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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

김초엽 작가의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나는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렸다.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닮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극복할 수 없는 신분의 한계 속에서 사랑이라는 감정 마저도 자본이 가진 물성으로서 회복하고자 했던 한인물의 실패담이다. 소설의 전반에 걸쳐 ‘up’이라는 단어는 총 202번 등장하지만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자 했던 개츠비의 열망은 결국 그를 저 위쪽 어딘가가 아닌 파국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거야.” - p. 54,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중에서 -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내게 마지막 여행을 허락해주면 안 되겠나?” - p. 182, <우리가 빛의 속도로갈 수 없다면> 중에서 -
“가윤은 이 우주에 와야만 했다. 이 우주를 보고 싶었다. 언젠가 자신의 우주 영웅을 다시 만난다면, 그에게 우주 저편의풍경이 꽤 멋졌다고 말해줄 것이다.” - p. 319,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중에서 -
어쩌면 불투명한 미래, 상처와 트라우마를 딛고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불나방이 되어 불꽃 속에서 마지막 날개짓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 아닐까? 유토피아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행복의 근원을 찾아 돌아오지 않는 순례자들을 찾아나선 ‘데이지’와 자신만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실패가 예견된 여정을 선택한 ‘안나’, 삶의 의미를 찾아서 서로 다른 선택을 내린 ‘재경’과 ‘가윤’처럼 말이다. 불꽃 속에서의 마지막 몸부림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이런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이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면 이를 우리가 쉽게 재단할 수 있을까?
재즈의 선율을 따라 욕망이 흘렀던 시대에 살았던 개츠비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세월의 흔적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저마다가 직면한 세상에 맞서 살아가는 똑같은 인간만이 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김초엽 작가가 그리는 미래의 어느 시점은 그 아득한 시간의 간극이 걷히면 또 다른 우리의 모습으로 남는다. 언젠가 우리도 현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한 누군가와, 또는 <공생가설>의 이야기처럼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누군가와 공존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김초엽의 소설은 다양한 시공간에 놓인 인간의 삶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들은 ‘성좌(星座) 소설’ 즉, ‘별자리 소설’로 불린다. 인간의 삶은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직선적 사건이 아닌, 별자리처럼 시공간이 뒤섞인 원심형의 배열에 가깝다는 작가의 철학이 작품 속에 반영되어있기 때문이다. 별자리는 저마다 거리와 밝기가 다른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각각의 별들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제각기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별들은 인간의 가시거리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별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해내지 못하고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군집된 별자리로 인식하게 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며 저마다 개별적 삶을 살면서도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를 이루고, 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는 과정을 거쳐 역사를 구성하는 인간의 삶이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대를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 또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를 향하는 것은 인간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Kronos)' 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 (Kairos)'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꿈꾸고 호흡하게 하는 두번째 심장이다.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게 아닌가.” - p. 182,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에서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문제제기는 테드창의 단편 <거대한 침묵>과 맞닿아 있다. <거대한 침묵>에서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한 앵무새들은 인류에게 “잘 있어. 사랑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지만 무심한 인류는 이마저도 인지하지 못한채 지성을 가진 또 다른 외계 생명체를 찾기 위해서 광대한 우주를 향해 고정되어 있는 아레시보 전파 망원경에만 귀를 기울인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편견과 집착에 사로잡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거나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학기술이 가진 잠재력을 기반으로 특정 세계관과 시스템을 구성하고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다루는 것이 SF의 장르적 속성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기술’이나 ‘세계’ 그 자체 보다는 그에 반응하는 ‘인간’에 주목하는 SF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과 기술이 구현해내는 세계에 대한 냉철한 분석 보다는 그러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과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김초엽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마치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생가설> 속 류드밀라의 그림처럼 말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남겨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는 <위대한 개츠비>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소설은 단지 문제제기에 그치지 않고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온전히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외계생명체 ‘루이’의 연속성과, 분절되지 않은 ‘루이’의 존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스펙트럼>의 ‘희진’처럼 불가능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티끌 같은 희망이라도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고통과 비탄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그 세계에 함께 맞서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데이지’처럼 이해와 관심을 바탕으로 타인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류드밀라의 행성을 볼 때 사람들은 무언가 놓고 온 것, 아주 오래되고 아득한 것, 떠나온 것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모르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 p. 104, <공생가설> 중에서 -
우리가 잃어버린것들, 두고온 것들, 무심히 지나쳐온 것들은 무엇일까? 상실과 결핍, 좋았던 기억, 행복했던 추억들이 모여 하나의 삶을 이루고, 그렇게 쌓아올린 하나 하나의 삶들이 모여서 시대와 역사가 되고 하나의 별자리를 이룬채 조용히 빛난다.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하고 그에 적절히 대응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와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에 떠밀리지 말고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아닐까? 비록 워프 버블조차 만들 수 없어서 빛의 속도에 한참 못미치는 구식 우주선이라 할지라도 그 방향만 정확하다면 말이다.
“아무리 가속하더라도, 빛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참을 가도 그녀가 가고자 했던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나의 뒷모습은 자신의 목적지를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 p. 187,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