있다사랑이 끝날 때경력이 단절될 때소중한 꿈이 날아갈 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익숙했던 질서가 사라진 자리에는 체념불안불확실절망이 들어찬다허무주의와 심연이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등장해 안정적이고 바람직한 삶의 가치들을 파괴한다결국 혼돈이 출현한다. “ - <질서와 혼돈> 에서 -

 

 

삶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안정된 상태라고 느끼는 순간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것이 느닷없이 닥친다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혼돈 속에서 우리 삶은 현실부정과 절망,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되어 간다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점철되어 있다안정된 질서 속에 갑자기 혼돈이 찾아오기도 하는 반면, 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절망적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도 한다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질서와 혼돈의 경계 위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삶에서 인생의 의미가 빛을 잃어가고절망과 두려움이 고개를 드는 순간과 마주칠 때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학부시절 오랜 기간 꿈꾸었고 치열하게 준비하였던 행정고시에서 최종적으로 탈락했을 때, 나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인생에서 처음 경험해보는 실패는 그동안 내가 투자했던 시간과 노력의 무게만큼이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수험생활을 하면서도 정해지지 않는 혼돈의 시간 동안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삶의 무작위성이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지만, 이제 눈앞의 현실이 되어 목을 죄어오는 삶의 조건들 앞에서 나는 숨이 막히고 두려워 남몰래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세상은 내 편이 아닌 것만 같았고, 조각나고 깨어진 꿈을 추스리고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 시절의 나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정처 없이 거리를 배회하듯 그냥 되는 대로 아무런 목표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그러던 중 남들에 비해 뒤쳐진 채 불과 얼마 전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취업시장에 급하게 눈을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그 중 한 기업에 취업을 하게 되었고 나는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나긴 혼돈 끝에 찾아온 질서였다. 하지만 취업을 한 뒤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애초에 목표로 했던 곳에 취업했던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꿈을 쫓다가 실패한 후 인생의 선로에서 이탈하여 가까스로 도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받아준 회사에는 감사했지만, 회사는 나에게 새로운 꿈이라기보다는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직장인으로서의 조직생활은 힘들었고, 또 다른 절망과 혼돈, 안정과 질서가 반복해서 찾아왔다. 질서가 무너질 때면 원망과 현실부정 그리고 두려움이 찾아왔다. ‘왜 하필 나에게지금 이 순간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하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가장 두려웠던 건 눈앞의 현실이 되어 다가올지도 모를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였다불안과 두려움은 자가 증식하며 다른 모든 감정을 잠재우며 무한정으로 퍼져 나갔다삶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내 마음 깊은 곳 심연에 머물고 있는 괴물은 점점 더 포악해져갔다삶의 의미는 빛을 잃어갔고절망과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수험생으로서 일정한 루틴을 오랜 기간 유지했던 성실함은 회사생활에 적응하고 새로운 질서와 안정을 만들어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회사가 성장하면서 직장인으로서 나도 성장하면서 결혼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이 책 <이토록 공부가 재밌어지는 순간>을 만났다. 업무상 필요에 의해서 물류 관련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당시 나는 IT회사의 기획팀에 근무하고 있었고 운송, 보관, 포장 등 물류의 전 단계에 걸쳐 센서, 제어기술 등의 IT기술을 접목해 물류운영의 효율화와 비용 절감을 이뤄내는 스마트물류가 각광 받고 있었다. 신규 사업 진출을 검토하기 위해서 물류업 전반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고, 회사 차원에서도 사업운영을 위해 물류관리 자격을 갖춘 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회사에서는 하루하루 바쁘게 돌아가는 기획팀 업무를 수행하고 집에 돌아오면 이제 막 결혼한 신혼으로서 행복하지만 새롭게 경험하고 적응해야할 게 너무나 많은 좌충우돌의 삶을 살고 있었다. 내가 가진 삶의 조건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작고 사소한 판단이 모여 내 하루를 이루고, 그 하루가 결국 내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지금의 나를 좀 더 강하고, 좀 더 지혜롭고, 좀 더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p. 57)

