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야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연구총서
황영치 지음, 한정선 옮김 / 보고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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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였던 통치체들은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을 계기로 국민국가 (Nation-state) 체제로 재편되었다. 사회학자 찰스 틸리는 국민국가 확산의 핵심 원인을 전쟁에서 찾는다. 전쟁을 준비 또는 회피하기 위해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투입할 수 있는 체제가 바로 국민국가라는 것이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전쟁을 일으키는 반복 속에서 국민국가의 위상은 강화되었고, 대부분의 인간은 태어나면서 국가에 소속된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국민국가에는 태생적으로 폭력성과 강제성이 내재되어 있다. 국가의 경계가 바뀔 때마다 주변부의 인간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가의 틀 안으로 끌려들어가거나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 과정에서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 디아스포라 (Diaspora)다. 디아스포라는 전쟁, 식민지배, 노예무역 등 외적인 이유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으로 정의할 수 있다. '전야 (前夜)'에 등장하는 세명의 주인공 '윤봉창', '나순자', '도모다 히로키'는 각각 한국, 조선, 일본이라는 서로 다른 국적
을 가진 자이니치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 또는 조선인)이자 디아스포라다. 동
일한 민족적 혈통을 지닌 이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삶의 기반도 일본에 있지만 서로 다른 국적과 모어(母語)를 가지며, 각자가 선택할 수 없는, 이미 주어진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삶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헤이트 스피치가 혐한시위와 동의어가 될 정도로 자신들을 향한 차별과 증오가 가속화되고 있는 일본사회의 현실은 디아스포라의 고단한 삶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말... 말이라서 더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는 거지.,. 누군가를 때리면 때린 사
람 손도 아프잖아. 폭언은 기껏해야 말하는 사람의 목이 쉬는 정도지. 하지만 들은 사람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로 마음에 남아. 말을 주고 받는 건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 '죽어! 죽여!'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기가 막혀서 그냥
침묵해버려." (137쪽)
 


"쉽고 단순한 말. 그래서 더 잔혹한 상처를 입혀. 피해자는 그 자리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어. 조선인을 미워하고, 폄하하고, 굴욕을 주고, 멸시하고, 살인을 예고하는 말. '불령선인'이라는 식민지 시대의 말이 되살아나서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어. 인간이 인간한테 '너는 인간이 아니야'라는 말을 해서 칼로 찌르는거야. 그러니까 우리 자이니치들은 깊은 침묵의 굴 속으로 들어가는 거지.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삼촌, 이모 그리고 우리들고 아이들. 지금까지 계속 '너희
들을 죽이겠다'는 말을 들어왔으니까" (137쪽)
 


하지만 자신들이 직면한 현실에 대응하고 자신의 삶을 지켜나가기 위해 그들 각
자가 내리는 결정은 다르다. 
 


'윤봉창'은 대학원생이지만 주로 집에서 생활하는,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
는 청년 무직자다. 그는 현실의 재특회 (재일 한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를 연상시키는 소설 속의 ZT그룹의 활동에 분노한다. 그들은 차별을 통해서 인간을, 지역사회를 파괴하고 있다는 자각 조차 없고, 논리나 이론, 역사적 사실이 아닌 민족 감정을 자극시켜 보수계 넷유저의 지지를 모았고, 더 나아가 현실에서의 단결과 연대행동까지 이끌어냈다. 따라서 그는 ZT그룹의 수장이자 상징인 기쿠하나 모리노부를 타격하고자 한다. 
 


"기쿠하나는 알고 있어. 정권과 경찰이 ZT그룹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재일특권이 선동적인 유언비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유포하지. 유언비어로 증오를 불타오르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정권과 지자체가 솔선해서 조선학교를 차별하고 제재하고 있으니까 기쿠하나는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행동을 해도 안전해. 그놈은 유일무이한 카리스마야. 그래서 놈의 안전을 위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144쪽) 
 


