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으로 검색한 결과에,
이것도 10년 전인데 <우상의 황혼> 읽다가 옮겨 둔 것도 있다.
제도란 것이 개인의 기벽/기행(idiosyncracy)을 토대로 세워진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해서, 내가 앞서 말했듯이, "사랑"을 토대로 결혼 제도를 수립할 순 없다. 결혼의 제도적 토대라면, 성욕이나 재산욕(아내와 자녀도 재산에 포함된다), 혹은 지배욕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배욕이 결혼의 토대일 때, 최소 단위의 지배 구조가 끊임없이 조직되는데 그것이 가족이다. (<우상의 황혼> "모더니티 비판")
여기엔 이런 (허접한... ㅋㅋㅋㅋㅋ) 감상을 적어두었다: 누구나 한번쯤 진심으로든 '인용'으로든 해본 말, "사랑이 밥먹여주냐..." 혹은, <약한척 남자 부려먹기>였던가 <미친척 남자 부려먹기>였던가, 그런 제목 책. 90년대 중반쯤인가 황금가지에서 나왔던 책. 그 책 저자가 썼던 다른 책, <사랑하니까 결혼한다고?>. 사랑하니까 결혼한다고? 풋. 이런 인식의 면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다 니체언........
"사랑하니까 결혼한다고"로 알라딘 검색하니 나오는 책은 없다. "사랑하니까"와 "결혼한다고"는 각각 수백 혹은 수천 건 검색된다. "남자 부려먹기"로 검색하니 나온 책은, 어리숙한 척 남자 부려먹기. 약한척, 미친척이 아니라 어리숙한 척.
<미니마 모랄리아>엔 결혼(이혼)이 주제인 단장이 셋 정도 있다. 11번 단장이 그 중 하나. 영어판으로 읽고 옮겨 둔 게 있는데, 이런 식이다.
이혼은, 심지어 선하고 친절하며 잘 교육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때에도, 먼지 구름을 -- 그것에 닿는 모두를 덮고 변색시키는 -- 일으킨다. 친밀성의 영역, 공유하는 삶에 대한 경계심 없는 신뢰가, 그 안에서 그것이 번영할 수 있게 했던 두 사람의 관계가 깨지는 순간 독(毒)으로 변한다. 사람들 사이의 친밀성은 인내이며 관용이고 기벽들의 피신처다. 이 피신처가 바깥으로 노출되면, 그 안에 있던 허약함의 계기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혼에서 이같은 외부 노출은 불가피하다. 이혼은 친밀성의 창고를 압수한다. 한때 애정어린 보살핌의 표시였고 화해의 이미지였던 물건들이, 갑자기 독자적 가치를 획득하면서, 그것들이 품고 있던 사악하고 냉정하며 유독한 면을 드러낸다. 이혼한 교수는 전처의 아파트에 침입해 책상에 있던 물건들을 몰래 빼오고, 부유한 여자들은 그들의 남편이 탈세를 했다며 규탄한다. 만일 결혼이 비인간적 보편 내에 인간적 세포/섬을 형성할 마지막 가능성을 제공했다면, 결혼의 붕괴에서 보편의 복수가 일어난다. 보편은 규칙의 예외처럼 보였던 것을 포획하며, 그것을 권리와 재산이라는 소외된 질서에 종속시키고, 안전이라는 망상 속에 살았던 이들을 비웃는다. 아끼고 애착했던 것일수록 잔인하게 희생된다. 부부가 서로에게 더 관대했을수록, 소유와 의무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을수록, 이들의 모욕은 더욱 무참해진다.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영역에서, 싸움과 비방, 이해 관계의 끝없는 갈등이 무성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결혼 제도의 컴컴한 토대, 아내의 재산과 노동에 대해 남편이 행사하는 야만적인 권력, 한때 잠자리의 즐거움을 주었던 여자에게 평생의 책임을 지도록 남자를 강제하는, 그만큼 야만적인 성 억압 -- 이 모두가, (결혼이라는) 집이 붕괴할 때 웅크리고 있던 지하실과 기반으로부터 바깥 세상으로 기어 나온다. 각자를 구속적으로 소유하면서 선한 보편을 경험했던 이들이, 이제 사회에 의해 자신을 배덕자로 여기게끔, 구속 없는 비열함이라는 보편 질서에서 그들이 예외가 아니었음을 인정하게끔, 강요된다. 이혼에서 보편은 개별에 찍힌 치욕의 상처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사회에서 결혼, 즉 개별자는 진정한 보편성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 Minima Moralia, 11, "With all my worldly goods"
