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야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연구총서
황영치 지음, 한정선 옮김 / 보고사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대 이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였던 통치체들은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을 계기로 국민국가 (Nation-state) 체제로 재편되었다. 사회학자 찰스 틸리는 국민국가 확산의 핵심 원인을 전쟁에서 찾는다. 전쟁을 준비 또는 회피하기 위해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투입할 수 있는 체제가 바로 국민국가라는 것이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전쟁을 일으키는 반복 속에서 국민국가의 위상은 강화되었고, 대부분의 인간은 태어나면서 국가에 소속된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국민국가에는 태생적으로 폭력성과 강제성이 내재되어 있다. 국가의 경계가 바뀔 때마다 주변부의 인간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가의 틀 안으로 끌려들어가거나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 과정에서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 디아스포라 (Diaspora)다. 디아스포라는 전쟁, 식민지배, 노예무역 등 외적인 이유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으로 정의할 수 있다. '전야 (前夜)'에 등장하는 세명의 주인공 '윤봉창', '나순자', '도모다 히로키'는 각각 한국, 조선, 일본이라는 서로 다른 국적
을 가진 자이니치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 또는 조선인)이자 디아스포라다. 동
일한 민족적 혈통을 지닌 이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삶의 기반도 일본에 있지만 서로 다른 국적과 모어(母語)를 가지며, 각자가 선택할 수 없는, 이미 주어진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삶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헤이트 스피치가 혐한시위와 동의어가 될 정도로 자신들을 향한 차별과 증오가 가속화되고 있는 일본사회의 현실은 디아스포라의 고단한 삶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말... 말이라서 더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는 거지.,. 누군가를 때리면 때린 사
람 손도 아프잖아. 폭언은 기껏해야 말하는 사람의 목이 쉬는 정도지. 하지만 들은 사람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로 마음에 남아. 말을 주고 받는 건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 '죽어! 죽여!'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기가 막혀서 그냥
침묵해버려." (137쪽)
 


"쉽고 단순한 말. 그래서 더 잔혹한 상처를 입혀. 피해자는 그 자리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어. 조선인을 미워하고, 폄하하고, 굴욕을 주고, 멸시하고, 살인을 예고하는 말. '불령선인'이라는 식민지 시대의 말이 되살아나서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어. 인간이 인간한테 '너는 인간이 아니야'라는 말을 해서 칼로 찌르는거야. 그러니까 우리 자이니치들은 깊은 침묵의 굴 속으로 들어가는 거지.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삼촌, 이모 그리고 우리들고 아이들. 지금까지 계속 '너희
들을 죽이겠다'는 말을 들어왔으니까" (137쪽)
 


하지만 자신들이 직면한 현실에 대응하고 자신의 삶을 지켜나가기 위해 그들 각
자가 내리는 결정은 다르다. 
 


'윤봉창'은 대학원생이지만 주로 집에서 생활하는,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
는 청년 무직자다. 그는 현실의 재특회 (재일 한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를 연상시키는 소설 속의 ZT그룹의 활동에 분노한다. 그들은 차별을 통해서 인간을, 지역사회를 파괴하고 있다는 자각 조차 없고, 논리나 이론, 역사적 사실이 아닌 민족 감정을 자극시켜 보수계 넷유저의 지지를 모았고, 더 나아가 현실에서의 단결과 연대행동까지 이끌어냈다. 따라서 그는 ZT그룹의 수장이자 상징인 기쿠하나 모리노부를 타격하고자 한다. 
 


"기쿠하나는 알고 있어. 정권과 경찰이 ZT그룹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재일특권이 선동적인 유언비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유포하지. 유언비어로 증오를 불타오르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정권과 지자체가 솔선해서 조선학교를 차별하고 제재하고 있으니까 기쿠하나는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행동을 해도 안전해. 그놈은 유일무이한 카리스마야. 그래서 놈의 안전을 위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144쪽) 
 