 

 

수험생활을 하면서도 한계에 부딪치거나 매너리즘에 빠질 때면 합격수기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이번에도 주어진 시간과 조건하에 성공적인 시험 준비를 위해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있던 중에 지인의 추천으로 <이토록 공부가 재밌어지는 순간>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에세이라는 생각에 가볍게 생각하고 훑어봤지만,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특히, "내 인생은 단 한 번뿐이고, 나는 세상에서 내 인생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사람이다. p. 56)“는 아주 단순하지만 쉽게 잊고 지낸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오늘 하루를 어떻게 채울지에 대한 작은 결정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는 내 수험생활을 지탱했던 기본 원칙이자 신조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이라는 건 현실의 나로부터 까마득하게 멀리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오늘 하루쯤 마구 낭비해도 내 삶의 전체, 즉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 삶을 구성하는 하루하루가 이미 '내 인생'을 이루는 작은 조각들이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내 인생을 만드는 귀한 재료 p.198)" 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 따로, 내 인생 따로는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채울지 내가 내린 결정들이 모여서 내 인생을 이루고, 나를 만드는 것이다. 이 단순하고 당연한 체험적 진리는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날들이 있는 젊은 시절에는 참 깨닫기 어려운 것 같다. 내가 이를 처음 체감했건 소설 <대망>을 읽고서였다.

 

 

"인생...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순간 순간의 누적에 지나지 않는다. 한 순간의 만남을 소중히 한다....아니, 순간의 만남에 정성을 다해 대하려는 다도(茶道)의 마음이야 말로 인생 그 자체를 충실하게 하는 진실을 말해준다." - <대망> 에서 -

 

 

"인생은 순간의 누적이다. 순간의 만남을 소중히 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진실이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 소설을 읽으며 난세를 수놓은 수많은 명장과 영웅들 속에서 유독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인생에 대해 읊조리듯 말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에 관한 아포리즘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이 넋두리를 늘어놓듯 한 이 말은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정말 그렇지 않을까?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삶 앞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진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순간을 충실히 보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서 삶의 순간, 순간이 켜켜이 쌓여 종국에는 일생이라는 기적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 <이토록 공부가 재밌어지는 순간>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인간과 동물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는 인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산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인간의 정신 안에서 주관적이고상대적이며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가 된다반면 동물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의 적용을 받는다동물에게는 시간의 흐름을 걸러내는 장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따라서 동물들은 단지 이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며 항상 현재를 살 뿐이다. 반대로 인간은 생애 전반에 걸쳐 자신을 개념화하는 존재 즉시간을 인식하는 동물이다우리는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존재다현재의 우리는 미래에 매여 있는 동시에 우리의 미래도 현재를 기반으로 설계될 수밖에 없다결국 현재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채울 것인가가 누군가의 삶이되고 인생이 된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렇게 순간에 충실하게, 의미 있는 시간들로 하루하루를 보내도 삶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한 영역에 자리해 있고, 질서와 혼돈이 뒤섞여 있다. 이때, 공부는 인생에 보탬이 될 지식과 지혜를 얻는 '멋진 탐험'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조만간 막이 오를 본격적인 인생을 위한 '마음 단련' p. 63)"이라는 저자의 말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정말 그렇지 않을까공부는 학생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인생 전반에 걸쳐 삶을 탐구하는 수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부란 내 인생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어줄 '지식'을 얻는 탐험이자, 풍성하게 만들어줄 '지혜'를 얻는 탐험 (p. 59)"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절망과 혼돈의 시기를 극복한 원동력은 영원한 삶에 대한 지향이 아닌 당장의 삶, 내일에 대한 믿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일이 반드시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활기가 희망의 불씨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믿음으로 쌓아올린 매일 매일의 삶이 도피처를 만들고, 메마른 삶에 활기가 되어 내일을 이루고 희망이 된다고 믿는다.

