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기. 영어로는 2014년 나온 앤드류 로버츠의 전기도 호평 받고 화제였다.
랑프리의 나폴레옹 전기엔 다루는 인물들의 심리도 있지만 랑프리 자신의 심리도 여러 페이지들에서 볼 수 있는데, 영어권 전기 작가들과 비교할 때 프랑스 전기 저자들이 보여주는 차이 하나가 여기 있지 않나 생각한다. 랑프리는 거침없이 인물들을 경멸하고 혹은 찬탄하고 애도하고 ... 평가하고 판단한다. 영어권에서 나온 전기인데 그러는 저자는, 나는 본 적이 아직 없다. 아마 정도의 차이일 것이긴 하다. 랑프리는 진정 "거침없이," 그러는 것이 전기 작가의 의무이자 특권인 것처럼, 그러는 데 반해, 영어권의 전기 작가들은 보통은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걸 조심한다는.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총재 정부의 부패, 나약함에 대해서 비판적인데 특히 총재 정부를 이끌었던 폴 바라스는, 참으로 차갑고 파괴적인 경멸의 대상이 된다.
나폴레옹도 랑프리에게 경멸의 대상인데 (나폴레옹은 그에게 "charlatan"이다. 그의 언어, 그의 행적의 거의 전부가 그의 "charlatanism"의 증거) 나폴레옹은 그걸 "위대함"으로 볼 것이냐 아니냐가 아직도 합의가 되지 않은 거겠지만 하튼 행적들의 스케일이 압도적이다 보니 저자가 그에게 던지는 이 지속적으로 차갑고 파괴적인 경멸을, 그걸 다 이기고, 살아 나온다. 나폴레옹은 심지어는 이렇게도 레전드가 되는구나. 같은 경탄이 일 수도.
이 전기에 뜻밖의 한숨이 나게 하는 대목들이 적지 않게 있는데, 마치 히틀러의 전기처럼 읽히는 대목들.
랑프리는 모르고 죽었지.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 이걸 일부러 기억하게 된다. 인간의 수명이 2백년쯤 된다면, 그는 2차대전 후 히틀러와 나폴레옹을 비교하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
전기 작가에게, 학자에게, 자기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이 의무이자 특권이 되게 하기. 랑프리 전기 읽으면서, 이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 경험의 전모에 열려 있기. 이게 역사학자에게 (인문학자에게) 의무이자 특권이라면, 자신의 감정의 전모에 열려있기가 그 의무이자 특권의 일부를 구성함. 백년 후의 인문학에서는 그럴지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