'나순자'는 봉창의 대학원 동기이자 그의 연인이다. 그녀가 조선학교에 다닐때
일본인에게 당한 테러는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 시절 조선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은 민족의상인 치마저고리 교복을 입었는데, 이를 조선의 상징으로 여겨 제재하고 정복할 대상으로 삼은 일부 식민지주의 사관에 빠진 우익들의 폭행과 협박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따라서, 민족의상 교복은 '민족성의 고수'와 '민족교육의 일환'으로서 차별에 굴복해서는 안된다는 교사들의 주장과 '여성의 억압과 차별의 상징'이라는 학부모들의 주장이 대립하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엄마와 선생님들이 슬프고 괴로운 언쟁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결국 현실적인 절충안이 탄생하였다. 재킷, 블라우스, 스커트를 제2교복으로 정하여 등교는 제2교복으로도 가능하지만 학교에 와서는 제1교복인 치마저고리를 입는 것이었다. 애초에 치마저고리 교복으로 등교할 수 없는 건 이 사회의 차별과 박해 때문이라고 생각 하지만,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적 상황을 무시할 수 없어 만들어진 본심과 명분, 이념과 실리가 뒤섞인 서글픈 타협안이었다. 하지만 차별과 폭력 때문에 치마저고리를 벗어야 한다는 것이 싫었던 순자는 등교시에도 치마저고리를 고수했고,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20대 일본인 남자 두 명에게 테러를 당하게 된다. 테러를 목격하고도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없는 주변의 시선에 공포를 느끼며,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아 미아가 된 것 같은 고독감에 떨고 있을 때 도착한 엄마는 지금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통학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며,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며 오히려 순자를 책망한다. 
 


"역무원한테 말을 할까도 생각했는데, 하지 않았어. 전철 안에서 저고리 소매가 갈기갈기 잘린 모습을 아무도 못 봤을 리가 없잖아. 적어도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 남자, 여자, 회사원, 학생, 모두가 그걸 봤을 거라고. 그런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거야? 잘못을 한 건 우리를 칼로 베려고 달려든 놈들이고,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일본인들, 그리고 이 사회의 박해와 차별이잖아. 치마저고리 교복을 입든 안 입든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잖아! 피해자가 주눅이 들어서 굽신거리고 비굴해져야 하다니!" (77쪽)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라서 유일한 아이덴티티 같은 건 환상이야. 나는 조선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것만이 나의 전부는 아니거든. 그런데 그렇게 단순화시키는 것이 차별과 헤이트 스피치의 테크닉. 너무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무섭다." (143쪽)
 


순자는 불황이 장기화되고 일본사회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자신들이 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일부 일본인의 불안감이 증오의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그 불안감이 국가와 민족성을 자극하여 일본인이라는 단일 아이덴티티를 발현하게 하고, 자이니치와 코리아타운을 적으로 삼아 원시적인 폭력 본능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폭력은 오염되고 날조된 정보로 인해 그들만의 정의와 신념으로 세탁된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토대로 순자는 차별에 폭력적으로 맞서기 보다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서명운동 등의 온건 노선을 택한다.
 


'도모다 히로키'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참고인 조사를 받다가 우연히 한국 호적부를 보게 되고, 자신의 핏줄에 대해 알게 된다. 자신이 태어나기 직전까지 아버지와 엄마, 형은 한국 호적에 올라 있는 한국인이었고, 이후 가족이 귀화를 선택하게 되면서 그의 가족은 한국의 성 '황 (黃)'에서 '도모다 (共田)'라는 성을
가진 일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대다수의 평범하게 태어난 사람들처럼 히로키는
살아오면서 국적과 민족에 대해 의식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고, 일말의 의심도 없이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 사실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조선과 한국을 얕보는 것 같은 일본 사회 분위기를 느껴왔던 그는 자신의 뿌리가 조선이고,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것,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불안하고 불쾌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일본인이고 조선인이 아닌 근거를 인터넷에서 찾게 된다. 그가 지금껏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던 넷우익들에 의해 날조된 조선인과 자이니치의 악행과 유언비어를 인터넷에서 접하며, 조선과 조선인을 부정하게 된다.
 