 

 

한계는 절실히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걸러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얼마나 강렬하게 원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기회죠. 한계라는 건 다른 사람들을 멈추게 하려고 거기 있는 겁니다. 뜨겁게 원하는 나 말고요.“ p. 135)

 

 

삶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혼돈과 절망의 시간에 심연에 들어앉아 있는 괴물은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며 삶을 집어삼킨다. 하지만 진정한 삶은 혼돈 너머에 자리해 있다. 괴물 앞에서 존재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견디며 힘없는 먹잇감처럼 숨죽이고 움츠리지 않고 맞서 싸울때 우리는 진정한 삶을 되찾을 수 있다. 삶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낄 때, 절망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맞설 때, 새로운 길이 열리고 고통의 해독제가 되어줄 새로운 삶의 목적을 갖게 된다는 걸 나는 살면서 절실히 체험했다. 심연의 어둠이 비록 두려울지라도 회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눈을 맞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어려움과 그에 딸린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짊어질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수용한다는 것은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그 책임이란 다름 아닌 강인한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주어진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며 그 삶을 살아내는 것일 것이다하지만 우리는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기꺼이 짊어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현실의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용기를 가지고 상황에 대응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시간들로 하루하루를 충실히 채워나가며, 희망 찬 내일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지워나갈 때 혼돈 속에서도 질서는 세워질 수 있고, 우리가 꿈꾸는 삶 또한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토록 공부가 재밌어지는 순간>은 청소년을 위한 에세이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모범답안은 존재하지 않는다많은 사람들이 삶이 던지는 시험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각자가 서로 다른 시험에 응하고 있다는 것을 종종 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타인의 답을 모방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모범답안을 찾는 것으로는 세상이 던지는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다. 공부란 어떤 것이고, 우리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청소년부터 더 나은 삶을 꿈꾸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성인들에게 <이토록 공부가 재밌어지는 순간>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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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
최은광 지음 / 길벗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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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종이책 및 이북을 구매한 후 주관적으로 남기는 리뷰입니다. (내돈내산)

"작가의, 작가에 의한, 작가를 위한", "작가를 위한 단 하나의 프로그램"



