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오년 :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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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내에서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하나의 민족, 두 개의 한국, 이 민족적 비극의 기원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스러 운 기억과 그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민족적 비극의 근원인 동시에 올바른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한 통일 민주국가 수립 이라는 민족사적 과제 달성의 단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35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 시기가 현재 우리사회의 지형을 형성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35년은 투쟁과 부역의 역사다. 저자 박시백은 청산되지 않은 뼈아픈 시 기의 명(明)과 암(暗)을 동시에 조명함으로서 역사의 재정립을 시도한다. 우리는 고통스럽고 핍박 받는 현실 속에서도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응답했던 사람 들, 그들의 정신, 투쟁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이들이다. 그들은 일제에 협력하여 부귀영화 를 누리고 집안을 일으켰으며, 해방 후에도 단죄되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다. 진정한 역사 바로잡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한다고 생각 한다. 



<35년>을 읽으면서 내가 새롭게 알게 된 명(明)으로는 김알렉산드라를 꼽을 수 있 겠다. 볼셰비키 간부이기 이전에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조선인이었던 그녀는 죽 음 앞에서도 당당했다. 우리는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내디딘 열세 걸음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암(暗)은 장지연이었다. 시일야 방성대곡으로 어두웠던 시기 민족의 한줄기 빛이었던 그의 친일 행적은 나를 혼란 스럽게 했다.



<35년>은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민족의 어두웠던 시절을 조 망한다. 놀라웠던 건 만화로 쓰여진 대중서라는 한계를 넘어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정리해냈다는 점이었다. 비록 1차 사료를 직접 연구한 결과물은 아니지만 독립선언 서와 대한민국 임시헌장 등의 역사적 사료를 따로 지면을 할애하여 배치하고, 박은 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같은 중요 저작물 등을 인용한 것은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3권까지 읽으면서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부분은 3·1 만세운동의 준 비와 전개를 서술한 2권이었다. 저자는 “3·1 만세운동의 진정한 주역들은 어쩌면 현장의 지도자들로, 이름 없는 수많은 유관순들이라 말한다.”(2권 127쪽)



“내 손톱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2권 113쪽)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해 순국한 유관순 열사가 남긴 말이다. 저 자의 말처럼 3·1 만세운동의 진정한 주역은 어쩌면 민족과 국가를 위한 진심을 보 이고 사라져간 민중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유관순들이었다. 이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위대한 힘의 존재기반은 민중에게 있으며, 이는 핍박과 분열, 갈 등이 빚어낸 시대의 소음 속에서 일순간에 타오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1 운동 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바로 윌리엄 터너의 명 화 <전함 테메레르>다.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flagship) 빅토리호를 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 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 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그림 속에서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트라팔가 해전 승리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의 중앙에는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기함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 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1838년 영국 해군은 테메레르호를 런던의 운수업자 에게 팔아넘겼고 배를 산 운수업자는 배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템즈 강가로 산책 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 르도 있었다고… 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 나의 영웅이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그를 오 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중들, 수많은 유관순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 록하고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들의 몫도 있을까? 우리는 윌리 엄 터너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들을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정신 과 투쟁, 숭고한 희생은 <전함 테메레르>가 되기 충분하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우 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이름 없는 수많 은 '독립운동가'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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