'나순자'는 봉창의 대학원 동기이자 그의 연인이다. 그녀가 조선학교에 다닐때
일본인에게 당한 테러는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 시절 조선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은 민족의상인 치마저고리 교복을 입었는데, 이를 조선의 상징으로 여겨 제재하고 정복할 대상으로 삼은 일부 식민지주의 사관에 빠진 우익들의 폭행과 협박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따라서, 민족의상 교복은 '민족성의 고수'와 '민족교육의 일환'으로서 차별에 굴복해서는 안된다는 교사들의 주장과 '여성의 억압과 차별의 상징'이라는 학부모들의 주장이 대립하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엄마와 선생님들이 슬프고 괴로운 언쟁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결국 현실적인 절충안이 탄생하였다. 재킷, 블라우스, 스커트를 제2교복으로 정하여 등교는 제2교복으로도 가능하지만 학교에 와서는 제1교복인 치마저고리를 입는 것이었다. 애초에 치마저고리 교복으로 등교할 수 없는 건 이 사회의 차별과 박해 때문이라고 생각 하지만,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적 상황을 무시할 수 없어 만들어진 본심과 명분, 이념과 실리가 뒤섞인 서글픈 타협안이었다. 하지만 차별과 폭력 때문에 치마저고리를 벗어야 한다는 것이 싫었던 순자는 등교시에도 치마저고리를 고수했고,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20대 일본인 남자 두 명에게 테러를 당하게 된다. 테러를 목격하고도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없는 주변의 시선에 공포를 느끼며,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아 미아가 된 것 같은 고독감에 떨고 있을 때 도착한 엄마는 지금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통학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며,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며 오히려 순자를 책망한다. 
 


"역무원한테 말을 할까도 생각했는데, 하지 않았어. 전철 안에서 저고리 소매가 갈기갈기 잘린 모습을 아무도 못 봤을 리가 없잖아. 적어도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 남자, 여자, 회사원, 학생, 모두가 그걸 봤을 거라고. 그런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거야? 잘못을 한 건 우리를 칼로 베려고 달려든 놈들이고,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일본인들, 그리고 이 사회의 박해와 차별이잖아. 치마저고리 교복을 입든 안 입든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잖아! 피해자가 주눅이 들어서 굽신거리고 비굴해져야 하다니!" (77쪽)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라서 유일한 아이덴티티 같은 건 환상이야. 나는 조선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것만이 나의 전부는 아니거든. 그런데 그렇게 단순화시키는 것이 차별과 헤이트 스피치의 테크닉. 너무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무섭다." (143쪽)
 


순자는 불황이 장기화되고 일본사회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자신들이 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일부 일본인의 불안감이 증오의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그 불안감이 국가와 민족성을 자극하여 일본인이라는 단일 아이덴티티를 발현하게 하고, 자이니치와 코리아타운을 적으로 삼아 원시적인 폭력 본능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폭력은 오염되고 날조된 정보로 인해 그들만의 정의와 신념으로 세탁된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토대로 순자는 차별에 폭력적으로 맞서기 보다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서명운동 등의 온건 노선을 택한다.
 


'도모다 히로키'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참고인 조사를 받다가 우연히 한국 호적부를 보게 되고, 자신의 핏줄에 대해 알게 된다. 자신이 태어나기 직전까지 아버지와 엄마, 형은 한국 호적에 올라 있는 한국인이었고, 이후 가족이 귀화를 선택하게 되면서 그의 가족은 한국의 성 '황 (黃)'에서 '도모다 (共田)'라는 성을
가진 일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대다수의 평범하게 태어난 사람들처럼 히로키는
살아오면서 국적과 민족에 대해 의식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고, 일말의 의심도 없이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 사실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조선과 한국을 얕보는 것 같은 일본 사회 분위기를 느껴왔던 그는 자신의 뿌리가 조선이고,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것,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불안하고 불쾌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일본인이고 조선인이 아닌 근거를 인터넷에서 찾게 된다. 그가 지금껏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던 넷우익들에 의해 날조된 조선인과 자이니치의 악행과 유언비어를 인터넷에서 접하며, 조선과 조선인을 부정하게 된다.
 