이는 본 서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를 집필한 저자 최은광 작가가 '스크리브너(Scrivener)'를 소개하는 문구이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크리브너'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스크리브너는 작가를 위해 디자인된 글쓰기에 최적화된 전문 프로그램이다. 스크리브너는 MS워드나 한글 등의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워드프로세싱 기능뿐만 아니라 작가가 글의 전체적인 체계를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아웃라이닝 기능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점때문에 스크리브너는 단순한 텍스트 편집기를 넘어선 '글 만들기 프로그램'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가고 있다. 또한, 스크리브너는 텍스트화된 문서와 메모 뿐만 아니라 그림, 소리, 동영상, 웹페이지 등 다양한 형태의 메타데이터를 관리할 수 있는 툴(Tool)도 제공하고 있다. 요약하면 스크리브너는 작가들이 글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관련자료를 수집하고 소주제별 글을 작성하고 대주제에 맞춘 완결된 글을 완성시키기까지 작업과정과 흐름에 맞춘 모든 기능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빈 화면이 한 권의 책이 되기까지 글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라는 책의 표지에 표기되어 있는 문구가 스크리브너가 어떤 프로그램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스크리브너는 궁극의 집필 프로그램, 글쓰기에 최적화된 프로그램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고 스크리브너를 사용하고자 하는 작가들도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스크리브너를 사용하기 위한 진입장벽은 대단히 높은 편에 속한다. 스크리브너 자체가 워낙 많은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만큼 유저들이 처음에 적응하면서 사용 방법을 익히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스크리너에 대한 매뉴얼은 방대한 분량의 영어 버젼만 존재하고 있고, 한글로 된 매뉴얼이나 강의도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스크리브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써보고 싶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입문을 하고 싶어도 지레 겁을 먹고 발걸음을 돌린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스크리브너 공식 포럼이 활성화되어 있지만, 영어로만 소통이 이루어지는 탓에 한글 사용자가 접근하기는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전에 스크리브너 사용하기 위해 몇차례 시도해보다가 발걸음을 돌린 경험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학, 금융, 여행, 동영상 편집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들에게 실전적인 지식을 소개하고 있는 저 유명한 길벗출판사의 '무따기 (무작정 따라하기)' 시리즈의 신간으로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실제로 소식을 듣고 필자는 이북 버젼을 구매하였고, 오프라인 서점에서 종이책 버젼도 추가로 구매하였다.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는 국내 최초의 스크리브너 가이드북으로 그동안 스크리브너에 호기심을 가지고 써보고 싶었지만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던 많은 작가들에게 단비와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는 국내 사용환경에 맞는 윈도우 버전으로 소개하고 있다. 애플 환경에 익숙한 작가라 할지라도 윈도우 사용자 수가 절대적인 국내 환경에서, 맥 유저가 공유나 협업을 하긴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아이폰과 아이패드, 맥북을 쓰고 있는 소위 말하는 '앱등이'지만, 공유나 협업 문제로 윈도우용 PC를 별도로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결국 윈도우 환경에 맞는 글쓰기 프로그램을 쓰고 있다고 알고 있다.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는 입문자도 따라할 수 있는 쉽고 자세한 설명으로 독자들이 스크리브너 기능을 마스터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글이 완성되는 작업과정에 맞춰 기능을 소개하고 있어서 스크리브너의 일부 기능에는 익숙하나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은 작가들이 필요한 기능만 골라 익힐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 최은광 작가는 독자들이 글의 종류와 작업의 방식에 따라 필요한 기능을 바로바로 찾을 수 있도록 했고, 목차 구성대로 학습을 하면서도 흥미로운 개념이나 기능을 즉시 찾아볼 수 있도록 책을 구성하였다.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는 5개의 Chapter로 구성되어 있고, 처음에는 프로그램의 설치와 주요 기능을 설명하여 독자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이어서 아이디어 구상, 글의 구성, 완성 후 출력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글쓰기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의 흐름에 맞추어 목차를 구성하여, 독자들이 쉽게 따라하면서 자연스럽게 한 편의 글이 완성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Chapter 1 시작하기 전에'에서는 스크리브너란 어떤 프로그램이고, 대표적인 기능은 어떤게 있으며, 프로그램 설치와 사용환경은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Chapter 2 기초 기능 익히기'에서는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외관과 기본 메뉴의 구성에 대해 설명하고 문서작성과 편집은 어떻게 하고 글의 조직과 구성, 발행은 어떻게 하는지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Chapter 3 집필의 시작 - 아이디어 정리하기'에서는 아이디어 구상을 거친 후 수집한 자료를 어떻게 정리하고 반영해야 하는지, 개요 작성을 위한 시놉시스 작성방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Chapter 4 집필의 전개 - 체계화하기'에서는 글을 세부적으로 분류하고 전체적인 글의 얼개와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Chapter 5 집필의 마감 - 다음어서 출판하기'에서는 퇴고와 글을 마무리하고 출판을 위한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또한 책에서 언급한 기능들에 대해 작가가 실습 예제, 영상 강의, 심화 학습 자료 등을 제공함으로서 독자들이 실제로 사용해보면서 익힐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실습 예제는 난이도를 고려하여 구성되어 있어서 가장 쉬운 기능부터 차근차근 익히면서도 자연스럽게 심화학습까지 가능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또한, 스크리브너가 보유하고 있는 기능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책에 담지 못한 내용을 추가로 다루기 위해서 작가가 직접 개설한 스크리브너 전용 블로그를 통해 추가적인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블로그에는 동영상 강의도 제공하고 있고, 스크리브너 최신 업데이트 내용과 한글 패치도 직접 작업하여 제공하고 있다. (블로그 :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 -- 최은광 (길벗, 2023) | 독자 지원 블로그 (eunkwangchoi.com) 특히 50개가 넘는 저자 영상 강의가 무료로 제공되어 있어 헷갈리는 부분을 바로바로 해결할 수 있고, 추후에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단축키 모음, 심화 학습 등 독학에 필요한 자료는 물론, 웹소설 집필용 템플릿까지 제공되어 실제 작업에도 활용할 수 있다. 템플릿은 웹소설 작가 커뮤니티에서 공유되어 온 여러 도구와 작가가 직접 제작한 도구를 결합해서 스크리브너 전용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단순히 양식만 모아둔 것이 아니라 스크리브너의 고유 기능을 구석구석 적용한 작가의 노하우와 꿀팁이 녹아있다.




