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았던 가장 말 잘하는 사람? 

생각해 보니, 그 누구보다 정운영. 90년대 중반에

그의 어떤 강연 간 적 있다. 주제도 잊었고 내용도 단 한 구절이라도 기억에 남은 게 없는데 

키 크고 마른 몸, 그리고 정확한 문어체의 말은 잊히지 않음. 그가 평소 즐겨 입었다던 검정색 터틀넥. 


말 잘한다. 

이 말을 비아냥이나 의심의 표현 아니게 쓰기 어렵지 않나. 

영어에선 eloquent 이 단어가 부정적 의미로 쓰일 수 없음에 반해 

한국어에서 "말 잘한다"는 거의 언제나 부정적 의미. "말 잘한다"가 glib ("막힘없고 매끈하나, 실속 없는") 이 단어의 뜻으로만 쓰인다면, 말 잘함은 항상 나쁜 쪽으로 잘하는 것. 말 잘함은 우선 의심부터 하고 봐야하는 것. 


지금은 왜 정운영 같은 지식인 없는 걸까. 




<아메리칸 뷰티> 시작할 때 

케빈 스페이시의 독백에서 이 부분. 

"저 애는 내 딸 제인. 전형적인 틴에이저야. angry, insecure, confused. 

그 나이 때나 그럴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 


이 영화 비디오 출시되고 비디오로 처음 봤을 때 

한국어 자막에서 이 부분을 파격적으로 번역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마흔이 되면 불안하지도 화나지도 혼란스럽지도 않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이런 대사였다고 오래 기억함. 얼마나 명대사인가! 세월이 지나고 내가 그 나이 되고, 그 나이를 넘고 하던 동안 점점 더 감탄하면서. 그런데 실제로는 독백을 시작할 때 "내 나이 마흔 둘. 1년도 안될 시간 안에 난 죽을 거야"고 하긴 하지만, 저 명대사에서 "마흔이 되면.."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어쨌든 처음 볼 때 

정말인가. 정말 마흔이 넘어도 angry, insecure, confused인가. 믿을 수 없다. 

(그러던 매우 젊던 시절이 있었다 내게도). 


물론 전적으로 그렇기만 하다거나 

틴에이저가 그렇듯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정말 그렇기도 하지 않나. 

사실, 쉰이 넘어도 예순이 넘어도, 그럴 사람은 그럴 것 같지 않나. 죽기 전까지. 


*으아아아 요점 없는 포스팅. 이런 목적 없는 포스팅. 

쓰기 전엔 정운영과 아메리칸 뷰티를 잇는 무엇이 있었다. 

그런데 안 보인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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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자리 2017-01-01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글 좋아요!

목적은 없을지 몰라도(요점은 있어요!), 정신은 좋아하는 이런 글이요 ㅎ

꼭 이 글만 좋다는 게 아니라 (몰리 님의) 이런 글을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몰리 2017-01-01 20:55   좋아요 0 | URL
으아아아 ㅜㅜ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흑흑. 이런 댓글 주심 저 그러다
소설도 쓸지 몰라요. (왜! 나도 독자 있어! 그러면서........;;;;;)

물고기자리 2017-01-01 21:19   좋아요 0 | URL
독자는 확보하셨으니 쓰세요^^

저 말고도 이런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어떤 생각거리들을 툭툭 던져 주시는 데, 왜 그런지 설명할 순 없지만 그 주제들이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라서요.

어떤 목적이나 결론은 없더라도 생각 자체가 좋은, 그 느낌 알 것 같은, 뭐 그런 거요 ㅎ

몰리 2017-01-02 17:05   좋아요 0 | URL
제가 정말

얼마 전부터 소설을 (한국의 대학에 대해, 대학에서 한국 사회로....)
쓰고 싶다 써야겠다 쓰자 쓰자... 였었는데요

물고기자리님 말씀이
막 힘이 됩니다. 이히히히히히히. ;;;;
물고기자리님도 쓰십시다. 열심히 읽고 쓰십시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