"틀림없는 일본인인 내가, 일본인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조선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점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인의 특징이라는 난폭함과 폭력의 화신 같은 아버지를..." (43쪽)


 
"저는 계속 일본인으로 살아왔고, 일본어밖에 할 줄 모르고, 일본에서밖에 살 수 없는 일본인이예요. 그러니까 일본과 일본인을 위해서 활동하는 ZT그룹에 참가한 거예요. 일본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일본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기 위해서요." (158쪽)
 


이처럼 디아스포라들은 삶의 형태는 다르지만 어떠한 역사와 구조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분열되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항상 막연한 불안과 긴장을 강요당한다는 공통분모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디아스포라적 삶의 궤적이란 자신의 아이덴티티로부터 일방적인 추방과 부정, 정체성 분열과정을 거치며 빚어진 수세대에 걸친 삶의 일그러짐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왜 여기에 있는가?'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관통
하는 질문이다.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의 의미는 국민국가의 틀 안의 사람들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기반이 있으며,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조국이자 고국이며 모국인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국 (선조의 출신국), 고국 (자기가 태어난 나라), 모국 (현재 국민으로 속해있는 나라)의 삼자
분열로 국민국가를 넘어선 저 어딘가에서 자신의 근원을 찾아야 하는 디아스포라에게 국민의 의미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이상적인 모국은 모든 형태의 부조리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디아스포라들이 언어도, 문화도, 국민으로서의 체감도 없는 모국의 국민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다. 이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운명에 저항하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실존에 관한 것으로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속한 문화를 거슬러 자기 내부의 역사를 발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구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마지막 장면에서 3명의 자이니치 디아스포라의 만남을 통해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책에는 저자의 약력이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1950년대 일본 기후현에서 태어나 디아스포라적 시선이 담긴 이 책을 일본어로 저술한 것만 보아도 저자의 삶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국가, 인종, 문화를 둘러싼 차별에 대응하며 디아스포라적 시선을 삶에서 체화했을 것이다. 디아스포라적 시선이란 다수자들이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 불편한 진실에 대한 소수자들의 대응을 의미한다. 디아스포라들은 주변인으로서 갖는 이중, 삼중의 마이너리티적 속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경험과 기억, 욕망을 갖는다. 저자는 작가후기에서 커트 보네거트의 '탄광의 카나리아 이론'을 언급하고 있다. 카나리아는 공기 변화에 민감하여 극소량의 유독가스에도 정신을 잃고 목숨을 잃기 때문에 광부들은 탄광에 들어갈 때 카나리아를 앞세워 치명적 상황에 이르기 전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네거트가 이를 빗대어 예술가를 탄광 속 카나리아와 같은 존재라고 말한 것이 '탄광의 카나리아 이론'의 의미다. 저자는 우리들 (자이니치, 디아스포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사회의 숨 막히는 공기를 느끼며, 번민하고 고통받으며 비통한 비명을 질러 왔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살리고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저자는 카나리아가 되어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었다. 
 


"우리가 중대한 일에 대해 침묵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종말을 고하기 시작합니다. 결국에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적들의 말이 아닌 친구의 침묵이 될 것입니다." - 마틴 루터 킹 - 

 


작가는 '전야 (前夜)'라는 소설의 제목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뭔가가 바뀔 것
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인가?
 


헤이트 활동에 대항하여 현장에서 일본 현지인들이 항의의 목소리를 내는 카운터 운동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6년 6월에는 '일본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 해소를 위한 대처법' (통칭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금지 규정도 없고 벌칙 또한 없는 이념법이라 실효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외국 국적의 주민과 외국인의 인권에 관한 대한 최초의 법률이 탄생한 것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명분뿐이라고 할지라도 국회 차원에서 차별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분명히 세상은 진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희망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전야를 준비한다면 세상은 변할 수 있다.
 


에르네스트 르낭은 민족이란 공동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이미 희생하였거나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인간들로 구성된 거대한 결속이라고 하였다. 또한 르낭은 민족 창출의 근본적 요소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주장한다.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망각과 용서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민족은 기억이 아닌 망각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형식에 대한 가능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함께 하는 삶을 위한 자발적 희생과 기억을 이겨낸 용서는 차별을 넘어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위로하고 인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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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년 :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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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내에서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하나의 민족, 두 개의 한국, 이 민족적 비극의 기원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스러 운 기억과 그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민족적 비극의 근원인 동시에 올바른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한 통일 민주국가 수립 이라는 민족사적 과제 달성의 단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35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 시기가 현재 우리사회의 지형을 형성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35년은 투쟁과 부역의 역사다. 저자 박시백은 청산되지 않은 뼈아픈 시 기의 명(明)과 암(暗)을 동시에 조명함으로서 역사의 재정립을 시도한다. 우리는 고통스럽고 핍박 받는 현실 속에서도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응답했던 사람 들, 그들의 정신, 투쟁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이들이다. 그들은 일제에 협력하여 부귀영화 를 누리고 집안을 일으켰으며, 해방 후에도 단죄되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다. 진정한 역사 바로잡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한다고 생각 한다. 