책의 서두에서 최은광 작가도 언급하고 있지만 '스크리브너(Scrivener)'의 사전적 의미는 '필경사 (筆耕士, scribe)'이다. 필경사는 저 유명한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 등장하는 바로 그 필경사로 '손글씨로 글을 적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또는 전문가'을 의미한다. 타자기가 등장하기 전에는 필경사가 일일이 손 글씨로 작업을 해야 했다. 타자기가 제공하는 수작업이 필요 없는 손쉬운 입출력 기능은 그 자체로 혁명이었고, 당시 개발자들이 목표로 삼았던 것은 두 가지 였다. 바로 '간편한 입력'과 '깨끗한 출력'이었다. 그 이외의 사항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저 두 가지만으로도 세상이 뒤집힐 만한 혁신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PC가 보급되고 타자기의 기능이 워드프로세서로 이식된지 오래되었지만 글쓰기 프로그램은 큰 발전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현대의 작가들에게는 어떤 글쓰기 프로그램이 필요할까? 수많은 글쓰기 프로그램이 저마다의 장점을 어필하고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작가에게 필요한 글쓰기 프로그램은 글을 작성하고 보관하며 재구성하는 기능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크리브너는 단순한 입력과 출력에 그치지 않고 글쓰기의 작업흐름에 따라 아이디어를 수집, 정리, 배치하고 구조화하는 프로그램이다. 감히 말하건대 스크리브너는 디지털 시대의 '필경사'라 생각한다. 아직 스크리브너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는 초보 유저에 불과하지만, 스크리브너의 탄생 배경도 그렇고 하나 하나 기능들을 익혀가면서 이런 나의 생각은 더 굳어져 가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필경사를 마스터하는 그 날까지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와 함께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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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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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찰리 채플린은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남겼다이는 일견 행복으로 충만해 보이는 삶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고통삶에 대한 ‘비의(悲意)’가 내포되어 있다는 삶의 내밀한 속성을 잘 포착해낸 체험적 진리라고 생각한다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제임스 설터도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했다이는 저마다의 방향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잎맥처럼 삶은 다면적이고 정답을 찾기 힘든 것이지만삶에 대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멀리서 숲을 조망하기 보다는 숲 안으로 깊숙이 침잠하여 나뭇잎의 형태와 주위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그 미세한 변화들에 주목해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에는 비록 가난하지만 친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다복한 가정과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노부부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대비되는 두 가정이 등장한다. 멀리서 보면 이 가운데 행복해 보이는 가정을 누구나 쉽게 평가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 설터의 말처럼 삶은 변화무쌍하고 다면적인 것이며,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해서는 숲 안으로 침잠하여 그 미세한 감정의 떨림들을 느끼고 경험해봐야 한다. 클레어 키건은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마다 적확한 단어를 사용하여 분위기를 선명하게 전달하지만 복잡미묘한 삶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라는 번역자의 소설에 대한 평가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약간 어려운 단어 때문에 쩔쩔맸지만 킨셀라 아저씨가 단어를 하나하나 손톱으로 짚으면서 내가 짐작해서 맞추거나 비슷하게 맞출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출발하는 것이 느껴지고, 전에는 갈수 없었던 곳들까지 자유롭게 가게 되었다가 나중엔 정말 쉬워진 것처럼." (p. 83)

 

 