니체의 단장에서 밑줄 친 문장, "제도가 개인의 기벽을 기반으로 세워진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카우프만의 영어 역문에선 이렇다: Never, absolutely never, can an institution be founded on an idiosyncrasy; one cannot, as I have said, found marriage on "love.". 이 문장 독어 원문을, 내 집에 있는 최고 장식품 니체 독어 학생판 전집을 장식 아닌 목적으로 처음인가 두번짼가 이용해 찾아보니 이렇다: Man gründet eine Institution nie und nimmermehr auf eine Idiosynkrasie, man gründet die Ehe nicht, wie gesagt, auf die "Liebe."
아도르노 단장에서 밑줄 친 문장, "친밀성은 인내이고 관용이며 기벽들의 피신처다"의 영어 역문은: Intimacy between people is forbearance, tolerance, refuge for idiosyncrasies. 그리고 독어 원문은: Das Intime zwischen Menschen ist Nachsicht, Duldung, Zuflucht für Eigenheiten.
니체 문장에선 Idiosyncrasie가 그대로 idiosyncrasy로,
아도르노 문장에선 Eigenheiten이 idiosyncrasies로 번역된 것인데, Eigenheit를 독한사전에서 찾아보니 "특징, 특성, 이상함, 진기함"으로 뜻을 달고 있다. 형용사 eigen이 영어로는 one's own (Room of One's Own), 그럴 때 own의 뜻 같던데, 그것을 명사화하면 "개성" 비슷한 뜻이 되는 거겠다고 이해함.
idiosyncrasy (Idiosyncrasie) 이것도 "번역불가인 말"에 일단 올려둘 수 있을 것이다. 의미를 염두에 두면 "개성"이 무난한 역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개성"이 한국어에서 쓰이는 용례들이 그걸 쓰지 못하게 할 것. 또 개성의 "개"보다는 기벽, 기행.. 같은 말에서 "기"의 의미가 이 말에 있다고, 어쨌든 나는 이해한다. 그런데 기행도 기벽도 좋은 역어는 아니다. idiosyncrasy는 일회적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습관적인 것도 아니라서.
니체 문장을 책세상판 <우상의 황혼>에선 이렇게 옮겼다: "하나의 제도는 결코 괴상한 어떤 것에 기초해서 성립되지 않으며, 결혼은 이미 말했듯이 '사랑'에 기초해서 성립하지 않는다."
아도르노 문장의 한국어판 번역은: "인간들 사이의 친근감이란 배려하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독가시를 감싸주는 보호막이다." 오늘 아침 니체와 아도르노의 두 문장을 놓고 한국어, 영어, 독어를 오가다 생각이 자극됨. "개인"이나 "개성"이 (그것에 실제로 내용이 있을 때) 억압된다, 그것들은 여기선 중요성의 위계에 아직 들어가지도 못했다..... 같은 생각도.
올해 내가 산 비싼 책 top 10안에 들어가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인류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켜줄 책 top 100" 이런 걸 누가 어디서 선정한다면 후보작이 될지도 모를 이 책. 이 책 배송받고 넘겨보다가, "아 인간은 이런 일도 하는 존재다!" "누가 인간을 비방하는가..." "이 인간들(책 만든 사람들)을 보라.."며 혼자 감격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