<35년>을 읽으면서 내가 새롭게 알게 된 명(明)으로는 김알렉산드라를 꼽을 수 있 겠다. 볼셰비키 간부이기 이전에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조선인이었던 그녀는 죽 음 앞에서도 당당했다. 우리는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내디딘 열세 걸음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암(暗)은 장지연이었다. 시일야 방성대곡으로 어두웠던 시기 민족의 한줄기 빛이었던 그의 친일 행적은 나를 혼란 스럽게 했다.



<35년>은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민족의 어두웠던 시절을 조 망한다. 놀라웠던 건 만화로 쓰여진 대중서라는 한계를 넘어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정리해냈다는 점이었다. 비록 1차 사료를 직접 연구한 결과물은 아니지만 독립선언 서와 대한민국 임시헌장 등의 역사적 사료를 따로 지면을 할애하여 배치하고, 박은 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같은 중요 저작물 등을 인용한 것은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3권까지 읽으면서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부분은 3·1 만세운동의 준 비와 전개를 서술한 2권이었다. 저자는 “3·1 만세운동의 진정한 주역들은 어쩌면 현장의 지도자들로, 이름 없는 수많은 유관순들이라 말한다.”(2권 127쪽)



“내 손톱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2권 113쪽)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해 순국한 유관순 열사가 남긴 말이다. 저 자의 말처럼 3·1 만세운동의 진정한 주역은 어쩌면 민족과 국가를 위한 진심을 보 이고 사라져간 민중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유관순들이었다. 이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위대한 힘의 존재기반은 민중에게 있으며, 이는 핍박과 분열, 갈 등이 빚어낸 시대의 소음 속에서 일순간에 타오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1 운동 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바로 윌리엄 터너의 명 화 <전함 테메레르>다.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flagship) 빅토리호를 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 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 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그림 속에서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트라팔가 해전 승리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의 중앙에는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기함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 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1838년 영국 해군은 테메레르호를 런던의 운수업자 에게 팔아넘겼고 배를 산 운수업자는 배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템즈 강가로 산책 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 르도 있었다고… 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 나의 영웅이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그를 오 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중들, 수많은 유관순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 록하고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들의 몫도 있을까? 우리는 윌리 엄 터너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들을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정신 과 투쟁, 숭고한 희생은 <전함 테메레르>가 되기 충분하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우 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이름 없는 수많 은 '독립운동가'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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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피아노 스코어 EASY (스프링)
박상현 지음 / 음악세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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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노래를 피아노 편곡만으로 구성한 연주곡집은 정말 보기 드문 사례인듯 합니다. 비틀즈의 명곡 30곡을 엄선하였다는 점과, QR 코드를 통해 모범연주를 볼수 있다는 점은 정말 큰 장점인것 같습니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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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마감하느라 안 들렸어 작가특보
도대체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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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달리고 있습니다. 아마 모두가 그럴걸요?‘라는 작가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그리고 쓰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진솔한 자기고백과 ‘작가‘라는 길을 먼저 걸어본 사람으로서 건네는 다정한 조언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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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 작가특보
곽재식 지음 / 북스피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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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어찌됐든 써야 한다. 한 단어 한 단어를 고치고 또 고쳐서 다들 기절할만한 글을 완성하겠다는 생각, 완벽한 글을 싣자마자 다들 유명인사로 대접하며 추앙할 거라는 상상을 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뜻대로 안 될 때 나는 재능이 없고,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글을 쓴다고 좌절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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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리바바 2019-11-25 0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뭔가를 쓰고는 싶은데 쓰고나서보면 참 허접해서... 그래서 뭔가 끄적이고싶을땐 필사북을 끄적입니다... 재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게 아닌가봐요.

잭와일드 2019-11-25 12:41   좋아요 1 | URL
뭔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