<맡겨진 소녀>는 혈육관계로 묶인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일면식도 없는 먼 친척집에 맡겨지는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탕아', '골칫덩이'라는 말을 자식에게 서슴치 않는 부모에게 소녀는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우연한 계기로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 소녀는 자신 보다 먼저 소녀의 신을 신겨주고, 소녀의 걸음에 맞춰 보폭을 줄이는 다정하고 세심한 돌봄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킨셀라 아저씨와 손을 잡은 순간 소녀는 그동안 아빠가 내 손을 한번도 잡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당혹스러운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라리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소녀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혼란스러워한다. 때로는 순수한 의도의 사랑과 다정함 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이에게는 슬픔과 아픔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소녀는 깨닫는다. 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후 소녀는 집에서의 삶과 새로운 곳에서의 삶의 차이를 서서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그 여름 그 곳에서 소녀는 인생 처음으로 짧지만 빛나는 나날들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하지만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삶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서로가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누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오늘밤 너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만 에드나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에드나는. 남한테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p. 72)

 

 

삶은 상실과 결핍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다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상처 받은 인간은 소설 속 킨셀라 부인처럼 악의 없는 실수를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불완전함이야말로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채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매듭이 되는 것 아닐까신뢰와 사랑자발적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구축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은 불완전한 현실을 일정 부분 해소시켜주는 심연의 해독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어주고삶을 살아가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는 것은 일견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인 행위처럼 보이는 사랑우정신뢰와 같은 가치들이다서로를 향해 뻗는 온기 어린 손짓이 결국 메마른 삶에 활기가 되어 내일을 밝히는 희망이 된다.

 

 

소설을 읽으며 삶의 내밀한 영역까지 뜯어보면 인생이란 희극과 비극강자와 약자피해자와 피의자가 뒤섞인 영화와 같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어쩌면 산다는 것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리는 빗속에서도 춤추는 일에 가까운 것이지 않을까? 삶이란 두려움 속에서도 짓눌리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내면서 지속되는 것이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쌓여진 사소하고 다정한 것들이 모여 지리멸렬한 생을 흘러가게 하는 위대한 힘이 생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다정하고 세심한 것들은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처음에는 아프게 다가올 수 있지만, 결국 그 진심이 담긴 호의가 마음을 움직이고, 삶을 비추고, 온기를 불어넣게 될 것이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p. 98)

 

 

가정은 정형화할 수 없는 것이기에 형태와 구성은 제각각이지만 하나의 가정은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이룬다. 가족은 더 이상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지는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구성원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맡겨진 소녀>는 내게 원자화된 개인이 새로운 형태의 분자 가족을 형성하는 것이 가족의 새로운 정의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가족의 틀을 파기하고, 친족 관계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가족은 아니지만, 혈연으로 얽힌 관계보다 정서적 동질감이 빚어낸 마음의 끈이 더 끈끈할 수 있다는 것, 진정한 가족은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맡겨진 소녀>는 가족이 성립되려면 적극적으로 상대방과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 또한 가부장 제도의 안전망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것을 극복할 경우 행복이라는 화학반응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개가 됐구나. 저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p. 75)

 

 

소녀가 킨셀라 아저씨와 산책을 할 때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두 개의 불빛은 어느 순간 그 사이 어딘가에서 또 다른 불빛이 고개를 내밀며 찬란하게 빛나는 세 개의 불빛이 된다. 이는 킨셀라 부부와 소녀가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하였음을 상징한다. 엄마소의 우유 대신 인간이 만든 이유식을 먹으며 성장하는 송아지들처럼 겁에 질린 어린 암소는 우연한 계기로 맺어진 인연을 통해 삶을 개척해나갈 힘을 얻는다. 굴곡진 삶을 견뎌내야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묵묵히 지켜봐 주고 지지해 줄 가족의 따뜻한 관심과 조언 아닐까? 세월의 일렁임을 힘겹게 견뎌내야 할 때 내가 살아 있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 가족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이것 이상의 응원이 있을까? 각자가 가진 삶의 조각들이 가족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완전한 조각으로 완성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행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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