"틀림없는 일본인인 내가, 일본인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조선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점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인의 특징이라는 난폭함과 폭력의 화신 같은 아버지를..." (43쪽)


 
"저는 계속 일본인으로 살아왔고, 일본어밖에 할 줄 모르고, 일본에서밖에 살 수 없는 일본인이예요. 그러니까 일본과 일본인을 위해서 활동하는 ZT그룹에 참가한 거예요. 일본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일본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기 위해서요." (158쪽)
 


이처럼 디아스포라들은 삶의 형태는 다르지만 어떠한 역사와 구조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분열되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항상 막연한 불안과 긴장을 강요당한다는 공통분모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디아스포라적 삶의 궤적이란 자신의 아이덴티티로부터 일방적인 추방과 부정, 정체성 분열과정을 거치며 빚어진 수세대에 걸친 삶의 일그러짐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왜 여기에 있는가?'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관통
하는 질문이다.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의 의미는 국민국가의 틀 안의 사람들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기반이 있으며,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조국이자 고국이며 모국인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국 (선조의 출신국), 고국 (자기가 태어난 나라), 모국 (현재 국민으로 속해있는 나라)의 삼자
분열로 국민국가를 넘어선 저 어딘가에서 자신의 근원을 찾아야 하는 디아스포라에게 국민의 의미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이상적인 모국은 모든 형태의 부조리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디아스포라들이 언어도, 문화도, 국민으로서의 체감도 없는 모국의 국민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다. 이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운명에 저항하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실존에 관한 것으로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속한 문화를 거슬러 자기 내부의 역사를 발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구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마지막 장면에서 3명의 자이니치 디아스포라의 만남을 통해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책에는 저자의 약력이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1950년대 일본 기후현에서 태어나 디아스포라적 시선이 담긴 이 책을 일본어로 저술한 것만 보아도 저자의 삶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국가, 인종, 문화를 둘러싼 차별에 대응하며 디아스포라적 시선을 삶에서 체화했을 것이다. 디아스포라적 시선이란 다수자들이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 불편한 진실에 대한 소수자들의 대응을 의미한다. 디아스포라들은 주변인으로서 갖는 이중, 삼중의 마이너리티적 속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경험과 기억, 욕망을 갖는다. 저자는 작가후기에서 커트 보네거트의 '탄광의 카나리아 이론'을 언급하고 있다. 카나리아는 공기 변화에 민감하여 극소량의 유독가스에도 정신을 잃고 목숨을 잃기 때문에 광부들은 탄광에 들어갈 때 카나리아를 앞세워 치명적 상황에 이르기 전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네거트가 이를 빗대어 예술가를 탄광 속 카나리아와 같은 존재라고 말한 것이 '탄광의 카나리아 이론'의 의미다. 저자는 우리들 (자이니치, 디아스포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사회의 숨 막히는 공기를 느끼며, 번민하고 고통받으며 비통한 비명을 질러 왔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살리고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저자는 카나리아가 되어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었다. 
 


"우리가 중대한 일에 대해 침묵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종말을 고하기 시작합니다. 결국에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적들의 말이 아닌 친구의 침묵이 될 것입니다." - 마틴 루터 킹 - 

 


작가는 '전야 (前夜)'라는 소설의 제목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뭔가가 바뀔 것
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인가?
 


헤이트 활동에 대항하여 현장에서 일본 현지인들이 항의의 목소리를 내는 카운터 운동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6년 6월에는 '일본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 해소를 위한 대처법' (통칭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금지 규정도 없고 벌칙 또한 없는 이념법이라 실효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외국 국적의 주민과 외국인의 인권에 관한 대한 최초의 법률이 탄생한 것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명분뿐이라고 할지라도 국회 차원에서 차별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분명히 세상은 진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희망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전야를 준비한다면 세상은 변할 수 있다.
 


에르네스트 르낭은 민족이란 공동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이미 희생하였거나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인간들로 구성된 거대한 결속이라고 하였다. 또한 르낭은 민족 창출의 근본적 요소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주장한다.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망각과 용서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민족은 기억이 아닌 망각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형식에 대한 가능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함께 하는 삶을 위한 자발적 희생과 기억을 이겨낸 용서는 차별을 넘어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위로하고 인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