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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평점 :
삶, 인간의 일생이란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인간의 일생을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한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온 매 순간순간의 누적 (accumulation of every single moment)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일생은 생명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지난한 시간과 역사를 거치며 개별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고 결국 그 생명을 다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이데거가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이미 죽기에는 충분히 늙어 있다.”고 말한 이유는 인간은 매순간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다 종국에는 모두 소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시작 (출생)이 있고, 끝 (죽음)이 있다는 것?
우리는 삶에 대한 진실의 한 조각이라도 얻기 위해 간절히 매달리지만, 진실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 얹저리에서 표류하며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삶은 인간의 예측 가능한 영역을 벗어나서 자리해 있다. 누구나 절망에 빠져 부정적 파괴욕망을 느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환경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절망 속에서만 머무르진 않는다. 때론 환경에 순응하고 적응하면서, 또 때론 맞서 싸우고 극복하면서 삶을 이어 나간다. 삶을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상실과 결핍, 아픔들은 자연스럽게 삶의 한 부분으로 녹아든다.
"엘리스는 내심 결혼이라는 개념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여겼다. 생각해보라. 그런 식으로 자신을 소멸시키고 모두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니! 계속해서 한 사람으로 살기는 너무 힘겨웠다. 그렇게 쉬운 일이 있다니!" (P.164)
1980년 영국 런던,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엘리스는 기다리던 남자를 만나지 못한 대신 자신 보다 열다섯 살 이상 나이가 많은 코니를 만나 헤어나기 힘든 사랑에 빠져든다. 카페 웨이트리스, 극장 안내원, 모델 일을 하며 지내던 엘리스는 이미 작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한 코니에게 의지하고 그녀에게 보호를 받으며 그녀의 삶 깊숙이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코니와 함께 생활하면 할수록 여성 이전에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앨리스는 점점 빛을 잃어갔다. 코니의 소설 <밀랍심장>이 영화화되면서 앨리스와 코니는 미국에 왔지만 그곳에서 엘리스는 할 일 없이 코니만 바라보는 무료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코니가 매력적인 여배우 바버라를 가까이하면서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앨리스는 코니를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변심한 연인에 대한 복수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상대와 로즈를 낳는다.
“내게 어머니의 상실이란 느낄 수는 있지만 다른 종류의 고통이었다. 내가 느낀 슬픔은 잠가놓아 열 수 없는 상자였고, 열쇠 없는 집이었으며, 이름을 발음할 수 없는 지도 위 장소였다. 나는 어머니가 없었고 어머니를 가진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 잃은 적 없는 대상을 어떻게 그리워할 수 있을까?” (P. 32)
2017년 영국 런던, 로즈는 ‘어머니를 죽였을 때 나는 열네 살이었다.’라고 고백한다. 출생 이후 엄마가 남편과 자신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로즈의 삶에서 엄마는 부재했다. 늘 가슴속에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었지만 엄마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소외되고 차별 받는 삶을 살아왔기에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마음속에서 엄마를 죽은 사람으로 치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갈수록 깊어갔고, 로즈는 엄마의 흔적을 찾기 위해 그녀의 연인이었던 소설가 콘스탄스 홀든 (코니)에게 접근한다. 코니를 만나겠다는 일념하에 무작정 출판사로 전화를 건 로즈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로라 브라운’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비서로 일하게 되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면서 엄마인 앨리스처럼 자신감이 적고, 두려움이 많았던 로즈에서 대담하고 주체적이며 진취적인 삶을 살아가는 로즈로 변화되어간다. '나는 어머니를 찾아왔지만, 코니는 내게 어머니 대신 자아를 주었다.'는 고백처럼 로즈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녀의 삶의 궤적을 찾기 위해 여정을 시작했지만, 이 여정 속에서 로즈는 엄마의 삶이 아닌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
“자신을 돌보듯이 사랑도 돌봐야 해. 사랑이 혼자서 유지되며 자라기를 바랄 순 없어. 우린 사랑을 돌보지 않았어. 조,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그러길 원하지 않았고.” (P. 324)
“인생은 참 이상하지 않은가. 전 남자친구가 코니를 데려오다니. 그리고 인생은 기적이 아닌가. 코니가 오고 싶어하다니. 할 이야기가 너무 많고 서로 용서할 일도 너무 많았다.” (P. 455)
인생을 살아가는 간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예정하고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 인간적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존재와 소멸의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글과 같은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과,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인정’ 그리고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 그것은 환경의 제약 속에서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흐릿하게 잡힐 듯 떠오르는 희망에 대해, 삶의 온기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컨페션>의 등장인물들처럼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는 이유는 삶을 구성하는 각 주체들이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고, 그러한 의미들이 어우러지면 삶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나 연극의 무대가 아닌 인생의 무대에서는 조연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제3자의 눈으로 보면 누군가는 주연으로 누군가는 조연으로 보이겠지만, 모든 사람이 삶이 부여한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또 주체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컨페션>은 삶이란 혼자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하는 것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또 삶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깨닫는 것이라는 걸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