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쓰면 걸작이 나온다는 점에서 모차르트와 대적할 작곡가는 바흐 뿐이라고 한다.
모차르트의 경우엔 밥 먹고 술 마시고 당구치고 말 타고 (말 타고?) 아무튼 격한 신체 활동, 격한
(음악 아닌) 유희, 향락 활동 중에도 종이와 펜만 있다면 쭉쭉 작곡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자신 자신의
작곡 능력에 대해 한 편지에서 "소가 똥오줌을 싸듯이, 막을 수 없이 그냥 되는 것" 정도로 말하기도 했다 한다.
그에게 초고가 완결본이었다. 악보의 파지로 전해지는 단 한 장도 없으며, 초고이자 작품으로 남은
그의 악보에 수정의 흔적은 물론이고 망설임의 흔적조차 없다. 어디서든 그의 handwriting에는, 확신이 있다.
타고 나기를
나쁜 음악은 하려 해도 할 수 없었던 두 사람, 모차르트와 바흐.
미래(가 아니라 이제 "남은 삶"으로 말해야 정확할.... 것이라고 더 노인들도 계시겠기에 망발을....).
미래 혹은 남은 삶이 그 무엇보다 내가 쓴 논문으로 결정될 거라서, 가공할 현실 앞에서 그래도 버티고
쓰려고 애쓰는 중이다. 문학에서 쓰기 능력과 관련해 모차르트에 해당할 사례는 아예 없지 않을까.
문학에선 그게 아예 불가능한 거 아닌가. 위의 내용을 그린버그 교수 강의에서 들으면서 생각했다. 무엇이 더 공평한가.
왜 지난 세월 안(못) 쓰고
지금 고생하는가. 이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할 것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세 과목 강의의 주 4일 배치다. 이건 정규직 교원 아니면서 대학 강의로
생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만 민감한 문제일 거 같긴 하다. 일주일에 4일 나가면 적게 나가는 거 아니냐.
이렇게 보일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런데, 신분과 노후가 보장이 안되는 걸 넘어 보장 안됨으로 위협을 가하는 곳에서
신분과 노후가 보장될 만한 곳으로 이동도 할 수 없게 할 방법 하나가 강의 배치에 있다. 공부하고 논문 쓸
에너지와 시간이 직접적으로 걸려 있는 문제다.
하루에 너무 많이 강의하면 안돼요.
선생이 쌩쌩해야 애들이 배우지요.
이 말 잊을 수 없다. 그 웃음도 잊을 수 없다.
gleefully. 영어 단어로 이게 딱이다. 나의 행운에 혹은 남의 불운에 즐거워하는.
도덕철학과 정신분석을 결합한다면
한국 사회를 분석할 막강한 수단 하나가 나올지 모른다.
도덕철학, 정신분석, 인식론까지.