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평점 :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찰리 채플린은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일견 행복으로 충만해 보이는 삶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고통, 삶에 대한 ‘비의(悲意)’가 내포되어 있다는 삶의 내밀한 속성을 잘 포착해낸 체험적 진리라고 생각한다.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제임스 설터도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 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했다. 이는 저마다의 방향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잎맥처럼 삶은 다면적이고 정답을 찾기 힘든 것이지만, 삶에 대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멀리서 숲을 조망하기 보다는 숲 안으로 깊숙이 침잠하여 나뭇잎의 형태와 주위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그 미세한 변화들에 주목해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에는 비록 가난하지만 친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다복한 가정과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노부부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대비되는 두 가정이 등장한다. 멀리서 보면 이 가운데 행복해 보이는 가정을 누구나 쉽게 평가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 설터의 말처럼 삶은 변화무쌍하고 다면적인 것이며,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해서는 숲 안으로 침잠하여 그 미세한 감정의 떨림들을 느끼고 경험해봐야 한다. 클레어 키건은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마다 적확한 단어를 사용하여 분위기를 선명하게 전달하지만 복잡미묘한 삶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라는 번역자의 소설에 대한 평가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약간 어려운 단어 때문에 쩔쩔맸지만 킨셀라 아저씨가 단어를 하나하나 손톱으로 짚으면서 내가 짐작해서 맞추거나 비슷하게 맞출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출발하는 것이 느껴지고, 전에는 갈수 없었던 곳들까지 자유롭게 가게 되었다가 나중엔 정말 쉬워진 것처럼." (p. 83)
<맡겨진 소녀>는 혈육관계로 묶인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일면식도 없는 먼 친척집에 맡겨지는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탕아', '골칫덩이'라는 말을 자식에게 서슴치 않는 부모에게 소녀는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우연한 계기로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 소녀는 자신 보다 먼저 소녀의 신을 신겨주고, 소녀의 걸음에 맞춰 보폭을 줄이는 다정하고 세심한 돌봄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킨셀라 아저씨와 손을 잡은 순간 소녀는 그동안 아빠가 내 손을 한번도 잡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당혹스러운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라리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소녀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혼란스러워한다. 때로는 순수한 의도의 사랑과 다정함 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이에게는 슬픔과 아픔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소녀는 깨닫는다. 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후 소녀는 집에서의 삶과 새로운 곳에서의 삶의 차이를 서서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그 여름 그 곳에서 소녀는 인생 처음으로 짧지만 빛나는 나날들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 하지만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삶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 서로가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누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오늘밤 너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만 에드나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에드나는. 남한테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p. 72)
삶은 상실과 결핍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상처 받은 인간은 소설 속 킨셀라 부인처럼 악의 없는 실수를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불완전함이야말로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채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매듭이 되는 것 아닐까? 신뢰와 사랑, 자발적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구축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은 불완전한 현실을 일정 부분 해소시켜주는 심연의 해독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어주고, 삶을 살아가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는 것은 일견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인 행위처럼 보이는 사랑, 우정, 신뢰와 같은 가치들이다. 서로를 향해 뻗는 온기 어린 손짓이 결국 메마른 삶에 활기가 되어 내일을 밝히는 희망이 된다.
소설을 읽으며 삶의 내밀한 영역까지 뜯어보면 인생이란 희극과 비극, 강자와 약자, 피해자와 피의자가 뒤섞인 영화와 같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리는 빗속에서도 춤추는 일에 가까운 것이지 않을까? 삶이란 두려움 속에서도 짓눌리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내면서 지속되는 것이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쌓여진 사소하고 다정한 것들이 모여 지리멸렬한 생을 흘러가게 하는 위대한 힘이 생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다정하고 세심한 것들은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처음에는 아프게 다가올 수 있지만, 결국 그 진심이 담긴 호의가 마음을 움직이고, 삶을 비추고, 온기를 불어넣게 될 것이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p. 98)
가정은 정형화할 수 없는 것이기에 형태와 구성은 제각각이지만 하나의 가정은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이룬다. 가족은 더 이상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지는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구성원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맡겨진 소녀>는 내게 원자화된 개인이 새로운 형태의 분자 가족을 형성하는 것이 가족의 새로운 정의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가족의 틀을 파기하고, 친족 관계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가족은 아니지만, 혈연으로 얽힌 관계보다 정서적 동질감이 빚어낸 마음의 끈이 더 끈끈할 수 있다는 것, 진정한 가족은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맡겨진 소녀>는 가족이 성립되려면 적극적으로 상대방과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 또한 가부장 제도의 안전망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것을 극복할 경우 행복이라는 화학반응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개가 됐구나. 저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p. 75)
소녀가 킨셀라 아저씨와 산책을 할 때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두 개의 불빛은 어느 순간 그 사이 어딘가에서 또 다른 불빛이 고개를 내밀며 찬란하게 빛나는 세 개의 불빛이 된다. 이는 킨셀라 부부와 소녀가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하였음을 상징한다. 엄마소의 우유 대신 인간이 만든 이유식을 먹으며 성장하는 송아지들처럼 겁에 질린 어린 암소는 우연한 계기로 맺어진 인연을 통해 삶을 개척해나갈 힘을 얻는다. 굴곡진 삶을 견뎌내야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묵묵히 지켜봐 주고 지지해 줄 가족의 따뜻한 관심과 조언 아닐까? 세월의 일렁임을 힘겹게 견뎌내야 할 때 내가 살아 있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즉, 가족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이것 이상의 응원이 있을까? 각자가 가진 삶의 조각들이 가족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완전한 조각으로 완성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행복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